약자의 목소리와 디자이너의 조력이 세상을 바꾼다

2024. 10. 11. 12:59디자인/디자인이야기


불편한 현실을 바꾸는 힘은 약한 곳에서부터 나온다

이른 아침, 휠체어에 몸을 맡긴 한 남성은 고장난 경사로를 피해 한참을 돌아왔다. 간신히 시간에 맞춰 정류장에 도착했지만 지나쳐가는 버스를 보며 그는 이 사회에 자기의 자리가 없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그는 지금의 상황을 바꿀 힘도 없고 방법도 모른다. 권한과 책임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좌절감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에 그 막막함과 낭패감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하고, 알게 되어도 쓸모없는 해결책을 만든다. 문제를 고치려면 문제를 알아차리는 것이 먼저다. 그러니 불편을 느끼는 사람이 사회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사회 문제는 어려움에 처한 당사자들이 투쟁할 때만 개선된다. 노예, 여성, 노동 해방 등 약자의 진보는 약자가 이루었다. 불편한 현실을 바꿀 힘은 약한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지금껏 약자의 참여가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면, 현대의 정책 설계에서도 이 원칙이 고려되어야만 한다.

현재 정책은 주로 권력과 자원을 가진 사람들이 주도가 되어 설계하고, 주류가 그 정책이 가진 한계와 불편을 인식해 개선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정책 설계자와 정책 수요자 중 주류는 대부분 정책의 불편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를 이해하기 어렵고, 불편을 인식하더라도 근본적 통찰력이 부족해 잘못된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경우가 많다.(배 안에 있는 사람은 차가운 바다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약자들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고, 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큰 문제는 불편을 느끼는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디자이너들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디자이너들은 약자들의 불편을 민감하게 알아차려 그들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게 바꾸는 증폭기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주요 국가들의 행정부 내에서는 이러한 디자이너들이 정책 설계에 관여하는 동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 새로운 시대의 동향에 주목한 우리나라 기획재정부는 한국행정연구원을 통해 2018년부터 2022년까지 디자인 씽킹과 열린 정책 랩의 세계 동향을 조사하고 국내 적용 방안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열린 정책 랩'의 실체와 기능, 역할을 파악하고, 이를 우리나라에 도입하려는 방안을 모색했다.
* 참고 : 열린정책랩 관련 연구보고서, 한국행정연구원, 2018~2022 
하지만 이것은 아쉽게도 동향을 조사하고 서비스디자인 툴킷을 제작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만약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고, 근본적 해법을 찾으려 노력했다면 더 혁신적이고 포용적인 국가로 방향을 틀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약자로부터 시작되는 혁신

약자로부터 시작되는 혁신을 위해 해외에서는 크게 다음 두가지 유형의 동향이 나타나고 있다.

하나는 프로젝트 단위에서 사회적 약자와 디자이너가 주도적으로 참여해 정책을 만드는 사례이다.  
뉴욕 브롱크스의 멜로즈 커먼스(Melrose Commons) 프로젝트에서는 지역 주민들, 취약계층들이 도시 재생 계획의 초기 단계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했다. '우리는 여기 남는다(We Stay/Nos Quedamos)' 커뮤니티 조직은 주민들이 직접 정책 설계에 참여하도록 이끌며 지역 개발을 주도했다. 디자이너들은 조력자로서 주민들과 협력하여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개발을 이끌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와 같은 약자 주도의 정책 설계는 다른 국가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시도되고 있다.
이탈리아의 파코 디자인 콜퍼레이티브(PACO Design Collaborative)의 참여적 디자인 활동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외된 청년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디자이너들이 그들과 협력하여 지역 문제를 해결하고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냈다. 여기서 디자이너들은 약자들의 아이디어와 요구를 구체화하고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은 기후 회복력 도시로의 변화를 위해 블루-그린 코리더(Blue-Green Corridor)를 도입하고, 사회적 결속을 지원하는 실험적 주택과 공공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포용적 디자인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이 과정에서도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고, 디자이너들이 그들의 비전을 실현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이들 프로젝트는 약자들이 문제를 정의하고, 디자이너들이 그 정의를 실현하는 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보여준다.

다른 하나는 아예 정부 내에 디자인 전문가가 중심이 된 대안적 정책 개발 조직을 운영하는 예이다. 대체로 정책랩이라고 명명되는데, 2014년 창설된 영국의 폴리시랩이 가장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이외에도 호주, 미국 등 주요국, 지자체에 다양하게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 대체로 정책 수요자인 시민, 약자들이 참여하고 디자이너들이 방법의 전문가로서 함께 협력하는 구조가 관행을 깨고 성공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해외 정책랩 동향에 대해서는 따로 소개할 예정이다. 

* 정책디자인, 세계의 정책랩...  

