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디자인이야기(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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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스크롤은 유죄 - 디자인의 역설
디자이너의 역할과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만큼 디자이너의 가치와 윤리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그러니 이제 사용자 중심 디자인의 원칙을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사용자의 생각을 덜 필요하게 만들고, 마찰을 제거해 매끄러운 경험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할 수 없다.오히려 사용자 편의만을 지나치게 고려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편안함을 추구한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런 편안함이 지나치면 우리는 나태해지고, 삶의 리듬은 무너지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해를 끼치게 된다. 모든 영역에서 최고의 사용자 편의를 추구하고 실현하려 한다면, 우리는 영화 ‘월-E’에 나오는 인간들처럼 될지..
2025.05.13 -
가장 성공한 실패, USB가 남긴 디자인 교훈
회사 책상 밑에 쪼그려 앉아 손끝으로 본체 뒷면을 더듬는다. USB 메모리가 잘 들어가지 않아서 뒤집어 꽂아 보아도 여전히 안 된다. 원래 방향이 맞았던가 싶어 다시 시도해보니 이제야 맞는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차례, 방향을 알 수 없는 작은 포트 앞에서 멈춰 선다. 평균 3번의 시도 후에야 제대로 꽂는다는 ‘USB 역설’. 소소한 불편이지만 반복될 때 얼마나 큰 낭비가 될지를 생각해보자.하루 10억 건의 USB 연결 중 절반이 실패하고, 실패당 3초가 걸린다고 가정하면 4,170만 시간(약 4,760년)이 낭비된다. 직장인 평균 시급 2만원 기준 생산성 손실은 연간 약 0.8조 원. USB가 1998년부터 대중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으니 누적된 손실은 20조 원을 넘는다. 이 포트는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2025.05.10 -
정책의 기본값을 다시 설정하자. 직관이 아닌 관찰로
정책은 이렇게 시작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2024년 2월, 대통령은 의과대학 정원을 2,000명 증원하겠다고 발표했다. 몇 일 뒤, 산단을 청년 친화적으로 개조할 '산리단길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대통령의 선언은 곧 '정책'이 된다. 부처 장관들은 그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대책 회의를 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던 문제가 갑자기 '긴급'해지고, 이미 수차례 경고되었지만 외면되던 사안도 '예견 못 한 위기'로 재포장된다. 이런 식의 예는 매우 많다. 2022년 10월, 이태원 참사 이후 일어난 일도 같았다. 대통령은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선언했고 곧 ‘국가 안전 시스템 개편 종합 대책’이 발표됐지만, 그 대책의 상당수는 이전에 미뤄졌던 사업을 재포장한 것..
2025.04.22 -
재난보다 무서운 건 준비되지 않은 정부다.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 사고는 단순한 해양 참사를 넘어 국가 재난대응체계의 구조적 결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 중심에 있던 진도실내체육관은 실종자 가족들의 임시 거처이자 국가와 국민의 신뢰가 충돌한 공간이었다. 사고 직후 정부는 진도체육관에 가족지원 상황실을 설치하고 식사, 물, 의료 등을 제공한다고 밝혔지만, 실제 현장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가족들은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며 밤낮없이 체육관에 머물렀고, 자원봉사자들이 음식과 물을 제공했지만 기본적인 프라이버시, 위생, 정신적 케어는 전무했다. 장기간 체육관 점유는 지역 주민들과의 갈등으로 번졌고, 결국 일부 가족들은 압박에 의해 다른 임시거처로 이동해야 했다. 그러나 그조차도 체계적인 지원이 아닌 ‘자리 옮기기’에 불과했다.사고 발..
2025.04.14 -
응답하라, 2025: 디자인이 묻는다. 당신은 어떤 나라에서 살고 싶은가?
모두의 질문Q: 모두를 위한 질문이 정책이 되는 곳‘모두의 질문Q’는 우리가 마주한 문제를 더 나은 질문으로 바꾸어 세상에 던지는 실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시도되는 '녹서' (Green Paper) 이니만큼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아직 활발하게 사용되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니라도 공감할 수 있는 한 줄의 질문들이 모여 사회 변화를 가져올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 녹서는 정부가 사회적 합의를 모색하기 위해 대중의 의견을 수렴하는 첫 단계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만드는 ‘질문으로 이루어진 문서’다. 정부는 녹서를 통해 국민에게 질문을 던지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데 활용한다. 그 질문에 공감하는 시민, 전문가, 공무원, 국회의원, 대통령 ..
