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에서 거리로 - 예술의 경험을 디자인한 화가 반 고흐

2025. 10. 5. 13:49디자인/디자인·예술이야기

1887년 6월 어느날 저녁 파리, 당대 젊은 예술가들이 테오와 빈센트가 함께 사는 집에서 파티 중이었다. 빈센트가 예술을 ‘상품’이 아니라 '서비스'로 전환하는 '공유예술서비스시스템'을 제안하며 그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흥미로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동료 화가들에게 자기의 구상을 설파하는 빈센트는 이날, 기존의 화랑 판매 모델을 거리에서 작동시키려 했던 서비스디자이너였다.
여기에 서비스디자인의 핵심 요소들이 들어 있다.


빈센트가 말했다. 
"왜 함께 협력해서 일하지 않으려는 거요?"

"자넨 이 패거리들 중의 유일한 코뮤니스트로군.” 

고갱이 말했다. 
"함께 협력해서 일하면 우리가 뭘 얻을 수 있을는지 말해주겠나?"

"좋소." 

딱딱하고 둥그란 계란 노른자를 입 안에 던져 넣으며 빈센트가 말했다. 
"말해드리지. 난 한 가지 계획을 짜고 있소. 
우리들 대부분이 무명(無名)의 화가요. 마네, 드가, 시슬레, 피사로가 우리들을 위해 길을 닦아놓았소. 
그들은 이미 알려져 인정을 받았고 그들 작품은 커다란 화랑에 진열되어 있지요. 
그래, 좋아요, 그들이 그랑 불바르(大路)의 화가들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우린 옆골목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거요. 우린 프티 불바르(小路)의 화가들입니다. 
우리들의 그림을 노동자들의 식당인 옆골목의 자그마한 레스토랑들 안에 전시하지 못할 것 없어요. 
각자, 이를테면 다섯 개의 캔버스를 내놓는다고 합시다. 
그 그림들을 매일 오후 새로운 장소에다 걸어놓는 거예요. 
그리고 노동자들이 살 수 있는 가격이 얼마건, 그 가격에 따라 그림들을 파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의 그림을 늘 대중 앞에 선보일 수 있다는 의미 외에도, 
파리의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훌륭한 예술을 구경하고 아름다운 그림들을 무일푼에 가까운 돈으로 사도록 만들 수 있다는 얘기지요.
"


"그것 참." 

흥분으로 눈을 크게 뜬 루소가 거칠게 말했다. 
"그거 멋진데."

"내 경우엔 캔버스 하나를 완성하려면 일 년이 걸리는데,"

쇠라가 투덜거렸다. 
"내가 그걸 어느 지저분한 목수들한테 팔 수 있을 것 같소?"

"자넨 소품의 습작화를 내면 되잖나."

"맞아, 하지만 레스토랑들이 우리의 그림을 받지 않는다면?"
"당연히 받아들일 걸세."
"안 받아들일 게 뭐야? 자기네들은 돈 한푼 안 들이고 더구나 그 장소를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데 말이야."

"그런데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하지? 누가 그런 레스토랑들을 찾아내겠다는 얘기지?"

"그것도 모두 계산해놓았소." 빈센트가 외쳤다. 
"탕기 영감을 우리의 감독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 영감이 레스토랑을 찾아내고 그림을 걸고 돈을 받아낼 겁니다."

"그렇고말고. 그 영감이 딱 알맞은 인물일세."

"루소, 자 착하신 분, 탕기 영감한테 달려가서, 중요한 일로 찾고 있다고 말해줘요."

"그 계획에서 날 빼주면 좋겠어.” 

세잔이 말했다.
"뭣 때문에?" 고갱이 물었다. 
"당신의 아름다운 그림들이 노동자들의 눈에 의해 더럽혀질까봐 두렵소?"
"그게 아니야. 이달 말쯤엔 난 액상 프로방스로 돌아갈 예정이니까 그런 거야."
"딱 한 번만 해보시죠." 
빈센트가 우겨댔다. 
"그게 아무 소용없다 하더라도, 밑져야 본전이니까."
"아, 좋아."

