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7. 13. 00:32ㆍ디자인/디자인이 궁금해
조리기기를 만드는 작은 기업이었던 ‘자이글’은 2009년 한국디자인진흥원의 신기술디자인개발사업*을 통해 디자인전문기업인 ‘비타디자인’(대표 최정민)의 자문을 받게 된다.
* 신기술디자인개발사업과 같은 지원사업은 정부 자금 보조(디자인개발비의 50%를 정부 예산으로 지원)로 제조기업의 디자인개발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많은 단기 성과에도 불구, 수요기업이 디자인 투자를 정부에 의존하게끔 해서 장기적으로는 디자인산업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사업이라는 시각도 있다. 영국의 디자인카운슬의 경우 디자인개발비 지원 사업을 잠시 추진했다가, 적극적 맞춤형 디자인 수요 창출 사업인 ‘디자이닝 디멘드 designing demand’로 개편하였다. 자금지원사업이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디자인의 가치와 필요성을 인식 못함. 자금 지원 없이는 디자인에 투자하지 않음 등)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디자이닝 디멘드는 교육, 컨설팅으로 수요기업이 디자인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고 현재의 문제점을 진단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높은 전문성을 갖춘 디자인컨설턴트 풀을 운영하고 이에 소요되는 디자이너 자문비를 지원한다. 대신 디자인개발에 소요되는 예산은 수요기업이 전액 부담한다. 좋은 디자인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이다.
정부 지원금 5천만 원으로 제조사조차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사업이었다. 디자인컨설팅을 담당한 비타디자인은 고기 굽는 불판과 전기히터를 붙여 고기를 뒤집지 않고도 한 번에 굽는 조리기구를 만들자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최정민 대표는 당시 회의실에 켜져 있던 히터를 보고 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제조사는 본래 불판 제조기술에 대한 기술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다른 영역의 기술을 융합하는 것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는데, 디자인기업이 난방제품에나 쓰이던 원적외선 기능을 불판 위에 장착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결국 양방향에서 고기를 구우면서도 연기가 나지 않고 고기도 타지 않는 ‘자이글’이라는 독특한 조리기가 개발된다. 2008년 우수디자인상(한국디자인진흥원장 상)을 수상했고 2010년 매출 200억 원, 2015에는 1천억 원을 돌파했는데 특히 수출이 60%로, 일본에 진출해 일본 홈쇼핑 시장 주방가전 분야 판매 1위를 기록했다. 출시 8년간 250만 대에 이르는 판매량과 홈쇼핑에서 147회의 매진 기록 등 가정용 조리기구 분야에서 독보적 매출을 올린 대박 히트상품이 되었다.
고기 굽는 불판(조리기기)과 히터(난방기기)는 지금껏 서로 만난 적이 없던 이종 기술, 이종 산업이다. 디자이너가 조리 기구에 대해 이종 기술, 이종 산업을 연결해 보자고 제안한다면, 평생 불판 조리기만 연구해 온 기술자의 입장에서는 주제넘은 황당한 의견으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특정 분야의 전문가일수록, 전문성의 심도가 깊으면 깊을수록 오히려 눈가리개를 쓴 경주마처럼 전문성의 함정에 빠져 다른 산업과 기술과 융합으로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이나 고객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기회를 폭넓게 보지 못한다. 그래서 문제해결을 하는 독특한 방법과 관점을 갖춘 전문가가 조리기기이든, IT기기든, 병원이나 은행이든, 사회 각처의 문제를 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식서비스산업 중에도 ‘사업서비스업(비즈니스서비스업)’이라고 부르는 전문영역, 우리가 통상 컨설팅이라고 부르는, 경영컨설팅, 디자인, 회계 및 법률 컨설팅 등의 영역이다.
사업서비스업은 전 산업에 걸쳐 영향을 미치는 특징이 있어 인프라성 산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정부는 서비스업 중에서도 특히 사업서비스업의 육성과 발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인식이 있는데, 그럼에도 아직까지 실효성 있는 육성 정책이나 제도 등은 뒷받침되지 않고 있어 국제 경쟁에서 뒤처지는 취약한 상황인 점이 안타깝다.