2025.04.13 -
폴리 베르제르의 바, 그 거울 저편에 근대회화가 있었다.
1839년 사진이 발명된 지 약 50년. 『폴리 베르제르의 바』가 그려진 1882년, 사진은 이미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화가는 더 이상 현실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는 행위' 자체를 되묻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현실을 재현한다는 행위에 대한 자기 성찰, 그리고 철학적 자기 해석이 회화 내부에서 본격화된 시점이었다. 이 그림은 거울로 나뉘어진 두 세계를 보여준다. 그림의 전경에는 바의 여성 종업원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으나 거울에 반사된 배경엔 그녀가 한 남성과 대화 중이다. 몸의 동작, 얼굴의 각도가 다르다. 반사의 위치도 맞지 않는다. 거울과 반사라는 고전적 장치를 활용하면서도, 그 법칙을 의도적으로 무시해 감상자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이것은 거울 안과 밖이 서로 다른 시간을 ..
2025.04.07 -
영국의 디자인과 정책: 주요 현안과 미래 연구 방향 - Lucy Kimbell, Catherine Durose, Ramia Mazé, Liz Richardson
영국의 디자인과 정책: 주요 현안과 미래 연구 방향루시 킴벨, 캐서린 뒤로즈, 라미아 마제, 리즈 리처드슨Design and Policy: Current Debates and Future Directions for Research in the UK Lucy Kimbell, Catherine Durose, Ramia Mazé, Liz Richardson. 2023. 10.AHRC Design | Policy Research Network 보고서원문 출처 : https://gtr.ukri.org/publication/overview?outcomeid=65eb09b2d9a5b1.71874088&projectref=AH/W009560/1 이 보고서는 영국 예술인문학연구위원회(AHRC, Arts and Human..
2025.03.15 -
왜 우리는 정치적 입장을 바꾸지 않는가? - 필터버블을 탈출하기 위한 행동지침
왜 우리는 정치적 입장을 바꾸지 않는가?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알고 싶은 것만 알게 된다. SNS 알고리즘과 인간의 확증 편향이 결합하면서, 기존 신념을 강화하는 정보만 반복적으로 접하게 되어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거나 고민할 기회가 차단된다. 결국 이는 자신만의 울타리 안에 갇히게 하고 변화나 대화를 어렵게 만든다.엘리 프레이저(Eli Pariser)는 그의 저서 '생각조종자들(The Filter Bubble)'에서 알고리즘이 사용자 데이터를 기반으로 선호도를 예측하고 이에 맞는 콘텐츠만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사용자는 자신이 이미 동의하는 의견과 유사한 정보만 접하게 되며, 다른 관점은 배제된다.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이 메세지를 접할 때 알고리즘은 보수적인 뉴스, 의견, 밈(me..
2024.12.14 -
약자의 목소리와 디자이너의 조력이 세상을 바꾼다
불편한 현실을 바꾸는 힘은 약한 곳에서부터 나온다이른 아침, 휠체어에 몸을 맡긴 한 남성은 고장난 경사로를 피해 한참을 돌아왔다. 간신히 시간에 맞춰 정류장에 도착했지만 지나쳐가는 버스를 보며 그는 이 사회에 자기의 자리가 없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그는 지금의 상황을 바꿀 힘도 없고 방법도 모른다. 이 주제에 관련해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류의 좌절감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에 그가 느끼는 막막함과 낭패감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하고, 알게 되어도 쓸모없는 해결책을 만든다. 문제를 알아차릴 수 없으면, 고칠 수도 없다. 그러니 불편을 느끼는 사람이 사회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사회 문제는 어려움에 처한 당사자들이 투쟁할 때만 개선된다. 노예 해..
2024.10.11 -
2020년대 이후 영국의 새로운 공공기관 디자인 - 제프 멀건, 2024.5.6.
2020년대 이후 영국의 새로운 공공기관 디자인 Designing new public institutions for the UK in the 2020s and beyond제프 멀건, 2024.5.6.* 이 글은 저자의 허락을 받아 번역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https://www.geoffmulgan.com/post/designing-new-public-institutions-for-the-uk-in-the-2020s-and-beyond Designing new public institutions for the UK in the 2020s and beyondAhead of the general election, attention is beginning to turn to what new institut..
2024.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