"레스토랑 전시가 끝나면," 

로트레크가 말했다. 
"유곽에서 시작해도 괜찮을 겁니다. 몽마르트르의 마담들은 내가 거의 다 알고 있으니까. 그들에겐 좀더 돈 많은 단골 손님들이 있거든. 더 높은 가격으로 팔 수 있을 거요."

탕기 영감이 몹시 흥분한 모습으로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루소는 탕기 영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신도 자세히 잘 모르는 채로 설명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탕기 영감의 둥그런 밀짚모자가 한쪽으로 삐딱하게 얹혀 있었고 그의 뭉툭한 작은 얼굴은 열성적인 열의로 환히 빛나고 있었다.
그 계획을 다 듣고 난 그가 탄성을 질렀다. 
"그럼, 그럼, 내가 바로 딱 알맞은 곳을 알고 있지. 노르뱅 레스토랑. 그곳 주인이 내 친구요. 그곳 벽돌엔 아무 장식도 없으니까, 그 주인이 좋아할거요. 그곳이 끝나면, 피에르 로(路)에 내가 아는 레스토랑이 또 하나 있으니까. 아, 파리엔 수천 개의 레스토랑이 있는걸, 뭐."

"프티 불바르 클럽의 제1회 전시회가 언제 열릴 예정인가?"

고갱이 물었다.

"연기할 필요가 있겠소?" 

빈센트가 물었다. 
"내일 시작해서 안 될 것 없지 않겠소?"

탕기 영감은 한쪽 발로 뛰어다니다가, 모자를 벗었다가는 도로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럼, 그럼, 내일! 아침에 당신들 캔버스를 나한테 가지고 오구려. 오후에 내가 그것들을 노르뱅 레스토랑에다 걸어놓을 테니까.
그러고 나서 사람들이 저녁 식사를 하러 오면, 일대 센세이션이 일어날 거요.
부활제에 미사용 양초 팔리듯이 우리 그림이 팔릴 테니까. 지금 내게 뭘 주는 거요? 맥주 한 잔이군? 

좋아요, 여러분, 프티 불바르 코뮤니스트 미술 클럽을 위해 건배합시다. 
제1회 전시회가 성공하기를!"
...

『빈센트 반 고흐』. 어빙 스톤 (원제 Lust for Life: The Story of Vincent van Gogh)


1. 문제 정의

“우린 옆골목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거요. 우린 프티 불바르(소로小路)의 화가들입니다.”
그는 파리에 모인 젊은 화가들의 위치를 재정의하고, 기존 ‘대로의 화가(살롱, 화랑)’와 다른 규칙의 게임을 선포한다.

‘프티 불바르’라는 말은 일종의 디자인 브리프라고 할 수 있다. 시장 중심 구조에서는 통하지 않는 이들에게, 새로운 룰과 새로운 유통망이 필요하다는 진단이다. 그의 선동은 시스템의 재해석에서 출발한다.
문제의 정의(Problem Framing)
기존 예술시장(살롱, 화랑)은 중심(그랑 불바르)만의 규칙으로 움직인다. 그 규칙 안에서는 새로운 예술가들이 설 자리가 없다. 그는 이 문제를 “팔리지 않는다”로 정의하지 않았다. 대신 “잘못된 시스템 위에선 새로운 가치가 작동하지 않는다”로 문제를 재정의했다. 실패의 원인을 개인 능력이나 취향이 아닌 구조의 문제로 본 것이다.

대상의 재구성(Reframing Stakeholders) :
기존의 대상(감상자)은 상류층 컬렉터나 살롱 심사위원이었다. 반고흐는 감상자와 구매자를 ‘노동자 시민’으로 설정했다. 그는 예술을 “부르주아의 취향 소비”가 아니라, “노동자의 일상 경험”으로 옮겼다. 살아남는 일이 급하던 노동자 계층이 회화의 실 수요자 되기엔 어려운 일이었다.

