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상을 그리는 디자인 - 윤성원 (서울디자인국제포럼 리뷰)

2022. 5. 14. 02:43디자인/디자인이야기

이미지 : 2021년 당시 서울디자인국제포럼 발표, 구유리 홍익대학교 교수

 

급속한 경제 성장을 경험해 온 한국은 현재 심각한 불평등과 내부 갈등에 직면해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위기는 낡은 틀을 깨고 사람 중심의 새로운 사회를 설계할 수 있는 기회이다. 디자인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고, 일상에서 좋은 디자인 사례를 장려함과 동시에 디자이너 스스로가 인간 중심의 미래를 만드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느새 새로운 백 년이 시작됐다

대한민국 건국 100년을 맞던 2019년, 좌우가 갈리며 난데없이 100년이 맞느니 안 맞느니 한바탕 논쟁이 벌어졌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새 100년의 첫해인 2020년은 전년의 소동이 무색하게 그럴듯한 이념도 비전도 제시되지 않고 지나갔다. 아니 그렇게 지나가나 보다 했다. 그때부터 코로나19가 세상을 대청소하듯 급격히 바꿔내고 있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니 정신 차리라고, 졸던 사람 뒤통수를 딱 때리듯 말이다. 그해는 내가 속한 한국디자인진흥원 창립 50년이기도 해서, 나 역시 정부가 추진해 온 디자인 정책의 50년을 정리하고 앞으로 50년의 청사진이 뭔가 다른 차원으로 만들어져야 하지 않냐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차에 코로나19를 기준점으로 사회 곳곳에서 혁신의 시도가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새 백 년의 청사진 선포 같은 것이 없었음에도, 결과적으로는 코로나를 기준으로 선명한 매듭이 생기며 새 세상에 대한 필요성이 환기된 셈이다. 지금껏 이렇게까지 전폭적으로, 변화의 전환점을 살고 있음을 체감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전환점에서는 누구나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 표지판을 본다. 그리고 내가 어디 있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해진다. 그래서인지 다양한 분야에서 정체성을 재정의하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많다. 서울시가 추진하고 있는 디자인국제포럼은 작년 ‘Re-Connect : 가치창조자로서의 디자인’이라는 주제를 선정했었다. 디자인이 앞으로 끊긴 세상을 다시 연결하는 연결자로서, 어떤 가치를 창조해야 할 것인가 묻는 말과 다름없다. 주제 자체가 디자인의 존재와 역할에의 고민을 의미하고 있다.


디자인은 지금 어디 와 있나?

디자인 관련 연구의 영역에서는 어떤 관심사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2022년 4월 기준, 2010년부터 2019년까지 KCI(한국학술지인용색인) 등재지 중 제목에 ‘디자인’이 포함된 논문 9,089건과 2020년부터 지금까지 제목에 ‘디자인’이 포함된 논문 2,277건의 키워드를 서로 비교해보았을 때 코로나 이후 새로 부각되는 단어는 ‘경험(experience)’, ‘사고(thinking)’, ‘학습(learning)’이었다. 코로나로 재편되고 있는 와중에 디자인과 관련되어 ‘경험’, ‘사고’, ‘학습’의 키워드가 주목받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것은 1) 비대면의 시대를 맞으며 디자인의 대상으로 보이는 사물 대신 보이지 않는 ‘경험’에도 관심을 갖게 된 것, 2) 디자인의 역할로서 구현 방법을 넘어 ‘사고방식’으로서의 디자인에 더 주목하게 된 것, 3) 학습의 도구로서의 디자인 역할 또는 디자인 자체의 학습에 대한 필요성에 주목하게 된 현실을 반영하는 것 아닐까? 문득 3월 31일의 디자인국제포럼 1차 포럼 ‘디자인동향과 정책방향’ 중 구유리 홍익대학교 교수의 발표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의 실마리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디자인씽킹이 무엇을 한다고?