디자인전문기업이 제공하는 디자인컨설팅 서비스의 수준이 높고 창의적이라면 개발된 제품과 서비스도 차원 높은 경쟁력을 갖추게 될 것이기에, 디자인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은 자국 기업들이 성과를 낼 수 있게 하기 위한 좋은 재료를 준비하는 것과 같이 중요하다.
상상과 창의성이 주도하는 미래 비전
1996년 필립스디자인센터는 ‘미래의 비전(Vision of the Future)’이라는 짧은 영상을 발표했다. 10년 후(2005) 미래 사회의 모습을 전망하여 어떤 생활양식이 나타날 수 있을지 제품/서비스의 콘셉트를 예상해 보여주는 것이었다. 1993년부터 1996년까지 3년에 걸쳐 진행된 연구결과로 발표된 ‘미래의 비전’은 선행디자인’* 프로젝트로서 당시 디자인계는 물론 연구자, 제조사, 일반인들에게는 많은 영감을 주었다.
* ‘선행디자인’이란? : ‘일반적으로 선행디자인은 디자인 중심의 경영전략을 의미하기도 하며, 좁은 범위로는 한 기업에서 상품개발을 진행할 때 디자인을 먼저 하여 디자이너의 의도가 제품에 충분히 나타날 수 있도록 하는 프로세스 및 비즈니스 모델을 의미함.
영상 : 미래의 비전. 필립스디자인센터 (1996) https://www.youtube.com/watch?v=u3l139Txuk4
디자이너뿐 아니라 문화 인류학자, 인간공학자, 사회학자, 엔지니어 등 다양한 전문가들이 모여 300여 개 이상의 창의적 시나리오를 개발하고 이를 토대로 60여 개의 핵심 개념을 담아 개인, 가정, 공공, 이동의 4가지 영역으로 제시하였다. 발표 후 10년 시점에 확인해 보니 제시되었던 기술 중 80% 이상이 상용화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필립스의 디자이너들이 기가 막히게 예측을 잘했다기보다는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이 시각화된 강렬한 비전을 통해 영감을 얻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공상과학 소설가 ‘아서 클라크(Arthur C. Clark)’의 상상력은 대체로 과학기술을 20년 이상 앞서갔다. NASA의 과학자들도 그의 1997년 소설 ‘3001년 최후의 오디세이’의 우주 엘리베이터 건설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나노튜브를 이용한 우주 엘리베이터 건설 가능성을 연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래의 비전’은 기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바뀐 세상에서 디자인이 주도권을 가질 가능성을 제시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디자인이 외형상 매력도를 높이는 치장의 역할이 아니라 상상력과 창의성으로 미래를 제시하고 수요자에게 잠재된 욕구를 찾는 방법으로 사용된 것이기 때문이다. 창의력이 뛰어난 누군가가 미래를 상상하여 구체화하면 그것을 보고 영감을 얻은 과학자, 기술자들은 그 상상력을 실현하기 위한 연구를 시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 중심의 연구개발의 모습일 것이다.
위 사례들을 볼 때 인간 중심으로 변화될 때 디자인 역할이 강화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기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변화되면 이전보다 연결과 융합의 이슈가 더 중요하게 부각되게 된다.
신산업의 비전을 그리는 디자인
2008년 삼성물산 건설부문은 영국의 디자인기업 ‘시모어 파웰’*과 함께 미래 주거생활의 미래 비전을 구상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 시모어 파웰 : 영국의 대표적 제품디자인전문기업. 약 100명의 직원 중 미래 비전을 구상하는 인력이 50명에 육박한다.
