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디자인이야기

공공서비스의 기본값을 다시 디자인하자

SERVICE DESIGN 2023. 11. 1. 00:03

영문을 알 수 없는 청구서를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지 않나? 알고 보니 언제인가 신청했던 무료 서비스가 유료로 전환된 것임을 깨달았던 적이 있다면, 당신은 '암묵적 동의'라는 악의적 선택 설계의 쓴맛을 경험한 것이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선택 설계는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조정하고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 


선택 설계의 힘은 국민의 의식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프 : 국가별 장기기증 의사가 있는 운전자 비율 (%), Dan Ariely. 2008. TED강연 '우리는 결정을 내릴 때 우리 마음대로 하고 있는걸까요?' 중 발췌


이 그래프*는 국민들한테 장기 기증 의사를 물어본 결과다. 덴마크는 4%, 영국은 17%로 아주 낮은 반면 오스트리아, 프랑스 같은 나라들은 100%다. 장기기증 의사를 표명하는 시점은 면허시험을 볼 때다. 작성 서식에 장기기증 희망 여부를 묻는 항목이 있다. 체크해야 기증하기로 되는 곳은 기증 의사가 낮은 나라가 되었고, 기본값이 기증으로 되어 있는 곳은 장기기증을 원하는 국민이 많은 나라가 되었다. 기본값을 무엇으로 설정했는가로 결과가 갈린 셈이다. 국민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도, 세우기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지만 깨트려 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콜럼버스의 달걀'의 과제과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그만큼 기본값을 결정하는 ‘선택 설계자’의 역할은 간과할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선택 설계자’(Choice Architect)의 개념은 리처드 탈러의 ‘넛지’*라는 책으로 알려졌다. 설계는 곧 디자인이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디자인을 설계(She Ji: 設計)라고 한다. 사용자의 선택을 설계하는 공무원은 정책의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다. 
* Richard H. Thaler와 Cass R. Sunstein. <넛지 Nudge: Improving Decisions About Health, Wealth, and Happiness>, 2008. 이 책에서 선택설계자의 개념이 소개되었다. 행동경제학의 관점을 통해 사람들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설계자가 어떻게 환경을 구성해야 하는지를 다룬다.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해결되지 않는
문제 


공공부문에서 설계가 잘못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사례가 있다. 지금은 조지부시 공항으로 이름이 바뀐 휴스턴 공항은 수화물이 늦게 나온다는 민원이 많았다. 내리는 지점에서 수화물 찾는 곳까지 거리가 1분이 안 걸릴 만큼 짧았는데 그러다 보니 짐을 오래 기다리는 상황이 연출되며 불만을 토로하게 된 것이다. 공항 측이 고안한 해결책은 승객들을 더 먼 곳에 내려주는 것이었다. 동선을 수정해 기존 대비 6배를 더 걷게 바꿨다. 한참을 걸어가면 짐이 나와 있다. 
“어? 벌써 짐이 나와 있네? 이곳은 짐 찾는 게 참 빠르군!”
민원은 사라졌고, 승객들의 운동량은 증가했다. '공항이 더 걷게끔 잘못 설계되어 있으니 고쳐라!'라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동선을 어떻게 바꿔야 더 효율적인지 아는, 큰 그림을 보는 고객은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로 더 나은 세상이 된 것은 아니다. 걷기 불편한 취약층에는 더 나쁜 상황이 되었다. 사용자의 수고와 시간을 절약하는 장점이었던 짧은 이동 거리는 민원을 없애는 대가로 희생되었다. 장점을 유지하면서도 더 좋은 '사용자 경험'을 디자인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오래 걷게 동선을 바꾸는 대신 대기 구역에 비행기별 수화물이 언제 나올지 예상 시간을 표시하고 의자, 작은 도서관, 무료 Wi-Fi 등 시간을 유익하게 보낼 환경과 서비스를 제공했다면 고객은 즐겁게 대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고 수화물 찾기는 좋은 경험으로 기억될 수 있었을 것이다.