구유리 교수의 발표는 ‘인간 중심 문제해결 방법으로서의 디자인씽킹이 어떻게 공공사회적 영역에서 강력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구유리 교수는 서울시 사회문제해결디자인 기본계획의 연구개발에도 참여한 바 있지만, 특히 국민디자인단의 자문 및 평가위원으로 디자인이 활용되지 않았던 척박한 공공 정책 영역에 디자인이 어떻게 스며드는지 여러 해를 경험해왔다. 워낙 디자인이 견뎌내기 어려운 곳에서 버텨 본 셈이니 이 질문을 화두로 삼을만하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국민디자인단은 2014년부터 지금까지 1천5백 개 이상의 과제, 1만5천 명 이상의 참여자가 참여해 서비스디자인 방법으로 정책을 디자인하는, 행정안전부와 디자인진흥원의 사업이다. 서비스디자인을 활용해 이처럼 장기간, 큰 규모로 국민들이 참여해 정책을 기획하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비교할만한 전례가 없다. 행정안전부의 상부가 디자인의 역할과 가능성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면 이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디자인을 벽화 그리기로만 여기던 소단위 지자체 공무원과 지역 주민이 공공정책을 디자인 방법으로 계획한다. 디자인이 정책을 계획하는 방법으로 활용된 것으로, 공공에서 시도된 적이 별로 없던 역할로 갑자기 등장한 사례다. 나 역시 그 과정을 함께 겪고도 과연 이 일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지 신기할 지경이다.

구유리 교수는 디자인씽킹을 사용자와 공감하기, 새로운 관점으로 복잡한 문제를 재정의하기, 아이디어와 해결 방법을 다양하게 시각화하고 실험하기, 다양한 참여자들과 함께 이 과정을 거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소개하며 디자인을 통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가능한 디자인의 역할에 대해 역설한다. 디자인은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모두가 선호하는 비전을 합의하고 비전을 실현할 방향으로 이끈다. 또한 전통적 관점의 혁신, 새로운 개념의 혁신을 비교한다. 새로운 개념의 혁신은 참여적 방법을 사용해 소수의 숙련된 전문가가 대신 다양한 참여자가 함께 정책을 만들어가는 방향으로 추진된다. 디자인은 특히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 사이의 대화를 촉진하는 매개체로서 역할을 하는 측면이 있어 새로운 혁신의 방법으로의 유용성을 갖는다고 말했다. 디자이너가 직접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협업적 디자인 방법을 통해 미래 시나리오를 제시하며 사회를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는 관점을 갖게 한다. 그밖에도 혁신의 방법으로써 디자인의 역할에 새롭게 주목해야 할 이유로 기존의 관념을 벗어나 현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통찰하고 미래를 위해 화두를 던지는 역할, 프로토타이핑 및 테스트를 통해 솔루션을 가시화하는 역할을 들었다. 이 주장에 대해 정확히 동의한다. 뭔가를 바꾸자면 그 대상이 일단 대상화되어야 한다. 가시화를 통해 비로소 대화의 대상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 공공부문에서 디자인의 확장된 역할로 디자인 방법을 통해 미래 전망을 제시하는 주목할만한 사례들이 소개되었다.


