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7. 13. 00:27ㆍ디자인/디자인이 궁금해
문제정의가 잘못되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1950년대 덴마크의 작은 지자체 공공 수영장 이용객의 수가 갑자기 줄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공무원들이 수영장 시설을 방문했다. 수영장을 둘러본 공무원들은 건물 시설이 낙후된 것이 사람들이 찾지 않게 된 이유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건축가를 고용해 이 건물을 고쳐 쓸 수 있는지 아니면 새로운 건물을 지어야 할지를 판단과 함께 새 건물의 디자인을 주문했다. 두어 달 뒤 새 건축물의 건축 계획안을 기다리는 공무원들과의 미팅에서 건축가는 전혀 다른 해답을 제시했다.
"수영장이 낡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조사해보니 문제는 건물이 아니라 버스 시간표였습니다. 작년에 30분씩 옮겨진 버스 운행 시간으로 인해 사람들이 출근 시간에 수영장을 이용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방문객이 줄어든 것입니다.”
시트라 SITRA 전략디자인부서장. 마르코 스테인베리 (Marco Steinberg)
* ‘시트라(Sitra)’ : 핀란드의 대표적 싱크탱크. 1967년 중앙은행이 출연해 만들어진 연구소로 복지국가의 개혁, 재생에너지와 환경 기술, 지속가능한 경제 등 국가 아젠다를 주도하는 기관이다. 중앙은행의 거액의 기금으로 지속가능하게 운영되고 있어 정부교체나 정권 성격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장기적이고 일관성 있는 미래 연구를 추진한다.
이 가상의 이야기에는 배울 점이 있다. 건축물을 고쳐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던 공무원들은 이 문제를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보지 못했다. 건축가가 사용자 조사를 통해 문제의 진짜 원인을 찾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고, 주어진 과제인 건물 고치기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재건축에 많은 예산과 시간을 쓰고도 수영장 이용자는 늘지 않았을 것이다. 초기 기획 단계에 디자인 방법으로 수요자의 욕구를 고려해 정책을 구상하는 것은 수요자 중심의 정책을 위한 적절한 방법이고 비용 효율적인 방법이다.
* 그림 출처 : Steinberg, Marco, the Finnish Innovation Fund Sitra
위 그림은 디자인이 프로세스의 초반부에서 역할을 할수록 더 다양한 가능성, 큰 기회를 얻게 된다는 점을 표현한 것이다. 문제정의와 같이 가능한 초기 단계인 단계에 디자인이 개입할수록 큰 성과를 낼 수 있다.
정책의 설계자들은 정책이 실패했을 때 그 원인을 ‘수요자의 요구를 잘못 파악했거나 문제정의를 잘못한 것이 아닐까’와 같이 정책 과정의 전반부에 착오가 있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고, ‘홍보 부족’과 같이 정책 과정의 후반부에서 생기는 문제로 보는 경향이 있다. 앞서 소개했던 여성 비키니 전용 해수욕장의 경우에도 관계자는 ‘홍보 부족에서 온 실패’로 규정했다.
정책 공급자들이 문제를 정의하는 데도 여전히 공급자의 관점으로 생각하는 습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기존의 정책 과정에서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 방법을 결정하는 초반부보다 정책을 실행하고 알리는 후반부에 자원을 집중해서 사용하는 경향이 굳어진 상황이다. 대규모 홍보를 통해 수요자의 인식을 조정하고 받아들 수 있도록 강제하는 공급자적 관점을 취해 오고 있다. 시간표가 문제라는 점을 알지 못한 상태로 수영장을 재건축한 후에도 사람들이 여전히 안 오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새롭게 개장했다는 내용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것과 같다.
계획 초반에 사람들의 요구를 잘 찾고, 행동 방식과 사고방식에 유념해 설계가 잘 되면 잘 될수록 실행 이후에 사람들에게 더욱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됨으로써 정책 집행 단계에서 사용되는 비용과 홍보비용을 큰 폭으로 절감할 수 있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전체 예산을 절감하는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국민디자인단이나 서울시 공공서비스디자인 워크숍 등의 활동은 정책을 기획하는 단계에 디자인을 활용해서 수요자의 욕구를 반영한 정책개발을 하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민간에서 ‘선행디자인’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선행디자인이란 제품을 개발할 때 먼저 사용자가 원하는 것을 알아내고 그에 맞는 디자인을 해서 사용자의 의도가 반영된 제품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과거에는 회사가 가진 기술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바탕으로 제품을 개발하고, 일을 돌이킬 수 없이 되었을 때 속칭 껍데기를 씌우는 일을 디자인이 맡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애플,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세계 선두 기업들이 선행디자인을 하고 있다. 모든 것을 사용자로부터 시작한다. 개발 과정의 앞부분에서 디자인은 사용자들의 욕구를 찾고 그것을 바탕으로 제품과 서비스를 설계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왜, 무엇을 만들어야 할까’를 결정하는 일, 즉 문제를 정의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정책의 초반부에 디자인을 도입한다는 말은 정책을 수요자 중심으로 개발하는 ‘정책의 선행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를 정의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디자인
디자인은 앞으로 문제해결을 하는 역할보다는 문제설정을 하는 역할이 더욱 강조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까지 시험 문제를 푸는 데에 집중해 왔으나 이제 출제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문제 해결자로서 디자인이 가져야 할 필요 역량과 문제를 설정하는 디자인이 가져야 할 역량은 크게 다르다.