 

정책을 디자인하는 조직, 세계의 정책랩 1

정책랩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사회문제는 갈수록 복잡한 난제(Complex Wicked Problems)로 변모하고 있어 기존의 행정 체계로는 이러한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전통적 행정은 계

servicedesign.tistory.com

* 해외 정책랩 운영 사례...

 

2024_해외 정책랩 운영 사례

ABCDEFGHIJKLMNOPQRSTUVWXYZ해외 정책랩(Policy Lab) 운영 사례번호국가명칭소속개요조직구성주요역할프로젝트 사례링크1캐나다Policy Horizons Canada(PHC)캐나다 연방정부정책결정에 도움이 되는 미래예측 연

docs.google.com

 

약자와 디자이너가 함께 구현하는 정책디자인

사회적 약자들은 사회의 취약성을 매일 최전선에서 경험한다. 그러니 사회 문제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일 수 밖에 없다. 디자이너들은 보이지 않는 문제를 보이는 문제로 만들고, 창의적으로 연결되지 않았던 것을 연결함으로써 문제해결의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불편을 느끼는 당사자들과 디자이너가 협력해 정책을 디자인한다면, 정책은 더욱 현실적이고 효과적으로 진화할 수 있다.
사회적 약자와 함께 디자인하는 것이 가지는 의미를 잘 보여주는 두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 아래 사례는 서비스디자인 특징 1 - 사람들을 잘 관찰한다. 에서 소개했던 내용이다.

사진의 할머니는 ‘페트리샤 무어’(Patricia Moore)라는 분이다. 한 눈에도 거동이 불편해 보인다. 페트리샤 무어는 26살 때부터 자그마치 3년간이나 전문 분장사의 도움을 받아 80세의 노파로 변장해서 미국과 캐나다를 여행하며 사는 경험을 했다. 대체 왜 그랬던 걸까?
“… 관찰이나 설문조사 같은 방법도 있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충분히 소통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 3년간의 경험으로 나는 젊은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세상에서 노인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노인의 삶을 체험해 보고 그들에게 맞는 눈높이로 디자인을 하기 위해 그 일을 해냈다. 페트리샤 무어는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100명의 여성 중 한 명으로 선정된 적도 있는 유니버설디자인의 거장 중 한 명이다.


사진 : Patricia Moore, 3년간(1979~1982)의 실험


관련 동영상 : 지식채널e '할머니와 냉장고' https://www.youtube.com/watch?v=YG2nOxn0d_0

 

디자이너는 직업인으로서 훈련되고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미세한 제품/서비스의 차이를 느끼고 불편을 감지하는 훈련을 거듭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감수성이 높고 지각, 인지, 감성의 예민한 감지자로서 미묘한 위화감(불편함)을 인식하고 공감력으로 사용자 경험의 문제를 발견하고 좋은 경험을 설계하는 전문가로 키워진다. 따라서 디자이너는 고객이 느끼는 서비스의 경험 가치를 잘 정렬함으로써 우리의 경험을 디자인하는 설계자의 역할자로 적합한 것이다.
2차 대전 때 잠수함에는 산소포화도를 측정하는 기술이 없어서 산소에 대한 민감성이 높은 토끼를 함 내에 두었다가 토끼가 죽으면 수면 위로 떠 오르는 식으로 감지기 대신 토끼를 활용하였다고 한다. 소설 ‘25시’의 작가 콘스탄틴 비르질 게오르규는 사회의 문제를 예고하는 데에 작가의 존재가 바로 잠수함 속 토끼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디자인은 사회의 문제를 발견하는 토끼가 될 수 있다.

사진 : 한국의 실무디자이너와 트라이포드디자인과의 워크숍 장면. 고령자를 위한 의약품 패키지 개발을 위해 고령자가 처한 상황에 공감할 수 있는 도구들을 활용한다. 목장갑은 손바닥 표면이 건조해서 비닐 커버를 뜯지 못하는 고령자의 상황을 젊은 디자이너도 느낄 수 있게 만든다. (오른쪽) 나카가와 사토시 (한국디자인진흥원. 2008)


두번째 사례는 일본의 디자인기업 ‘트라이포드디자인’(tripod design)의 예이다. 트라이포드디자인의 대표이자 도쿄대학 교수 ‘나카가와 사토시’(Nakagawa Satoshi)는 유니버설디자인의 전문가이다. 트라이포드디자인은 제품 개발할 때 만 명이 넘는 ‘리드 유저’(lead user)라는 사용자 풀(Pool)을 활용한다. ‘감각’이 앞서 있다는 뜻의 리드 유저는 다양한 형태의 장애를 가진 장애인들로, 디자인 개발 시 아이디어의 도화선이 될 수 있도록 이들을 참여시키고 있었다. 장애인들과 디자이너들이 한 팀이 되어 제품과 서비스의 불편함을 고도로 세세한 부분까지 감지해 개선한다.

