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디자인/서비스디자이너를 위한 안내서

1.1.2 밝은 전구보다는 즐겁게 하는 빛

SERVICE DESIGN 2023. 4. 3. 00:43

'제조산업에서 서비스산업으로 산업의 중심점이 변화되고 있으며, 서비스화를 통해 제품 라이프사이클 전 과정을 통제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있다. 하지만 현재 국내 서비스산업은 경쟁력이 낮은 상태로, 외국 기업들이 국내 시장을 빼앗아갈 우려가 있다. 이에 대비해 국내 디자인기업들은 서비스디자인에 주목하고 역량을 키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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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사용자 경험에 주목하는 필립스 조명. Hue는 스마트폰으로 조명을 제어해 집안 분위기를 조절한다.

* 사진 출처 : http://www.usa.philips.com/c-p/729935548/hue-lightstrips

전구 제조업을 예로 살펴보자면, 전통적으로 제품으로의 전구의 경쟁력은 ‘얼마나 밝은가, 얼마나 오래가는가, 얼마나 싸게 팔 수 있는가’였다. 우리나라 전구 제조업체들이 밝고 오래가는 전구 개발에 집중할 때 필립스는 20년 전부터 사람에게 빛이 어떤 경험(감각, 감성, 감정, 느낌, 심리, 기억 등)을 주는가를 연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연구를 바탕으로 다양한 환경에 최적화된 조명 제품으로 기존에 없던 시장을 만들어 가고 있다. 미세하게 조정된 빛의 자극이 뇌에 전달되어 정서적 안정, 기분 전환, 집중력, 에너지를 높여 주는 제품을 판매한다.(예 : 필립스 조명 HUE)
전통적 전구 제조사가 공급자의 관점에서 제품의 성능을 높이는데 관심을 쏟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빛에 대한 수요자의 욕구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양자 간에는 큰 관점의 차가 있다.

필립스는 서비스화(servitization)에도 관심을 기울여, 제품판매가 아닌 서비스로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 필립스라이팅(현 Signify)은 네덜란드 스키폴 공항의 조명기기를 모두 공짜로 설치했다. 공항에 설치된 전등은 필립스의 소유이고 모든 설치, 유지보수의 책임도 진다. 대신 얼마나 밝게 해 주느냐에 따른 비용을 받는다. 공항은 우리가 전기나 수도를 사용하고 사용료를 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빛을 사용한 비용을 내는 것이다. 필립스는 사물인터넷(IoT) 기술로 모든 조명을 인터넷에 연결해 실시간으로 사용량을 확인할 수 있다. 공항 측에서는 초기투자 없이도 고객들에게 효율성 높은 LED 조명으로 빛을 제공할 수 있고, 관리와 유지보수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고, 고효율 전등으로 절감된 전기 사용료를 낸다.

제조기업이 서비스업으로 기능을 확장하게 되면서 필립스로서도 유리한 점이 많아진다. 제조-유통-사용-폐기에 이르는 제품 라이프사이클 과정 전반을 통제할 수 있게 되니 제품을 통일할 수 있게 되고 재활용 수거 후 재처리가 쉬워지는 효과로 원가절감도 이룰 수 있다. 또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된다.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된다는 말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겠다. 제조업 기반으로 제품 판매로 이익을 내는 비즈니스 구조에서는 제조사는 압도적으로 좋은, 최고의 제품을 만들려 노력할 것 없이 경쟁사보다 조금만 더 잘하면 된다. 한 번 설치하면 교체할 필요가 없는 수명이 긴 전구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은 제조사의 입장에서는 재판매 기회를 없애고 시장을 없애는 나쁜 제품이다. 전구 판매가 아니라 빛을 서비스로 제공하고 유지보수 서비스를 하는 기업이라면 오래 말썽 없이 잘 사용할 수 있고 에너지를 적게 쓰고 유지비도 적게 드는 전구가 좋은 제품이다. 이것은 고객의 입장에서도, 환경적 측면에서도 좋은 일이다. 기업으로서도 제품 생산보다 서비스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전 세계의 제조산업에서 소비 성장세가 낮아지고 있다. 미국은 1987년에 이미 서비스업이 창출하는 부가가치가 제조업을 넘어섰고 현재 전체 GDP 80% 이상이 서비스업을 통해 나오고 있다. 선진국일수록 경제활동과 고용에서 서비스산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지는 ‘산업의 서비스화’(Servitization)*가 가속화되고 있다. 이미 세계는 제조보다 서비스를 통해 더 많은 부를 창출하고 있다.
* 산업의 서비스화(Servitization) : 제품과 서비스의 결합, 서비스의 상품화, 기존 서비스와 신서비스의 결합 현상을 포괄하는 개념. 결과적으로 산업에서 서비스의 비중이 높아가는 현상

서비스산업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걱정스럽게도 현재 서비스산업의 경쟁력은 매우 낮다. 서비스산업의 생산성은 조사된 24개 OECD국 중 최하위*이며 부가가치 비중은 일본 및 독일의 80년대 수준이다.
* 패러다임 변화와 지식서비스산업발전, 2010, 정보통신산업진흥원

보호무역 완화, 국제화에 의해 필연적으로 시장은 더 개방될 것이다. 그에 따라 선진국의 강한 서비스 기업들이 국내 시장에 속속 들어올 것인데 마치 양목장에 난입한 늑대처럼 경쟁력이 낮은 국내 서비스산업을 짓밟을 수 있다. 또한 서비스업은 본래 내수 비중이 큰 특징이 있다. 서비스산업의 국내 시장을 해외기업에 빼앗기게 된다면 우리에게 경제 강국의 미래는 없다. 전면적 개방의 시기가 닥치기 전에 서비스산업의 경쟁력을 높일 방안을 찾아야 한다.

제조산업에서 서비스산업으로 산업의 중심점이 변화되면서 가치생산에 영향력을 미치는 비중도 공급자에서 수요자 쪽으로 전환되고 있다. IT 기술, 미디어 혁명 등 각종 과학기술의 성과도 사회, 문화, 생활 전 영역에서 수요자의 힘을 강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공급자의 자원을 잘 활용해 많이, 빨리, 싸게 생산하기 위한 학문과 기술 대신, 수요자인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과 기술의 수요가 더 많아지게 될 것임을 예상해 볼 수 있다. 뇌 생리학, 심리학, 인지과학, 소비자학, 행동경제학, 디자인 등이 그것이다. 그중에도 디자인은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고 서비스의 전달체계를 인간 중심으로 혁신하는 효과적인 방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세계적 대기업들이 최근 ‘사용자경험디자인’(User Experience Design) 등의 내부조직을 확대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하나의 증거이다.

하지만 아직 국내 디자인산업의 서비스 제공자인 디자인기업들에 서비스를 인간 중심으로 개발하는 데 필요한 역량이 잘 갖추어져 있다고 보기 어렵다. 우리는 곧 나타날 서비스디자인 산업의 수요시장을 대비해 공급자(서비스디자이너, 서비스디자인을 하는 디자인기업)의 역량을 속히 키워야 할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대내외 환경변화의 이해를 통해 서비스디자인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알아보고 서비스디자인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설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앞으로 나타날 서비스디자인 시대에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출처 : 보이지 않는 서비스, 보이는 디자인, 윤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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