목표의 재설정(Alternative Value Proposition) :
예술의 가치는 거래(exchange)가 아니라 사용(use) 에서 생긴다. 예술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장”이라는 관점이다. 그는 “레스토랑 전시 구상”에서 시작된 생각을, 이후 아를의 화가 공동체(예술인 마을, Maison Jaune 계획)로 더 정교하게 발전시키게 된다. '여기에선 여러 화가가 함께 살며, 서로의 작업을 돕고, 예술을 위해 일하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 1888)라는 아를 시기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초기 예술의 ‘유통 구조(distribution system)’를 재설계한 아이디어를 ‘생산 및 운영 구조(production & operation system)’로 확장하게 된다. 


2. 대안 제시

“우리들의 그림을 노동자 식당의 자그마한 레스토랑들 안에 전시하지 못할 것 없어요.”
그는 문제제기에 대해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옆골목의 화가들'이니 옆골목 레스토랑에서 전시하자고 제안한다. 

‘프티 불바르의 화가’라는 정체성과 ‘옆골목의 레스토랑’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논리적으로, 감정적으로 다리 놓기하여 심리적 저항을 줄이는 것이다.(기존 화가는 화랑에서 전시 - 옆골목 화가이니 골목 레스토랑에서 전시)
또한 이것은 기성 시스템의 제공처인 화랑이 아니라 사용자가 실제로 머무는 일상 공간으로 접점을 이동한다.
찾아오게 하는 게 아니라 찾아가는 방식으로 사용자의 맥락에 서비스를 가져가는 접근이다. 
‘기성 화가는 대로의 화랑에서 → 좁은 길에 있는 화가는 옆골목의 레스토랑에서’
‘부르주아 감상자 → 노동자 시민’
‘소유 → 경험’
“그림들을 매일 오후 새로운 장소에...”
‘오후’와 ‘저녁 식사 시간’은 노동자의 생활 리듬에 맞춘 노출 타이밍이다.
순회·회전은 같은 사용자에게 과도 노출을 줄이고, 다른 사용자에게 신선도를 높인다.

“노동자들이 살 수 있는 가격… 무일푼에 가까운 돈”
지불 능력에 맞춘 가격전략을 명시한다. 접근성(Accessibility)과 형평성(Equity)을 동시에 겨냥한 수요자 중심 의사결정이다.
“자넨 소품의 습작화를 내면 되잖나”
완성작만 고집하지 않고 사용 맥락에 맞춰 포맷을 조정한다(소형·저가·즉시성). 컨텍스트 적합성(Context-fit)과 구매 장벽 완화가 결합된 사용자 지향 피봇이다.
가격·시간·장소·포맷을 사용자 맥락에 맞춰 조정하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3. 서비스 시스템 설계

“탕기 영감을 우리의 감독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 영감이 레스토랑을 찾아내고 그림을 걸고 돈을 받아낼 겁니다.”
이 구상은 전시 방식의 실험이 아니라, 예술을 시장에서 서비스로 전환하고자 했던 시도였다. 여기서 반고흐는 다음과 같은 서비스 구조를 제시한다.

구분 현대적 개념 역할 
화가 생산자(Producer) 작품 제공자, 서비스 공급자
탕기 영감 오퍼레이터(Operator) 접점 관리, 수익 정산, 네트워크 운영
레스토랑 주인 파트너(Partner) 공간 제공, 장소 가치 상승
시민(노동자) 사용자(User) 경험 소비자, 사회적 가치 창출자


그는 이해관계자 각각의 이익을 설계했다.
“그림을 걸면 장소가 아름다워진다” — 상호이익 구조(Co-benefit System).
“가난한 사람도 예술을 산다” — 포용적 가치(Inclusive Value).
이 구조는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과 순환 구조(Feedback Loop)를 내포하고 있다.
그는 촛점을 '예술의 거래'에서 '예술의 경험'으로 옮겼다. 이는 오늘날 ‘경험경제(Experience Economy)’와 ‘공공서비스디자인’의 철학과 겹친다. 기존의 예술 거래 모델과는  다음과 같이 다르다. 
소유 기반 가치(Value in Exchange) → 경험 기반 가치(Value in Use)
작품 중심 모델 → 사용자 참여 모델
경제적 거래 → 사회적 순환

4. 프로토타이핑

“내일 시작해서 안 될 것 없지 않겠소?”
고갱이 “언제 시작하나?” 묻자, 빈센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회의에서 바로 실행으로 넘어간다.

