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0. 4. 13:05ㆍ디자인/디자인·예술이야기

알파벳 사전식 기획의 함정
잡지나 트렌드 기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알파벳 사전식 기획’이 있다. A부터 Z까지 각 글자로 시작하는 단어를 하나씩 골라 트렌드 키워드처럼 소개하는 방식이다. 균등하고 세련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심각한 정보 왜곡을 낳는다. 단어의 분포가 애당초 불균등하기 때문이다. A·C·S... 에 단어가 몰려 있고 Z·Y·X...에는 별로 없다보니 핵심 개념이 누락되고, 사소한 단어가 과장되며, 독자는 왜곡된 지식 지도를 접하게 된다.
이것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공정’을 강조하면 오히려 왜곡된 결과가 나오게 됨을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다. 따지고 보면 문명의 산물은 본래 기울어져 있다. 권력, 기술, 언어, 시장이 만들어낸 경사가 나름의 사정이 되어 들쭉날쭉한 지형이 되기 마련이다. 역사를 거치며 이미 기본값으로 깔려 있다. 그러니 ‘공정’을 균등의 기술로 다루려는 순간, 오히려 불균형이 심화된다. 공정의 잣대로, A부터 Z까지 고르게 하나씩 재단하자고 하면 결과적으로 더 불평등한 세상이 된다. 아이러니하다.
프레임워크의 함정
이와 비슷한 일이 전략 수립 현장에서도 벌어진다. 컨설턴트들은 이런 순서를 거치며 전략 프레임워크라는 것을 만든다. (이것은 단순화한 예시일 뿐으로, 실제 프로젝트에서는 훨씬 창의적으로 변용된다.)
1. 축 설정하기
먼저 기준을 고른다. (수요)시장 매력도 × (공급)내부 역량 같은 조합이 흔하다. 이 단계에서 이미 어떤 문제를 보이게 하고 어떤 문제를 가리게 할지가 결정된다.
2. 매트릭스 그리기(이것이 가장 단순한 예이다)
두 축을 교차시켜 2×2 칸을 만든다. 각 칸에는 핵심 투자, 역량 보강, 효율 한계, 철수 같은 이름을 붙인다.
3. 칸 채우기
각 칸에 2~3개의 과제를 억지로라도 구상한다. 예컨대 ‘핵심 투자’에는 디지털 혁신 플랫폼, ‘철수 영역’에는 단발성 행사 지원 같은 과제가 들어간다.
4. 우선순위 재분류
이후 영향력과 실행 용이성을 기준으로 Quick Wins, Major Bets, Long-term Options으로 다시 정리한다.
결과는 ‘4대 전략 영역, 12대 과제’라는 균형 잡힌 그림이 된다.
경영진은 모든 것을 고려했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그 균형은 이미 선택된 축의 편향 위에서 만들어진 가공의 질서일 뿐이다.
중요한 과제는 희석되고, 사소한 과제는 부풀려진 채로 ‘문제를 객관적으로 다뤘다’는 착각을 갖게 된다.
"편향이 있더라도 기준이 없는 것 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이 과정을 거치면 미묘하고 불균등한 현실의 정황이 삭제된다.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는 중요한 힌트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다.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문제도 생기게 되는데, 허점을 인정하는 겸손함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누구도 몰랐던 비급을 얻은 것처럼 과도하게 우쭐해지고, 그 우쭐함이 시야를 좁혀 혁신의 기회를 보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알파벳 사전식 기획에서 Z든 Y든 억지로 단어를 끼워서 넣는 것과 결과적으로 같은 문제를 가져온다. 균등 형식은 현실을 왜곡한다.
'균등한 시각'이라는 착시
왜곡을 피하려면 가설 없는 발견이 필요하다. 과학적 연구에서 가설은 연구자가 세운 명시적 전제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A 요인이 B에 영향을 준다”는 식의 관계 설정이다.
서비스디자인은 사용자의 실제 경험을 관찰하면서 문제 자체를 새롭게 정의하는 것을 중시한다. 가설 없는 발견이란 백지에서 시작한다는 뜻이 아니라, 과거의 유산이 세운 전제와 가정에 끌려가지 않으려는 태도를 말한다. 이 태도를 유지하는 한 서비스디자인은 기존의 시각에서 놓쳤거나 삭제했던 문제를 다시 드러내고, 불완전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할 수 있다.