시험 문제를 잘 풀기 위해서는 필요한 공식과 풀이 방법을 잘 알고 충분히 연습하면 되지만, 좋은 문제 출제자가 되려면 문제해결 방법에 대해 연습이 많이 되어 있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왜,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근본 원리를 알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문제설정의 역할자로서의 디자이너가 되자면 그 준비가 시급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를 잘못 설정해서 생기는 결과는 사냥할 때 엉뚱한 목표에 겨누고 활을 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니 총을 쓸지 활을 쓸지 선택에 따른 결과, 즉 문제해결 방법을 잘못 선택하는 경우와 비교할 때 훨씬 큰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앞으로 역할이 커지는 만큼 디자이너는 더 큰 사회적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디자인이 문제설정의 역할을 하게 될 때 강조될 책임은 무엇일까?
첫째, 디자이너는 철저하게 수요자의 관점에서 문제정의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공급자 중심으로 설계된 세상을 다시 수요자 중심으로 전환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디자이너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디자이너는 사람의 심리와 행동양식을 이해하기 위해 더 큰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이제껏 공공정책이 추구하는 목표와도 유사하다. 디자인이 추구하는 목표가 공공정책이 추구하는 목표와 유사해졌다는 점은 흥미 있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공공서비스의 혁신 방법으로서 디자인의 활용 가능성과 필요성은 앞으로 더 커질 것이다.
수요자의 처지에서 문제 정의하기
앞으로 변화될 디자인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사례를 소개한다.
어린아이가 처음 MRI 장비(자기공명영상 장비) 앞에 서면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GE에서 24년간 일해 온 선임 디자이너 더그 디츠(Doug Doetz)는 우연한 기회에 자기가 2년간 공들여 개발한 MRI 스캐너가 설치된 병원에서 MRI 검사를 받기 위해 들어오던 소녀가 무서워서 우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날에서야 80%의 어린아이들이 MRI 검사를 받기 위해 진정제를 투약해야 한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아이들은 기계에 겁을 먹고 가만히 누워 있지 못했다. 자기에게는 더없이 훌륭하게 보이는 기계가, 아이에게는 단지 무서운 괴물 같은 존재라는 사실에 좌절감을 느낀 그는 어린 환자들도 겁내지 않을 MRI를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방법을 알아보던 중 상사가 자신이 경험해봤던 ‘스탠퍼드 D스쿨’*의 임원 연수 프로그램을 추천했고, 더그 디츠는 일주일간의 디자인싱킹 교육에 참여하게 된다.
* 스탠퍼드대 부설 디자인스쿨. 창의성, 시각화 등 디자이너처럼 생각하는 방법(디자인씽킹)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2005년 설립. 공식 명칭은 ‘Hasso Plattner Institute of Design at Stanford’이다.
스탠퍼드의 워크숍은 인간 중심적 접근법으로 소비자의 요구를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신제품과 서비스를 구상하는 방법에 관한, 디자인씽킹 교육이었다. 교육에 참여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특별한 재원 없이도 사용자의 경험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집중한다.
교육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일일 보육 센터에서 아이들을 관찰하는 등 고객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 자원봉사자, 지역 어린이 박물관의 전문가, 다른 병원의 의료진 등의 도움을 받은 끝에 첫 번째의 시제품을 만들어냈고 이것은 나중에 ‘모험 시리즈’로 발전하게 된다.
그것은 MRI 검사실을 어린이를 위한 모험 공간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피츠버그대학 메디컬센터 소아병원에 시범적으로 설치하게 된다. MRI 촬영 기사들을 아동 전문가와 디즈니랜드의 캐스터들에게 교육을 받도록 조치하여 아동을 위한 박물관이나 테마파크 직원들처럼 만들었다. 기술적 부분에는 변형을 주지 않고도 환경을 새롭게 디자인하고, MRI 촬영 기사용 시나리오를 만들어 어린 환자들이 모험의 여정을 떠날 수 있도록 했다. 아이들은 MRI 검진실에 들어오면서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다. 촬영기사는 아이들은 해적선 내부로 모험을 떠날 거라고 말해주고 배에 타 있는 동안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있어야 한다고 당부한다.
