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허락하지 않는 나라

2025. 6. 5. 07:03서비스디자인/정책디자인

대한민국은 '기억하지 않는 나라'다. 기억 상실이 제도화되어 있다.
대표적인 제도를 꼽자면 대통령기록물의 봉인과 공무원의 순환보직제도다.

기억을 차단하는 제도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은 퇴임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한다.
대통령은 재임 중 생산된 모든 회의록, 지시사항, 정책자료 등을 퇴임 직전 ‘지정기록물’로 봉인할 수 있고, 봉인되면 최대 30년간 누구도 열람할 수 없다. 차기 대통령도, 국회도, 수사기관도 예외없다. 열람을 원하면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찬성 혹은 고등법원 영장이 있어야 하니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대통령의 기록은 국민이 가장 알고 싶어하는 내용일수록 볼 수 없게 설계되어 있는 셈이다.
일각에서는 '지정기록물 제도는 국가안보와 외교관계, 사생활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이 제도가 권력자의 책임 회피나 정치적 논란을 피하는 방패로 사용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문제는 이 제도가 '비공개'가 아니라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지정기록물이 된 사유도 공개되지 않으며, 목록을 볼 수 없으니 어떤 사안이 봉인되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다. 제도 존치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면 최소한 그 운영의 투명성과 책임성은 담보되어야 한다.
2016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전국민이 충격에 빠졌다. 대통령의 연설문과 청와대 내부 자료가 민간인에게 유출되고, 외교·경제 정책에 비선이 개입했다는 사실이 검찰과 특검 수사,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을 통해 확인되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퇴임 직전 청와대 자료 중 약 17만 4천 건을 ‘지정기록물’로 지정해 봉인해버렸고, 이로 인해 국회 국정조사와 향후 진상 규명을 위한 행정적·정치적 접근에 결정적 제약이 생겼다. 결과적으로 형사적 판단이 내려졌지만, 정책 결정의 과정과 내부 기록의 전모는 공개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 국정농단이 어떤 의사결정 구조 속에서 가능했는지를 기록을 통해 성찰하고 재발을 막는 일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지금도 범죄의 증거를 감추는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는 중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기록물 총 1,365만 건 중 21만8천423 건의 자료들이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제17조에 따라 '대통령지정기록물'로 분류되어 최대 30년간 비공개될 예정이다. 대통령기록물의 지정 권한이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넘어갔을 때도 내란 관련 기록 등 민감한 사안들이 지정기록물로 봉인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었다. 지금은 지정기록물의 목록조차 비공개되어 어떤 내용이 봉인되었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 출처 : ‘윤석열기록물’ 22만건 최대 30년 비공개…‘내란 자료’ 봉인됐나. 한겨레. 2025.6.4.

공직사회에 기억상실을 가져오는 더 근본적인 문제는 공무원의 ‘순환보직제도’다.
대부분의 공무원은 1~2년마다 부서를 옮긴다. 아무리 단순한 아르바이트도 달인의 수준이 되려면 이보다는 더 오래해야 한다. 그러니 공무원 중에 전문성을 갖춘 달인은 나올 수가 없다. 정책이 실패하더라도, 담당자는 이미 다른 부서로 이동해 있고, 감사나 국정감사에서도 "그 시점에는 제가 아니었습니다"라는 답변이 반복된다. 순환보직은 책임 없는 행정, 맥락 없는 기획, 학습 없는 반복을 만들어낸다. 정책의 실패는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되지 않고, 조직 전체의 탓으로 흐려지다가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게 된다.
한편에서는 순환보직제도가 '부패 방지'와 '균형 인사'라는 장점을 갖는다는 반론을 제기한다. 실제 동일 직무에 장기간 재직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부정청탁, 비리 연루, 부처 내 이기주의 등의 우려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문성의 포기'를 정당화하진 못한다. 구더기가 무섭다고 장을 아예 담그지 않는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문제 자체의 회피다. 더구나 이는 '부정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으니 기억을 지우자'는 발상과 다름없다.
순환보직의 주기와 대상이 무차별적이라는 것은 분명 문제이며, 이를 조정하지 않고 유지하는 것은 전문성을 담보하지 못한 행정을 고착화시키는 것이다. 공직사회 내부에서도 핵심 정책부서에 대한 장기보직 도입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단절이 아니라 축적, 회피가 아니라 반성과 학습이 작동하는 기억의 행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는 것이다.
현실은 왜 이 모양인가? 이 문제를 풀 해법은 없는걸까?

기억하는 나라를 만들 수는 없을까?