아래 이미지는 그 개발 결과인 영상의 일부이다. 항공산업은 역사 이래 여행자를 원하는 지점까지 빨리 이동하게 함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이것은 지금까지 실현된 적 없던 다른 무언가를 꿈꾸게 한다. 하늘에 떠서 생활하는 주거모델이다. 이 영상은 여러 나라의 상공을 떠다니며 여행하는 주거공간으로서 저속으로 비행하는 비행선, ‘에어 크루즈’의 콘셉트를 제시하여 항공산업과 건설업의 융합된 미래를 그리고 있다. 디자인이 산업 융합의 매개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사례이기도 하다.
비행선이 건강검진센터나 요양원이라고 가정해 보자. 이것은 항공산업과 헬스케어산업의 융합 모델로서 무궁무진한 새로운 제품, 서비스, 비즈니스 모델, 신산업을 만드는 콘셉트가 될 수 있다.
중동의 부호들이 한강에서 출발하는 에어크루즈에 모여 신체 재건을 목적으로 하는 휴가를 떠나는 것을 상상해 보라. 크루즈와 같은 비행선 내에서 장기 투숙객에게 건강관리, 심리적 치유와 건강 검진, 유기농 식단 운영 등으로 건강을 되찾아주는 웰니스 헬스케어 센터, 이것은 세계 각지를 유영하면서 주요 도시에 정박해 여행과 특별한 문화 체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여기서 디자인은 인간의 잠재된 욕구로부터 새로운 사업기회를 발견함으로써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개념의 산업 생태계의 콘셉트를 제시하고 구체적인 서비스 모델을 창조하는 역할을 한다.
<항공 + 헬스케어산업 융합로 창출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예시)>
- 고품위 의료관광 컨설팅 서비스
- 웰니스에 관심이 많은 장기 비행 투숙객을 위한 숙박서비스
- 지상-항공 간 원격 진료 서비스
- 의료 검진 장비 렌털 서비스
- 제한된 공간 내 라이프로그 분석을 통한 개인 맞춤형 건강관리 서비스
- 웰니스 식단 컨설팅 서비스
- 비행선내에서 이루어지는 컨벤션사업 및 관련 서비스
- 비행선내에서 이루어지는 엔터테인먼트사업 및 관련 서비스 등
이렇게 관련이 없던 산업과 산업이 만나면 많은 놀라운 새로운 시장 기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런데 항공산업과 헬스케어 산업을 융합하는 구상은 과연 누가 할까? 항공산업의 CEO일까 아니면 헬스케어산업의 CEO일까?
실제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경영진은 주가를 올릴 단기 경영성과에 집착하기 마련이라 당장 성과 없을 타산업과의 융합 구상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이야말로 국가 R&D가 맡아야 할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대한민국이 세계를 이끌고 나갈 새로운 산업융합의 비전을 그려야 한다. 인류가 문명을 통해 아직 경험하지 못했던 잠재된 욕구를 찾고, ‘항공산업 X 헬스케어산업’, ‘선박산업 X 건설산업’, ‘자동차산업 X 숙박산업’ 등 이종 산업을 서로 엮어 생겨날 수 있는 새로운 산업을 다양하게 구상하고, 이중 향후 세계 선두가 될 수 있는 산업 분야를 설정해 선점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기술 중심이 ‘Seed Base’라고 한다면 인간 중심은 ‘Needs Base’라고 할 수 있다. 기술 중심으로 무언가를 구상할 때는 기본적으로 이미 보유하고 있는 기술을 토대로 하므로 씨앗(Seed)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면 보유하고 있는 기술보다는 인간의 욕구가 무엇이고 어떻게 실현할까에 집중해야 하는데, 인간의 욕구를 탐구해 보면 대게는 특정 전문분야의 기술, 제품 또는 특정 산업만으로는 충족되기 불가능하기 마련이다. 필연적으로 타 분야와의 연결이 필요해지게 되어 융합이라는 이슈가 크게 부각된다.