예를 들어 젓가락을 디자인한다면 어깨나 손목 근육, 손가락 등이 불편한 사용자들을 팀에 합류시켜 디자이너들과 함께 디자인한다. 디자이너들이 장애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불편을 느끼는 부분을 찾고 개선하면서 배운다. 장애인은 ‘불편함’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예민도가 높아서 제품의 위화감에 대한 민감성이 최고 수준인 전문가이다. 이들도 편하게 느끼는 제품이라면 비장애인에게는 더욱 편리할 것임이 분명하다.
실제 이들은 완만한 곡면과 각진 면을 가져 힘을 주지 않아도 손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잘 구르지 않는 투명한 젓가락을 디자인했고 이것은 일본항공 JAL의 일등석용 제품의 원형이 되었다.

사진 : 장애인들은 아무리 기능이 편리하다 해도 독특한 형태로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젓가락은 선호하지 않았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디자인의 컨셉이 나왔다. 이 젓가락의 사용은 좌석의 조명 아래 우아하고 마법과 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좌) 장애인과 협업을 통해 개발된 젓가락 (시제품), (우)JAL에 최종 납품된 젓가락 2008년 시카고 아테네움 굿디자인어워드 수상


일상생활에서도 위화감을 민감하게 느끼고 불편해해야 좋은 디자인을 할 수 있다. 높은 공감력을 갖고 민감성이 뛰어난 예민한 디자이너야말로 문제점과 사용자의 잠재 욕구를 발견해 내는 좋은 제품/서비스의 설계자가 될 수 있다. 평균치의 민감성만으로는 사용자가 느끼는 불편을 찾아내기도 어렵고, 문제를 모르니 개선하기는 더 어렵다. 앞서 소개했던 자동판매기가 개선되지 않고 있는 예시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예민한 사용자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리고 예민한 사용자가 우리의 제품/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까다롭고 엄격한 품질관리가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과 같이, 제품/서비스가 까다로운 관점에서 세심하게 설계되어야, 덜 예민한 보편적인 사용자들도 편안하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 : 공감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사람이 서비스의 문제를 더 잘 인지할 수 있음

 

페트리샤 무어와 트라이포드 디자인. 이 두 가지 사례는 우리에게 예민한 사용자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준다. 우리는 모두 노인이 되는 중이고, 장애가 생길 가능성도 있다. 노약자, 장애인, 디자이너들처럼 예민한 사용자는 생활 속의 위험을 미리 감지하는 레이더의 역할을 해줄 수 있다. 디자이너는 문제를 감지하고, 이에 대한 구체적 해결책을 제안하고, 그것을 구현한다.

* 출처 : Tripod Design Co., Ltd. 나카가와 사토시


사회 문제는 다양한 정황으로 존재한다.
1. 문제가 밖으로 드러나고 해결방법도 쉽게 찾을 수 있는 단계
2. 문제가 드러나 보이지만 해결책은 잘 보이지 않는 단계

3. 문제가 보이지 않지만, 왠지 불편하게 느끼는 단계
4. 문제가 보이지 않고 불편함을 인식 못 하는 단계

그림의 세로선들은 민감성이 서로 다른, 다양한 사회 구성원을 의미한다. 구성원 각자가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수준이 서로 다르기에 길이가 제각각이다. 불편함에 대해 예민하게 느끼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3, 4단계의 위화감을 알 수 없는 반면, 좋은 디자이너, 예민한 디자이너, 장애인은 이것을 느낀다.
문제를 알아차릴 수 있어야 지적할 수 있고 지적할 수 있어야 해결할 수 있다. 또 이런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해야 더 정확히, 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려운 곳은 아는 사람이 긁어야 한다. 사회문제해결이라는 주제에 대해 디자이너들의 관심과 참여가 늘고 있는 것도 디자이너들에게도 이러한 인식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약자들의 경험과 통찰이 디자인이라는 방법으로 정책에 더해질 때 아이디어는 더욱 실질적이 된다. 불편을 느끼고 경험하고, 아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변화야말로 가장 효율적이고 지속 가능한 해결책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길이다. 약자들의 목소리가 만들어낸 물결이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듯, 이러한 협업은 사회 구조를 새롭게 형성할 수 있다.

미래의 정책 설계 과정과 결과는 지금보다 훨씬 더 포용적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는 정책 설계 과정에서 취약 계층의 목소리를 직접 반영할 수 있는 구조적 장치를 마련하고, 디자이너들의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불편을 겪는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디자이너들이 그들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 우리의 실정은 이런 이상적인 모습과는 큰 괴리가 있다. 취약계층이든 디자이너든 모두 정책에 관여하지 못한다. 정책 설계의 미래 방향은 사회적 약자들과 디자이너들이 함께 하는 협업 구조로 나아가야 한다. 둘의 협력은 실질적으로 수요자 중심의 사회로 변화하는 결정적 전환점이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시작된다면, 적어도 휠체어 사용자가 경사로를 걱정할 필요 없는 사회로 한걸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윤성원 + 챗GPT. 2024.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