미국의 대통령기록법, 공개가 원칙
미국은 국가의 의사결정이 민주주의 시민의 평가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실천하고 있다. ‘기록은 기본적으로 공개’, ‘봉인은 예외’라는 구조다. 1978년 제정된 「대통령기록법(Presidential Records Act)」을 통해, 대통령이 임기 중 생산한 모든 기록은 공공 기록(public record)으로 간주된다. 임기 종료와 동시에 미국 국가기록원(NARA) 소유로 이전된다. 원칙은 공개이며 엄격한 조건에 부합해야 비공개 요청이 가능하며 반드시 그 사유를 명시하고 국립문서관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
대통령 기록은 퇴임 후 5년간은 일반인의 정보공개청구(FOIA) 대상에서 제외되며, 이후에는 제한된 항목에 한해 최대 12년간 비공개 지정이 가능하다. 공직자에겐 업무 연속성을 위해 필요한 경우 열람이 허용된다.
이점에서
우리나라와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는 대통령 지정기록물은 대통령 의지에 따라 봉인되며 실무 공직자는 물론이고, 차기 정부 주요인사들조차 볼 수 없다. 심보가 나쁜 대통령이 자신의 과오를 덮으려고 정보를 공개하지 않기로 작정한다면 정책의 맥락 파악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다.

스웨덴, 국민은 모든 정부문서를 본다
스웨덴은 '정보공개법'이 세계 최초로 도입(1766년 ‘공공문서에 대한 접근법 Offentlighetsprincipen)된 나라다. 국민은 관료의 이메일, 회의록, 출장비 명세 등 국민은 거의 모든 정부 문서를 열람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스웨덴 같은 제도를 갖추었다면, 이재명 대통령의 경기도지사 시절 부인 김혜경씨가 쓴 10만원 상당의 식사비 내역 뿐 아니라, 윤석열 검찰총장 시절 수십억 원 넘게 썼다는 용도를 알 수 없는 특활비, 원희룡 제주도지사 억대 식비, 나경원 의원의 수천만 원의 주유비 등 할 것 없이 국민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시원하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원칙은 정치권의 “기억 상실”을 예방하는 법적 안전장치로 작동한다. 덕분에, 퇴임한 공무원이나 정치인의 책임 추궁이 실질적으로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핀란드, 공공 기록삭제는 범죄
핀란드는 더 철저하게 공공정보를 관리한다. 고의든 실수든 기록을 없애는 건 범죄로 취급된다. 공무원의 모든 업무기록은 디지털 백업과 메타데이터로 관리되고 있으며 정책의 메모조차 의도적으로 삭제할 때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핀란드 옴부즈만은 시민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최소 수개월 단위의 공식적 책임 추적 보고를 해야 하며, 대신 익명의 민원은 철저히 기록되고 보관되고 있다.

독일, 정책 실패는 기록으로 남아 학습자원이 된다
독일은 ‘기억의 민족’이라 불릴 만하다. 역사상 최악의 범죄인 아우슈비츠를 어떻게 기록하고 다루는가를 보면 이 나라가 과거를 대하는 방식이 얼마나 철저한지 알 수 있다. “정책의 실패는 조직의 학습 자원”이라는 관점이 강해, 과오를 숨기기보다 남겨야 할 지식으로 본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행정직의 경우 부처 내 장기 근속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점이다. ‘공무원 경력경로제(Beamtenlaufbahn)’에 따라, 직무 특성에 맞춰 전문성을 계승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국방·내무·외무 등 핵심 부처는 수십 년 근무하는 ‘전문관료’ 중심으로 운영된다.
부처 간 인사교류는 극히 제한, 직위에 따른 이동이 아닌 직능 중심으로 승진되는 구조이다. 고위공무원의 순환보직제를 엄격히 제한한다. 정책을 기획·집행하는 주요 부서에선 3~5년 이상의 장기 보직이 원칙이며, 공무원이 한 사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구조를 중시한다.
또한 정책 추진 시 기안자, 승인자, 실행자 정보가 모두 기록되고, 정책 실패 시 담당 실무자가 실명으로 추적 가능하다. 독일의 이런 구조는 행정에 책임을 남기고, 조직이 기억을 축적할 수 있도록 만든다. 한마디로, 실패한 정책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만드는 행정의 기억 장치다.

