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5. 10. 05:52ㆍ디자인/디자인이야기
회사 책상 밑에 쪼그려 앉아 손끝으로 본체 뒷면을 더듬는다. USB 메모리가 잘 들어가지 않아서 뒤집어 꽂아 보아도 여전히 안 된다. 원래 방향이 맞았던가 싶어 다시 시도해보니 이제야 맞는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차례, 방향을 알 수 없는 작은 포트 앞에서 멈춰 선다. 평균 3번의 시도 후에야 제대로 꽂는다는 ‘USB 역설’. 소소한 불편이지만 반복될 때 얼마나 큰 낭비가 될지를 생각해보자.
하루 10억 건의 USB 연결 중 절반이 실패하고, 실패당 3초가 걸린다고 가정하면 4,170만 시간(약 4,760년)이 낭비된다. 직장인 평균 시급 2만원 기준 생산성 손실은 연간 약 0.8조 원. USB가 1998년부터 대중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으니 누적된 손실은 20조 원을 넘는다. USB 포트는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가장 널리, 가장 무의미한 동작을 반복하게 한 구조물이다. 그리고 여전히 수십억 개의 기기에서 사용 중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 몰상식한 인터페이스가 확산된 결정적 계기가 인간 중심 디자인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애플로 인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USB가 표준으로서 입지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1998년, 스티브 잡스는 애플에 복귀한 후 첫 히트작이 되었던 iMac G3를 발표하면서 당시 많이 이용되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시리얼 포트를 제거하고 유일한 외부 인터페이스로 USB-A 포트를 탑재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애플은 시장 점유율은 낮았지만 디자인 트렌드를 주도했기에 주변기기 제조사들은 iMac의 USB 전용 구조에 빠르게 적응했다. 이어서 마이크로소프트도 윈도우98에서 USB를 정식 지원하였고, 인텔은 자사 칩셋에 USB 컨트롤러를 기본 탑재하면서, 결과적으로 1999~2001년 출시된 거의 모든 PC 메인보드가 USB 포트를 기본 사양으로 채택하게 된다. 기술사를 돌이켜볼 때 극히 예외적이면서도 완벽에 가까운 기술 표준화의 성공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애플의 결정은 조너선 아이브의 간결한 디자인 철학과 맞물려 급진적인 혁신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기술 선도와 디자인 미학에 집중한 나머지 인간의 실제 사용 맥락은 배제된, 공급자 중심의 의사결정이었다. 그 결정의 여파는 사소하지만 짜증을 부르는 사용자 경험이 되어, 누적되며 생산성과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가장 널리 퍼진 기술적 성공이 가장 광범위한 디자인 실패가 되었다. 사용자 중심 디자인의 표상이라 여겨지는 조직의 의사결정에 의한 결과라는 점에서 역사적 역설이라 할만하다.
USB-A가 비용과 회로의 복잡성을 줄이기 위한 방안이었다는 변명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USB-A의 개발자인 인텔의 아제이 바트(Ajay Bhatt)조차 '가장 큰 불편은 방향성 문제였다'고 인정했다. 그 결정은 수십억 사용자에게 불편을 떠넘긴 나쁜 공급자의 선택이었다.
USB-C가 비용 증가를 감수하고라도 대칭 구조를 채택한 것은 이 실패에서 배운 결과였다. 2014년 등장한 USB-C는 어느 방향으로든 꽂히고, 데이터 전송 속도도 빨라졌으며, 전원 공급도 가능해졌다. 사용자는 더이상 세번씩 방향을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야 세상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스티브 잡스와 조너선 아이브는 이 사건에 대한 사죄라도 하듯, MagSafe(2006년)를 통해 한층 다른 맥락에서 인간 중심 디자인을 구현해냈다. 그것은 바로 맥북 시리즈에 적용된 자석식 충전 단자였다. 스티브 잡스와 조너선 아이브가 주도한 이 자석 기반 충전 단자는 방향성에 대한 고민도 필요 없고, 전원선이 발에 걸리더라도 책상에서 노트북이 떨어지는 사고 없이 단자가 안전하게 분리된다. 인간의 실수 가능성을 전제로 설계된 보기 드문 기술적 배려였다. 그것은 디자인이 다시 인간을 향할 때 어떤 성과를 낼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USB 디자인의 실패가 남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기술 우위를 점하려는 욕망은 설계 초기단계에서 반드시 인간의 행위, 환경, 맥락을 고려하는 디자인적 사고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기술은 빠르고 정밀하지만, 인간은 느리고 실수한다. 디자인은 이 간극을 메우는 다리여야 한다.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만들든 이것이 사람에게 어떤 행동을 유도할까를 우선 생각해야 한다. USB-A는 이 질문을 간과한 대가를 전 인류로부터 세금처럼 거두고 있다. 디자인은 늘 기술보다 인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디자인이 한눈을 팔게 되면 기술은 우리를 피로하게 만든다.
USB는 기술 선도라는 집단적 열망이 어떻게 '인간 중심'을 망각하게 만드는지를 드러내는 일상의 증거다. 그 질문을 가장 놓쳐선 안 되었던 조직, 애플마저도 예외는 아니었다.
2025.5.10. 윤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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