서비스디자인 프로세스로 보면, 프로토타이핑(Prototyping) 이다.
작게, 빠르게, 현장에서. 탕기 영감은 현장 운영자, 노르뱅 레스토랑은 첫 테스트 베드, 그리고 ‘프티 불바르 클럽’은 커뮤니티 기반 운영조직이었다. 이 방식은 ‘디자인 사고(Design Thinking)’의 원형이라 할 만하다. 실험, 관찰, 수정. 반고흐는 다음날 실제로 그 루프를 돌렸다. 결과는 실패였지만.

5. 서비스디자이너 반고흐

이날 저녁 반고흐는 감정적 예술가가 아니었다. 프레임을 짜고, 이해관계자를 디자인하고, 프로토타입을 실행하는 전략가였다.
어쩌면 반고흐는 처음으로 ‘공유 예술 서비스 시스템’을 꿈꾸었던 서비스디자이너가 아니었을까?

‘왜 협력하지 않느냐’는 그의 질문은 예술 담론이 아닌, 사회적 시스템을 위한 디자인챌린지였다. 그는 “프티 불바르의 화가들”이라는 선언으로 예술의 권력을 화랑이 아닌 ‘거리’로 이동시키려 했다. 예술의 민주화를 향한 초기의 공유경제적 시도이자, ‘공공서비스디자인’을 예고한 장면이다. 그의 발언으로 공공디자인, 사회혁신, 서비스디자인이 추구하는 핵심 가치 - ‘사용자 중심’, ‘접근성’, ‘공유’, ‘순환’ - 가 그날 밤 그들의 마음속에 싹텄을지도 모른다.

다음날, 탕기 영감은 약속대로 노르뱅 레스토랑에 그림을 걸었다. 

그러나 “부활절의 양초처럼” 팔릴 것이라던 기대와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루 일과로 지친 노동자들은 그림을 보지 않았다.
레스토랑 주인은 첫날 이후 관심을 잃었고, 화가들은 다시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1차 프로토타이핑 결과는 실패였다. 당시 사회에는 예술을 ‘서비스’로 경험하려는 인프라도, 참여할 사용자 문화도 부족했다.
시스템의 수용자(사용자)와 운영자(파트너)의 준비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구현된, 시대를 앞선 프로토타입이었다.

반 고흐는 2년간의 파리 생활을 접고 35세의 나이로 프랑스 남쪽 끝 마을인 아를로 떠났다.

그는 아를에서 파리에서 이루지 못했던 ‘화가 공동체’의 구상을 재개했다. 2차 프로토타이핑으로 발전 될 수 있었을까?
반 고흐는 여러 동료 예술가들에게 합류를 권했지만 오직 고갱만이 화답했다. 아를 노란 집의 실험은 고갱과의 2달 간의 짧은 공동생활 끝에 파국으로 끝나게 된다.

반 고흐는 언제나 즉시, 모든 것을 걸었다. 그 결과 대부분이 실패하고 부서졌지만, 사람들은 파멸도 감수하는 결행에 매혹된다.
그에게 프로토타이핑은 삶의 방식이었다. 시도하고, 배우고, 부서지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고갱이 물었다. “그래서 1회 전시회는 언제 열릴 예정인가?”
“연기할 필요가 있겠소?” 빈센트가 되물었다.
“내일 시작해서 안 될 것 없지 않겠소?”
그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2025.10.5. 윤성원

그림: 챗G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