서비스디자이너가 기존의 개념적 틀이나 이론을 머릿속에 채운 채 접근한다면, 인터뷰 속에 숨어 있는 미묘한 신호나 행간의 호소를 발견하지 못할 수 있다. 어떤 참신한 방법론을 쓰더라도 연구자의 시선이 닫혀 있으면 결국 뻔한 해법을 답습하게 된다. 그래서 서비스디자인은 툴킷 다루는 기술도 필요하지만, 그에 앞서 프레임을 비워내고 사용자의 맥락에 몰입하는 태도가 우선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한 지자체가 교통 문제를 다룰 때 “교통 혼잡도 × 인프라 투자 가능성” 같은 축을 세우면 보행 안전, 야간 이동 불안, 노인 접근권 같은 현장의 문제는 다루어질 가능성이 아예 사라진다. 실제로 한 도시에서는 버스 노선 개편을 중심으로 전략이 세워졌지만, 주민 인터뷰에서는 “정류장이 어두워 밤길이 불안하다”, “환승할 때 안내가 없어 길을 잃는다”, “계단 때문에 노인이 버스를 이용하지 못한다”는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나왔다. 이런 사용자 경험은 초기에 설정했던 프레임워크 밖에 있기 때문에 배제되었다.
서비스디자인 접근을 통해서야 비로소 의제화될 수 있었다.
균형 잡힌 시각처럼 보이는 장치는 균등하다는 착각을 낳는다. 그것은 현실을 공정하게 비추는 거울이라기 보다는 선택된 편향에 따라 현실을 왜곡하는 장치일 경우가 많다. 그러니 우리가 진짜 주목해야 할 것은 사용자가 현장에서 겪는 경험이다. 문헌조사와 기존 틀의 안전지대에서 벗어나 가설 없는 발견을 통해 문제의 증거를 수집하고, 거기에서부터 전략을 세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균형적 시각이라는 착시에서 벗어나 더 정의롭고 실질적인 공정을 향해 가는 길이다. 나 또한 많은 프로젝트에서 시간과 자원이 없다는 핑계로 이런 균등의 환상을 수용해왔다. 그러니 이 글은 반성문에 가깝다.
우리가 보고 있는 균형은 정말 균형일까? 아니면 보기 좋게 포장된 착시일 뿐일까?
너무 균형잡혀 보인다면 이미 그것은 착시일 가능성이 크다.
현실은 A부터 Z까지 고르게 배열된 사전이 아니라, 빠진 글자와 삐뚤어진 여백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2025.10.4. 윤성원 (2025.9.15. 페이스북에 썼던 글을 고쳐씀)
더 읽어볼 글
- 좋은 동반자들: 비판적 현실주의와 프레임워크 분석
Fine Companions: Critical Realism and Framework Analysis
Jayne Mercier 등, International Journal of Qualitative Methods (2023)
프레임워크 분석 방법론을 비판적 현실주의 관점에서 재검토한 글. 프레임워크 분석이 단순한 분류 도구가 아니라, 이미 해석자(연구자)의 세계관·가정이 개입하는 장치라는 비판을 담고 있다.
SAGE Journals - 공정성 다시 생각하기: 헤게모니적 ML 공정성 접근에 대한 학제적 비판
Rethinking Fairness: An Interdisciplinary Survey of Critiques of Hegemonic ML Fairness Approaches
Lindsay Weinberg. Journal of Artificial Intelligence Research 74 (2022): 75-109
인공지능 분야에서 ‘공정성’ 개념이 기술적 프레임워크 안에서 단순화·왜곡되는 과정을 비판한다. 표면적으로는 균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불균형을 가리는 메커니즘을 탐구한다.
arXiv - 비판을 계속하라! 프레임워크의 정치성을 묻다On with critique! The necessity of critique in addressing the political deficits of responsible innovation — L. Penttilä, Journal of Responsible InnovationLisann Penttilä, Journal of Responsible Innovation (2024) 프레임워크가 지니는 정치적 성격과 한계를 지적한다. 분석 도구로 환원될 수 없으며, 사회적·정치적 맥락을 외면하면 왜곡된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Taylor & Francis Online
'디자인 > 디자인·예술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도시의 따끈한 리빙랩, 목욕탕 옆 아파트에서 있었던 실험 이야기 - 일본 TOKYO SENTO. 2017. (0) | 2025.10.10 |
|---|---|
| 광기의 천재를 인간 빈센트로 되돌린 요한나 - ‘반 고흐를 만든 여자’, 2021년 뉴욕타임즈가 주목한 이야기 (1) | 2025.10.09 |
| 화랑에서 거리로 - 예술의 경험을 디자인한 화가 반 고흐 (0) | 2025.10.05 |
| 창의성을 깨우는 법: 아이디어 엔진을 가동하는 7가지 방법 & (영상)데이빗 켈리가 말하는 '창의성의 본질' (1) | 2025.10.04 |
| 이타적인 사람에게 더 상처받는 이유 - 서비스디자인의 교훈 (0) | 2025.10.03 |
| 겉과 속이 다른 정책, 버스라 불리는 유람선 (0) | 2025.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