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 22. 00:05ㆍ디자인/디자인이야기
라면은 애당초 사각형이었다.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그래, 자고로 라면이라면 사각형이지"
라며 어떤 형태도 될 가능성이 있었음을 잊어버렸다. 사각형 라면 형상이 머리 속에 새겨지길 거듭하면서 다른 가능성은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1963년 라면이 출시되고 나서 오랫동안 사각형 모양엔 변화가 없었다. 둥근 냄비에 넣기에 사각형은 모서리가 부딪히고 걸려 불편했다. 사람들은 2~4 조각으로 쪼개 조리했고 짧은 길이의 면을 먹게 되었는데 이것은 라면 본연의 가치를 손상하는 일이다.
무려 20년이 지난 후에야 변화가 일어난다. 1982년 최초의 동그란 라면, 너구리가 개발된 것이다. 원형의 냄비에 쏙 들어가 바닥에 착 눕혀지는 모양이 누가 봐도 적격이다. 이제 라면을 쪼개지 않아도 되었고 통통하면서도 기다란 면을 온전한 모양 그대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으면서도 혁신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왜 20년간 아무도 라면의 불합리한 모양을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일까? 그럼 지금은 라면이 다 원형으로 바뀌었을까? 인간은 변화를 즐기는 동물이 아닌 것 같다. 2019년 현재 나무위키 기준으로 사각형 라면이 28종, 원형이 23종으로 여전히 사각이 우세하다.
* 나무위키 '라면' : https://namu.wiki/w/라면
* 나무위키에는 각 브랜드별로 원형인지 사각형인지 조사한 표가 있다. 압도적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없다.
우리는 네모난 라면의 세계에서 영영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인가.
물론 이미 습관이 되어 무조건 쪼개 넣고 끓여먹는 사각라면 선호자도 있을 것이고 라면 형태 따위엔 아예 관심이 없는 부류도 있을 것이다.(라면이 무슨 모양이냐고? 그게 왜 궁금한건데?...) 혁신은 그런 것 아닐까?
1. 우리는 우리 앞에 문제가 있더라도 그것을 문제로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보는 것이 아는 것'이라고 하지만 알지 못하면 보지 못한다. 제대로 까칠한 누군가가 지적하기 전까지는 눈에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이 글을 읽기 전까지 라면이 네모난지 원형인지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라면은 왜 사각형이어야 하나? 다른 모양이면 안될까?'라는 생각을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문제가 보이지 않으니 라면이 그랬어야 마땅한 모양으로 변하기까지 20년이나 걸렸던 것이다.
2. 제대로 된 해결책이 찾아진 뒤에도 기존 고착된 사용자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기는 매우 어렵다. 동그란 라면이 만들어진지 4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사각형 라면이 더 많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그만큼 변화는 힘들고 넘어야 할 습관의 벽은 생각보다 높다.
그래서 오늘 저녁은 짜짜로니.
2019.6.28. 윤성원 페북에 썼던 글을 고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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