한–독 외교 회담의 장면을 상상해보라. 독일 측 수석참사관 일동은 20년간 한반도 외교라인에서 근무한 베테랑이고 지난 회담의 비공식 입장, 실무자의 정서적 반응, 과거 문서에 없는 분위기까지 다 기억하고 있는데 반해 한국 측은 평균 근무기간이 고작 1년이다. 이 일을 맡은후 인계받았던 전임자의 파일은 대부분 ‘해당 없음’ 혹은 ‘공람 후 폐기’였기에 팀 전체가 사안에 이해가 없는 초보자나 다름없다. “지난번 회담에서 그런 말 했었나?”를 현장에서 상대국에게 질문하며 확인하는 굴욕을 겪게 될 게 뻔하다. 국가의 이익을 가르는 중요한 외교 회담이 이런식으로 진행된다면 끔찍한 일 아닌가.

우리는 왜 ‘기억’을 거부하는가

왜 대한민국은 대통령 기록을 닫고, 공무원을 돌려가며, 정책을 잊도록 만들까?
기억은 책임을 부르고, 책임은 권력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책임 회피가 제도화된 행정, 정의 구현이 불가능한 구조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기억을 허락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제도적 개편이 필요하다. 다음은 그 구체적 방안이다.

첫째, 「대통령기록물관리법」 개정을 통해 기록의 기본값을 ‘공개’로 전환해야 한다.
미국이나 스웨덴처럼 대통령 기록물은 기본값을 공개로 해야 한다. 국익을 위해 보안이 필요한 정보는 지정기록물로 분류하되 이것을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 정하게 해서는 안된다. 독립적인 심사위원회의 검토를 거쳐 비공개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대통령의 기록을 수정, 삭제하는 것도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 조선왕조는 왕도 내용에 관여할 수 없게 엄격하게 기록을 관리해 기록이 권력자를 견제할 수 있도록 했다.
보안 문서라고 해도 중요 정책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차기 정부가 제한적으로 열람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업무연속 열람권’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특히 국정농단이나 탄핵과 같이 중대한 공공문제와 관련된 기록은 ‘공공조사 목적에 따른 공개’를 원칙으로 명시하여, 역사의 반복을 막기 위한 사회적 학습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둘째, 공무원 인사제도 개혁이 필요하다.
정책의 연속성과 전문성이 요구되는 기획, 예산, 전략, 통상, 안전보건, 인구정책 등의 부서에는 최소 5년 이상 장기 보직제를 도입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모든 부서에 일률적인 순환보직이 적용되었지만, 사실 기억이 중요하지 않은 부서는 없다. 장기보직이 곧 부패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아울러, 정책기획부터 집행, 평가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담당자의 이력을 자동으로 추적할 수 있는 실명 기반 정책 책임 시스템을 도입하고, 이력은 성과평가와 연계되도록 하여 책임 있는 행정을 제도화해야 한다.

셋째, 정책의사결정의 흐름을 축적·공개하는 행정기억 저장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모든 정책은 기획에서 집행, 평가까지의 의사결정 과정을 타임라인 형태로 기록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공개되도록 하여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정책 실패가 발생한 경우에는 사후 분석보고서의 작성과 공개를 의무화함으로써, 같은 실패가 반복되지 않도록 학습 가능한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사실 지금까지 기록이 부재했던 이유는 시스템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기억을 남기지 않으려는 구조와 문화 때문일 것이다.

기억은 책임을 낳고, 책임은 정의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나라가 원래부터 기억을 못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잘 기억하는 민족이었다. 특히 권력자에 대해서는 무서울만큼 철저하게 기록했다. 조선왕조는 472년 재위 중 군주의 언행과 국정을 지속적으로 기록했고, 왕조이면서도 사관에게 왕의 발언과 행동을 기록하도록 맡기고, 그 내용을 임금도 열람하지 못하도록 하여 권력자를 기록의 감시 아래 두었다. 그런 노력을 기울여 만들어낸 실록이 무려 1,893권, 약 2억 5천만자 분량이다. 이 기록의 방대함은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귀한 사례이기에 유네스코도 세계기록유산 (Memory of the World)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민주공화국을 자처하면서도 권력의 과오는 잊히기를 바라고, 시민은 진실에 접근하지 못한다.
이제 우리는 ‘기억의 회복’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개혁 앞에 서 있다.
그 첫걸음은 기록을 공개하고, 책임을 추적하며, 실패로부터 배우는 행정 설계로 바꾸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기억하지 않는 행정은 과거를 반성할 수도, 미래를 설계할 수도 없다.
정의는 기억에서 출발한다.
대한민국이 정의로운 나라가 되려면, 기억을 허락해야 한다.
기록을 지우는 나라에 정의는 없다.


2025.6.5. 윤성원
#정책디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