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지금 스테인리스 밥공기에 밥을 먹는 이유

2025. 10. 12. 23:31디자인/디자인·예술이야기

지금 당신의 식탁 위엔 스테인리스 밥공기가 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지만, 그것은 사실 정부가 디자인한 물건이다.
쌀이 귀하던 당시 정부는 음식점에 스테인리스 밥공기에 밥을 담을 것을 강제했다. 밥그릇의 지름과 높이, 심지어 얼마나 밥을 담아야 하는지까지를 정해 모든 국민이 이 기준을 따르게 했다. 조선 시대쯤 있었을 것 같은 일이다. 설마 가능할까 싶은 정부의 무리한 시도는 놀랍게도 잘 먹혔고, 그 여파로 당신은 지금도 스테인리스 밥공기에 밥을 먹고 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정부 방침에 따르는 것이 음식점에도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원가를 줄일 수 있었고, 밥을 한 번에 많이 해서 오래 보완할 수 있었고, 겹쳐 쌓을 수도 있는 등 여러모로 좋았다. 소비자로서는 스테인리스 공기에 밥을 먹는 것이 아무래도 밥맛도 없고 양으로도 부족한 감이 있어 싫었지만, 모든 음식점이 이 기준을 따랐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음 글을 보면 당시 사정을 느낄 수 있다. 

‘스테인리스 밥공기는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 남긴 흔적이다. 1970년대까지 쌀은 귀한 음식이었다. 쌀이 늘 부족했다. 정부는 ‘쌀 아끼기 운동(절미운동)’을 벌였다. 예를 들어 모든 음식점은 밥에 보리쌀을 25% 이상 섞어서 팔아야 했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쌀밥이 없는 날 ‘무미일(無米日)’로 정하기도 했다. 이날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밀가루 음식만 팔아야 했다.’ ‘이모 밥 하나요’ 전국 식당 공깃밥의 궁금증 풀렸다’,  
2020.06.08., 조선일보 https://news.chosun.com/misaeng/site/data/html_dir/2020/06/08/2020060803277.html 

‘1976년 서울시에서는 규제를 더 엄격히 하기 위해 음식점에서 스텐 밥공기에만 밥을 담도록 의무화하는 규정을 요식협회에 시달합니다. 내면 지름 10.5cm, 높이 6cm로 정하고, 이 그릇의 5분의 4 정도만 밥을 담도록 한 것이죠. 이후 이 규정은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이때의 밥공기가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공깃밥’, 나무위키 https://namu.wiki/w/공깃밥 

박정희 정부가 그렇게 정했다. 식당이 위반하면 1개월 영업정지, 두 번째는 허가 취소. 그 뒤로 우리의 생활이 바뀌었다. 국민의 밥공기까지 통일하겠다는 화끈한 정부가 있었던 결과다. 
우리 일상을 이루는 많은 것들은 애당초 그래야만 했던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디자인’한 것이다. 
누가 당신의 밥공기를 바꾸었을 때, 이것을 모르는 척 받아들이고 넘어갈 수도 있다.
자, 선택하자. 두고 볼 것인가, 아니면 저항할 것인가.

출처 : 다시 디자인 중에서 발췌. 윤성원. 2021.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