디자인으로 미래를 그리는 사람들

정책 입안 때부터 시민들의 니즈 발굴을 위해 인간 중심 디자인 방법을 활용하고 있는 영국 폴리시 랩(Policy lab)은 ‘고령화 인구의 미래’라는 연구에서 고령화가 갖는 영향력을 상상해볼 수 있도록 디자이너들과 시민들이 미래에 구현될 가능성이 있는 시각화된 시나리오를 보면서 함께 상상하고 의견을 공유했다. EU의 폴리시 랩에서는 블록체인을 주제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미래에 어떤 서비스가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 다양한 주제로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이것이 실현되는 미래를 상상해보는 프로젝트가 추진되었다. 기존에 제품을 디자인할 때나 사용하던 방법을 공공정책을 개발할 때도 사용하고 있다. EU 폴리시 랩은 ‘정부의 미래’라는 프로젝트도 실행했는데, 미래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다양한 시민들이 참여해 아이디어를 내고 게임을 통해 미래 비전 시나리오를 만들고 그것을 디자이너들이 시각화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했다. 작년 우리나라에서 추진되었던, 기술이 장애인과 노인의 미래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 시각화된 시나리오를 만드는 국립재활원의 프로젝트도 소개되었다. 이 사례들은 기후변화, 환경재난, 에너지 전환, 가상현실의 확장, 인공지능의 오용, 탈사회화 등 현재 우리가 처한 문제나 이슈도 디자인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논의를 촉발하며 기존 정책이 가진 한계에 도전해 인간 중심 해법으로 다시 설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모든 사례에서 디자이너들이 정책의 기획 과정을 주도하면서 다양한 이해관계를 갖는 참여자들을 소통하게 하고 협력하게 하기 위해서 방법을 고안하고 이것을 실험하는 데 큰 노력을 들이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경쟁으로 오늘을 이루었지만...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로 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고 2020년 세계 GDP 10위이자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일본에 이어 3위 국가가 되었다. 우리는 세계사에도 유례없는 흙수저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다. 여기에 이르는 데까지 걸린 약 1백 년간 효율과 생산성, 성장과 경쟁의 논리가 압도적으로 지배해왔다. 1962년부터 1997년까지 이어진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같이, 근대화를 명분으로 국가 주도로 일사불란하게 추진된 불균형 성장 전략이 그 시작점에 자리하고 있다. 불균형 성장 전략이란 우리가 잘해야 할 분야에 초점을 맞춘 뒤 국가의 온 역량을 집중하는 전략이다. 재벌 육성, 서울, 영남 등 특정 지역 집중 개발, 중공업, 중화학공업 등 제조업 중점 개발, 수출 중심 경제와 같이 특정 분야를 선택해 집중적으로 성장시킨다. 우리나라의 성장배경이 이렇기에 기성세대에게는 고르게 잘되는 것보다는 경쟁에서 이길 것만 살린다는, 이른바 무한 경쟁의 가치관이 기본 시스템에 내장된 셈이다. 불균형 성장 전략 같은 그간 우리의 선택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면과 가장 부끄러운 면을 동시에 가진 특별한 나라를 만들었다. 세계 불평등 연구소(World Inequality Lab)가 작년 말 발간한 ‘세계 불평등 보고서 2022’는 우리나라의 상위 10%가 전체 부의 58.5%를 차지하고 하위 50%는 5.6%만 가지고 있어 선진국 중 가장 불평등한 국가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심각한 불평등과 그로 인한 국민 갈등이 우리 사회가 가진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불평등'. 코로나를 맞아 앞으로 다시 어떤 방향을 보고 가야 할지 고민하며 숨 고르기를 하는 지금, 우리가 멈춰 선 곳에서 보게 된 표지판이다.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새롭게 그리자