"좋아, 이제 너는 해적의 배에 오르게 된 거란다. 배에 오르게 되면 해적이 너를 찾지 못하게 가만히 있어야 한단다."
숨죽이고 숨어 있는 동안 나쁜 해적은 사라지고 그 ‘항해’가 다 끝나면 아이들은 검사실 벽에 있는 해적의 가슴에서 작은 보물(사탕)을 하나 꺼내 가질 수 있게 된다.
MRI 기계가 원통형 우주선이 되는 시제품도 있었다. 이 이야기 안에서 MRI 기계가 내는 쿵쿵거리는 소음은 ‘초공간 항속 모드’로 바뀌는 중에 우주선이 내는 소리가 된다. 이렇게 지금은 아홉 가지의 모험 시리즈가 개발되어 있다. 새로운 어린이용 MRI 기계 덕분에 소아 환자에 대한 마취제 투여를 80%에서 10% 정도로 크게 줄일 수 있었고 환자들의 만족도도 90% 상승했다. 병원에서는 진정제 투입을 위해 마취 의사를 쓸 필요가 줄었고 하루에 더 많은 수의 아이들을 검사할 수 있게 되었다.
더그 디츠가 큰 성취감을 느꼈던 것은 그러한 물질적 성과가 아니라 다음 장면에서였다. 여섯 살 꼬마가 변화된 MRI 검사실을 나오며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엄마, 나 내일 여기 또 오면 안 돼요?”
새로운 디자인의 역할
이 사례는 의미심장한 시사점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사용자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사용자를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더그 디츠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업(GE)에서 평생 경험을 쌓은 디자이너였음에도 고객의 경험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와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현장에서 어린이 고객이 제품과 만나는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다면 그는 자기가 만드는 제품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제공자는 사용자를 모른다고 가정하고 ‘실제적인 사용자’의 ‘구체적인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실제적인 사용자’라는 것은 막연한 사용자가 아니라 ‘이제 막 여덟 살이 된 이선영’과 같이 구체적인 누군가를 말한다. 콕 집어 그의 욕구를 이해해야 한다. 그 사용자의 ‘구체적인 경험’ - 느낌, 감정, 위화감, 불편함 등 - 을 세부적으로 공감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객에 대한 애정, 관심, 배려심, 공감력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이들을 만나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두 번째로, 사용자에게 적합한 디자인이 ‘굿디자인’이라는 점이다. GE의 MRI 장비는 좋은 디자인으로 평가받아 이미 많은 디자인 대회에서 ‘좋은 디자인’ 상을 받았던 제품들이다. 일반적으로는 제품디자인이 사용자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믿음을 줄 수 있다면 좋은 것이지만 아동이 이용하는 MRI 장비라면 매끈하고 신뢰감을 주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목적에 부합하는 적절한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다.
세 번째로, 좋은 제품이 아니라 좋은 사용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더그 디츠가 병원에서 고객을 만나기 전까지 그의 목표는 좋은 제품을 디자인하는 것이었지만, 어린이 고객을 만난 후 그의 목표는 무섭지 않은 검진 경험을 만드는 것이 되었다. 결과물만 본다면 단지 제품과 환경디자인이 개선된 것아닌가라고 할 수 있지만 실은 사용자의 새로운 서비스 경험을 디자인한 것이다.
아이들이 느끼는 공포심을 흥미진진한 경험으로 바꾸기 위해서 단지 환경뿐 아니라 MRI 촬영기사를 디즈니랜드에 보내서 캐스트(cast) 디즈니랜드 내에서 아이들을 신나게 하는 역할을 하는 직원 교육을 받게 하는 식으로 조직과 시스템을 바꾸고 제공자의 역량을 변경해야 했다. 제품과 환경디자인은 그 목적 실현을 위해 변화가 필요했던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 MRI 검진실은 디자인의 새로운 역할을 상징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디자인이 추구하는 혁신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을 중심에 둔다는 점, 공급자가 아닌 사용자 중심의 관점을 갖는다는 것이 일관된 특징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성, 효율성보다는 인간의 감성적, 심리적, 행동의 변화를 목표로 해야 한다.
초기 단계부터 개입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문제를 정의하고 통합적 해결방안을 구상한다는 점도 특징이다. 특히 거대한 변화 대신, 사소한 변화라도 즉시 시작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좋은 디자이너는 민감성과 공감력을 바탕으로 사용자의 관점으로 경험의 세계를 다시 살필 수 있다는 점, 상상력과 창조력, 시각화 능력으로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역량이 있다. 앞으로 디자이너에게는 새로운 우리의 미래를 구상하고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의 변화를 유발할 수 있게 하는 기회가 더 주어지게 될 것이다. 그 정점에 새로운 서비스를 디자인하는 역할이 있다.
* 출처 : 지식경제부 전략기획단, 2011, 김광순
출처 : 디자인이 궁금해, 2022, 윤성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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