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의 기본값을 다시 설정하자. 직관이 아닌 관찰로

2025. 4. 22. 12:29디자인/디자인이야기

정책은 이렇게 시작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2024년 2월, 대통령은 의과대학 정원을 2,000명 증원하겠다고 발표했다. 몇 일 뒤, 산단을 청년 친화적으로 개조할 '산리단길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대통령의 선언은 곧 '정책'이 된다. 부처 장관들은 그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대책 회의를 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던 문제가 갑자기 '긴급'해지고, 이미 수차례 경고되었지만 외면되던 사안도 '예견 못 한 위기'로 재포장된다.
이런 식의 예는 매우 많다. 2022년 10월, 이태원 참사 이후 일어난 일도 같았다. 대통령은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선언했고 곧 ‘국가 안전 시스템 개편 종합 대책’이 발표됐지만, 그 대책의 상당수는 이전에 미뤄졌던 사업을 재포장한 것이었다. 본래 예산 확보에 어려움을 겪던 항목들이 ‘안전’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재등장했다. 외양간을 고친 것이 아니라, 외양간 입구에 ‘고쳐졌음’이라는 현수막을 붙인 셈이다. 물론 '일부' 정책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럴듯한 대책이 난무하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정책 기획에 연구개발이 빠져 있다

한 지자체 공공수영장 이용객 수가 갑자기 줄었다. 수영장을 둘러본 공무원들은 건물 시설이 낙후된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건축가에게 건물을 리모델링하기 위한 디자인을 주문했다. 새 디자인 안을 보기로 했던 회의에서 건축가는 기대와 다른 해법을 제시했다. 
"사람들이 안 오는 이유는 버스 시간표 때문이었습니다. 작년에 30분씩 당겨진 셔틀버스 운행 시간 때문에 사람들이 출근 전에 수영장을 이용하기 어려워졌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줄어든 수영장 문제’는 수요자의 시각에서 원인을 찾지 않는다면 해결되지 않는다. 지자체가 재건축에 큰 예산을 써도 여전히 사람들은 오지 않을 것이다. 이 우화는 정책 기획 단계에 서비스디자인의 관찰, 공감, 수요자 중심의 문제 정의 능력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한다. 문제를 잘못 정의하면, 정책은 거대한 헛수고가 된다.
정책 수립에 앞서 수요자의 문제를 관찰하고, 가설을 설정하고, 실험과 반복을 통해 검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절차다. 그러나 우리 행정의 정책 기획 단계에는 그런 과정이 없다. 기본이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수요자의 목소리는 전문가 자문 뒤에 묻히고 시범사업도 형식에 그친다. 정책기획자들은 대체로 “빠르게 계획서를 만들고, 빠르게 검토하고, 빠르게 실행” 되는 구조에 익숙해져 있다. 결과적으로 국민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행정을 위한 정책이 생산된다. 정책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의도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고, 상식도 지켜지지 않게 된다.

정책 개발의 과정을 다시 디자인하자

정책이 소수의 직관과 선언으로 실행되어서는 안 된다. 정책은 국민의 요구를 출발점으로 삼고, 관찰과 실험을 거쳐 점검 가능한 구조로 개발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생각 없는 설계, 실험 없는 실행은 정책의 실패를 이끈다. 서비스디자인은 이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실질적 대안이 될 수 있다. 서비스디자인은 단순히 겉모양을 꾸미는 것이 아니다. 수요자의 맥락을 관찰하고, 문제를 다시 정의하며, 반복적인 테스트를 통해 실행 가능한 해법을 찾아내는 ‘정책의 연구개발 방법론’이다.

'국민디자인단' 사업은 서비스디자인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정책 수요자인 국민, 공급자인 공무원, 중개자인 서비스디자이너가 함께 정책을 설계하는 모델로, 지금까지 2천여 개 과제를 통해 사용자 중심 문제 재정의, 공동 개발, 반복 검증 등 정책에 필요한 실험을 거듭해왔다. ‘골든타임 72’(학교재난 트라우마 대응), ‘가치 운동할래?’(장애인 건강증진 프로그램), ‘휴블런스’(고령자·장애인 병원동행 서비스) 등은 기존에 없던 공공서비스를 만들어냈고, 개발 이후 제도화되며 실효성을 입증했다.

올해 본격 추진되는 ‘청년 디자인 리빙랩’은 서비스디자인 접근을 정부 공모사업에 공식화한 첫 사례다. 산업부, 문체부, 국토부가 함께 추진하는 ‘문화가 담긴 산업단지’ 조성 계획에 한국디자인진흥원이 기획 단계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해 지역의 청년 수요자, 서비스디자이너와 지자체, 산업단지공단이 협업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리빙랩은 4년간 운영되며, ▲1차년엔 과제 도출과 로드맵 수립 ▲2차년과 3차년에는 아이디어의 실험과 검증 ▲4차년엔 실행과 성과공유를 통한 지속 가능성 확보를 목표로 추진된다. 각 단계마다 수요자의 행동에서 잠재된 욕구를 포착하고, 디자인으로 구현하고, 반복 실험으로 수요자 반응을 확인하는 실증 연구가 동반된다. 이는 단순히 ‘수요자의 참여’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정책을 만들 때 연구개발을 구조화해 넣는 설계적 실험’이다. 정부 정책에서 이렇게 디자인이 처음부터 개입되어 전체 구조를 설계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며 의미가 크다. 수영장에 사람이 오지 않는 진짜 이유를 찾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정책 과정의 기본값은 재설정되어야 한다. 정책 과정의 기본값이란,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고 해법을 도출할 것인지에 대한 설계 원칙을 말한다. 지금의 방식은 ‘선언 → 개발 → 시행’이라는 일방향 구조다. 더 나은 정책을 위해서는 ‘관찰 → 개발 → 실험과 검증’이라는 반복적이고 진화하는 구조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정책은 말이 아니라 생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서비스디자인은 그 생각을 수요자의 관점에서 시작해 실험과 반복을 통해 현실에 맞게 다듬는 과정이다. 국민디자인단이나 청년 디자인 리빙랩은 작은 사례에 불과하다. 이제는 서비스디자인을 정책 기획의 표준적인 방법으로 제도화해야 한다. 
정책 수립의 첫 단추는 '말씀'이 아닌 관찰이어야 하고, 계획은 실험으로 검증되어야 한다. 국민의 삶을 들여다보고, 실험해보고, 실패해보아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정부는 앞으로도 외양간에 현수막 바꿔거는 일만 반복하게 될 것이며, 그 와중에 소들은 다 집을 떠나고 말 것이다.

2025.4.22. 윤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