디자인을 정책에 적용하기 위해 시도하고 있는 사례


민간 서비스산업에서는 고객 관찰을 바탕으로 잠재적 욕구를 발견하고 수요자 중심으로 서비스를 개발하는 ‘서비스디자인’*이 주목받고 있다. 선진국에서 디자인은 공공부문의 정책 및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활용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정책에 서비스디자인을 도입한다는 것은 정책을 수요자 중심의 디자인 방법으로 개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 서비스디자인은 사람들의 행동 변화를 유발하는 심리적 스위치를 켜는 역할을 하는 인간 중심의 서비스 개발 방법론이다. 특히 수요자 중심의 정책 실현 방법으로 매우 실용적이고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일본 정부(경제산업성)는 2018년 디자인경영을 선포하고 정책과 서비스디자인을 접목할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관련 글 보기) 디자인에 대한 관심은 젊은 공무원들 사이에도 퍼져, 디자인 방법으로 수요자 중심 정책을 실현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경제산업성 웹사이트의 정책디자인이라는 메뉴에는 재팬+D(JAPAN+D)의 역할과 활동이 소개되어 있다. 재팬+D는 경산성 내의 젊은 공무원들, 특히 디자이너를 중심으로 정책 디자인의 전문성을 갖추려 노력하고 있는 조직이다. 디자인을 통해 새로운 정책 입안 프로세스를 구축하고 다른 부처로까지 확대하는 것을 비전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 행정안전부도 정책 기획에 디자인 방법을 사용하는 시도를 해왔다. 국민디자인단은 정책 수요자인 국민, 서비스디자이너와 공급자인 공무원이 함께 정책 과정에 서비스디자인을 적용해 공공서비스를 개발하는 국민 참여형 정책 기획 모델이다. 2014년부터 약 1,800건의 과제가 시행되었고 총참여자는 무려 18,000명이 넘는다. 이 사업은 '국민정책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현재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정책에 디자인을 도입하고자 하는 노력이 이처럼 광범위하게 장기간 이루어지고 있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선택 설계의 다양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에너지복지 제도 개선에 대한 주제를 다루었던 국민디자인단*은 일주일간 전기제품과 온수를 사용하지 않는 등 복지 사각지대의 사람들과 공감하기 위한 노력을 하며 수요자와 공급자 간의 간극을 줄이는 정책 구상 활동을 했다. 공무원들은 그 과정에서 에너지 복지 대상자가 겪고 있는 문제와 복지 사각지대 개선 필요성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고, 그 결과 수요자가 직접 일일이 신청하지 않아도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를 신청하면 자동으로 다른 관련된 복지 혜택이 자동으로 선택되는 식으로 개선안이 구상되었고 산업부와 관련기관이 협력, 시스템 통합과 제도 개선을 통해 이를 실현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선택 설계자로서 공무원의 역할이 중요하고 사용자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 국민디자인단 과제 '에너지 복지 요금을 통한 복지 사각지대 해소', 산업통상자원부, 지역난방공사, 2015.


우리의 공공서비스는 왜 다시 디자인되어야 하는가?


앞서 살펴본 장기기증과 공항의 디자인 사례는 공공부문 서비스 설계가 가진 근본적인 결함을 드러낸다. 대부분의 국민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기 어렵고 제공된 선택지 내에서만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나마 문제를 느낄 수 있는 취약한 처지의 일부 국민들은 개선해 달라고 주장하는 대신 부족한 자신의 탓이니 감당해야 한다고 받아들인다.
'공공환경이, 교육제도가, 조세제도가, 노동정책이 잘못되었다. 국가 시스템이 애당초 근본부터 잘못 설계되어 있으니 고쳐달라'라고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드물다. 사소한 불편만을 지적할 뿐이다. 보도블록이 파손돼서 위험하니 보수해 달라는 민원은 있지만 그 길은 보도가 아닌 녹지 공원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없다. 짐을 더 빨리 달라고는 요구하지만 공항 설계의 문제점을 지적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사정이 그러하니 공공 정책의 선택 설계자는 혹시라도 불편함에 처해있는 국민이 있는지 두루 살피고, 잠재된 불편이 무엇일지 찾고 개선하기 위해 최선의 디자인을 할 방안을 스스로 고민해야 한다.

지금 제공되고 있는 선택지는 최선의 선택 설계의 결과일까? 현재의 정부 시스템 상에 선택 설계가 최적의 결과인지를 검토하고 검증하는 절차나 체계는 빠져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최선의 선택지를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수요자들이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선택 설계를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중요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현재 우리나라의 운영시스템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공공서비스의 기본값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하고 필요하다면 다시 디자인해야 한다. 이를 통해 국민들이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살펴본 일본과 우리나라의 사례는 기존 공공 정책의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수요자 중심의 개발 방법인 디자인을 활용하려는 시도와 가능성을 보여준다.
공공서비스의 기본값은 사용자 행동을 변화시키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어떤 기본값을 제시해야 할지 더 폭넓은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서는 수요자들과의 공동 창작, 수요자의 불편함을 탐지하는 것에서 계획을 시작하는 디자인 방법의 활용이 필요하다. 그리고 넛지는 올바른 디자인으로 시각적 유인책을 잘 구현할 때야 비로소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재설계가 필요한 것들 투성이다. 공공서비스는 그야말로 '다시 디자인'해야 한다. 
이제까지는 공공서비스 설계자가 주어진 조건에서 제한된 선택지를 설정하고 서비스 사용자는 그중 나은 값을 선택했다. 앞으로 공공서비스 설계자는 전제를 벗어나 가능성을 충분히 탐색하고 최선의 선택지를 디자인하는 선택 설계자로 진화해야 한다. 장기기증의 기본값을 ‘동의’로 조정해 기증률을 높일 수 있었던 것처럼, 세금 징수, 에너지 절약, 저축, 건강 검진, 교육, 기부, 데이터 공개, 공지 알림... 생활 속 공공서비스의 기본값을 다시 디자인하여 각종 정책 효과를 높일 방법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공공서비스 제공자가 공공서비스의 디자이너로서의 자신의 막중한 역할을 깨닫고 이를 더 철저히 시행할 방법을 고민한다면, 단순히 편의 제공의 수준을 넘어 국민이 주체적으로 최선의 결정을 하는 사회 시스템을 설계할 수 있을 것이고 궁극적으로 국민의 삶을 개선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국민 중심의 정부를 만드는 데 있어 디자인이 해야 할 핵심적인 역할이다.



윤성원 한국디자인진흥원 서비스디자인실 수석연구원
2023.10.27.
2023년 11월 월간지방정부 게재 원고를 보완한 글입니다.
http://www.usabl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