우리의 빛나는 성취는 한편으로 진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우리가 경쟁에서의 성공만 바라고 그 모습에 현혹되어 살면 그것은 불평등과 갈등을 고착화하고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된다.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우리 현재의 모습이 최선인지, 잘못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보자. 모두가 권리를 더 평등하게 누리고 살 수 있는 인간다운 국가, 그런 세상에서 살자면 우리가 가진 공적인 자원, 정부 예산, 인력이 최적으로 구성된 것인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위기는 기회라 했다. 평상시엔 기득 세력이 자기 것을 포기하지 않기에 자원 재분배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는 기득권을 내려놓고 위기 극복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기에 혁신의 가능성이 생긴다. 코로나가 가져온 위기는 그간 바꿀 수 없는 전제라고 생각해왔던 프레임을 걷어내고 완전히 새로운 경기장을 설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지금까지의 우리나라가 너무 비인간적인 국가라 마음에 안 들었다면, 새로운 백 년을 맞아 철저하게 인간 중심으로 다시 국가를 디자인할 방법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바라는 미래상을 합의하고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인간 중심의 디자인 방법으로 설계할 때가 되었다. 다시 공공 교육 과정을 설계한다면, 행정서비스를 디자인한다면, 다시 산업단지를 설계한다면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 디자이너가 참여해 인간 중심으로 생활의 조건을 새롭게 설계할 수 있는 주제들은 너무도 많다. 디자인이 그 역할을 맡게 된다면, 제품에서 국가 시스템으로, 디자인은 사상 최대치의 대상 확장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우리나라는 역사를 통해 고착되어 온 관념, 체제, 제도, 조직문화, 소통방식, 서비스 등 다양한 기성의 산물을 창의적 디자인으로 대체하는 거대한 실험장이 될 것이다.


끊긴 관계는 그만큼의 가능성이다

디자인 역할과 가능성에 대해 강조하다 보면 디자인 외의 분야에서 ‘디자인이 뭔데’로 시작해서 디자인만 인간 중심 방법이냐, 다른 전문 분야도 결국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식의 지적이 따르기 마련이다. 사용자의 ‘경험’을 디자인하는 것이 디자인의 역할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세계의 동향에 대해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사용자 중심 디자인’, ‘인간 중심 디자인’은 디자인의 오랜 관용적 표현이다.

디자인 분야에서도 디자인의 역할에 관한 자성적 인식이 있다. 패널 토의 때 이건표 교수는 디자이너와 정책 수립자가 함께 어떤 새로운 시도를 해도 최종 수요자인 국민들의 인식 수준이 그에 미치지 못해 수용이 안 될 수 있음을 우려하였다. 디자인에 너무 많은 역할이 주어지는 면도 있다는 말도 나왔는데 이것은 디자인 효과에 대한 과도한 기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권한은 주어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토로라고 할 수 있다.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모든 것이 디자인’, ‘모든 사람이 디자이너’라는 식의 극단적 인식 확산으로 이어지며 많은 공공사업과 정책이 쏟아지는 상황도 디자이너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섣부른 시도는 실패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디자인을 둘러싼 우려가 많은 것이 당연하게 느껴질 만큼 공공부문에서 디자인은 많은 위험 요소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들어 다른 나라들의 사례를 보노라면 디자인에 대한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 경험, 사고, 학습이 코로나 이후 디자인 연구자들이 주목하는 키워드라고 한다면 그들 역시도 마음속에 그런 기대를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공공영역에서 디자인이 건강하게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인식과 국민의 인식 수준이 향상되는 과정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좋은 디자인의 사례가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이해와 공감대의 폭이 넓어지는 것도 필요하고, 제도와 규정을 통해 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구조적이고 명시적으로 디자인이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 이전에 무엇보다 디자이너 스스로가 새로운 미래를 그리는 주체가 되어야 함을 자각해야 한다.

코로나는 많은 관계를 끊었다. 다시 연결될 때는 이전과 같을 수 없고 같아서도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끊어진 관계는 그만큼의 기회일 수 있다. 관계가 복구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질서가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불균형, 불평등의 산업, 사회, 문화의 구조를 극복할 기회가 생길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앞으로의 사회를 인간 중심으로 재구축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인간 중심의 세상에서 디자인은 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는 그 미래를 위해 어떤 그림을 준비할 것인가.


글 : 윤성원 한국디자인진흥원 수석연구원. 2022. 4. 18. 

* 출처 : 서울국제디자인포럼 아카이브 중 '새로운 세상을 그리는 디자인'. 서울시.
        https://www.sdif.org/html/ko/view.php?no=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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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발표 : 구유리 (홍익대학교 서비스디자인학과 교수)
발표 요약글 : https://sdif.org/html/ko/view.php?no=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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