<코닝이 제안하는 미래 비전>
A Day Made of Glass 1. 2011. https://www.youtube.com/watch?v=6Cf7IL_eZ38
A Day Made of Glass 2. 2012 http://www.youtube.com/watch?v=jZkHpNnXLB0
위 그림은 대형 디스플레이를 통해 중국에 있는 뇌질환이 의심되는 환자를 미국에서 실시간으로 협동 진료하는 장면을 그려낸 코닝사(강화유리제조사. 아이폰의 강화유리인 고릴라를 제조한 기업이다.)의 비래 비전 영상의 한 장면이다. 이것은 헬스케어 산업, 미디어/영상 산업, 정보통신산업, 통신기술, HCI, 증강현실기술, 4D 영상기술, 의료정보 표준화, U헬스 표준 플랫폼, UX, 디자인 리서치기술 등 수많은 산업과 기술이 연관되어야 실현 가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비전이 우리의 욕구에 부합하는 매력적이고도 타당한 것일수록 사람들은 그것을 실현할 방법을 찾게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기술, 산업 융합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인간 중심, 인간의 욕구를 중심에 두는 접근은 자연스럽게 서로 다른 영역의 융합을 가져온다.
그렇다면 누가 이종 기술과 산업 융합을 촉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누가 매력적인 미래를 그리는 역할을 잘할 수 있을까?
산업의 연결자 디자인
기술적 목표가 아니라 인간 삶의 고양이라는 차원에서 달성해야 할 목표를 그리게 된다면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기술의 융합, 산업의 융합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의 욕구 기반으로 설정된 목표는 분화된 개별 기술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융합적 기술/제품/서비스로만 실현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가진 기술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찾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인간의 욕구를 중심으로 연구개발의 비전과 목표를 그려놓고 나서, 그에 따라 필요한 서비스, 제품, 기술이 무엇일까를 탐구해 가는 것이 합리적이다. 인간 욕구 중심의 비전 설정은 ‘융합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인간 중심, 시장 중심, 비전 중심의 혁신을 실현할 방법이다. 산업융합의 미래 전망이 기존 디자인산업에 주는 과제와 시사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디자인산업의 공급자와 전달체계가 더 적은 자원으로도 더 큰 효과를 미칠 수 있도록 산업이 전반적으로 더 고도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디자인을 활용하여 가격 및 기술의 경쟁력 외에 고부가가치를 갖는 제품 및 신서비스 창출을 통해 산업 구조가 고도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 디자인산업은 관광, 레저, 엔터테인먼트 등 타 서비스산업과 이종 서비스산업을 융합하고 서비스산업과 제조산업을 융합해 새로운 형태의 융합산업을 창조하게 될 것이며 그때 선도자로서 기회가 올 것이라는 점이다.
기존에 서로 관계될 일이 없었던 A산업과 B산업이 서로 만나 새로운 비즈니스 생태계가 형성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잠재 수요를 파악하는 예민함과 함께 다소 엉뚱한 창의성이 필요하다. 융합을 통한 신시장 창출을 위해서는 기존의 산업 안에서 요구되었던 경쟁력과는 다른 역량이 필요하다. 현재 잠재되어 있는 욕구를 발견하는 예리한 관찰력과 낯선 대상을 두려움 없이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연결하는 연결자가 필요해진다. 이 연결자는 위험회피의 성향과는 거리가 멀어야 한다. 주어진 조건을 개선하기보다는 없던 새로운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자여야 한다.
디자인은 융합의 촉매로 서로 관련이 낮았던 개념과 사물을 서로 연결하고, 서로 만나지 못했던 기술과 기술, 제품과 제품, 서비스와 서비스를 서로 연결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공학, 과학뿐 아니라 인문, 예술을 연결하는 연결점에서 디자인이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은 산업통상자원부와 4차 산업혁명 기술의 발달이 디자인의 역할과 수요를 높임에 따라 2019년부터 빅데이터, AI 등 4차 산업기술과 패션섬유 산업을 융합한 ‘스타일테크’ 분야를 규정하고 이와 관련된 기업을 육성하고 사업의 성공사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출처 : 디자인이 궁금해, 2022, 윤성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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