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0. 9. 14:14ㆍ디자인/디자인·예술이야기
'(폴) 세잔, (카미유) 피사로, (폴) 고갱, (클로드) 모네,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폴) 시냐크, (툴루즈) 로트렉, (에드가) 드가…' 등 1880년대 후반기 파리에 모여있던 인상파·신인상파 화가들은 서로를 성으로만 불렀다. 예외적으로 반 고흐는 성이 아닌 이름, ‘빈센트’로 불렀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작품에 ‘Van Gogh’ 대신 항상 ‘Vincent’라고 서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이유를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설명했었다. “외국 사람들은 내 성을 발음할 수 없으니까(Van Gogh는 네덜란드어로 ‘판 호흐’처럼 발음), 이름으로 서명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1882년 편지 중)
이로 인해 당대 예술가들도 자연스럽게 그를 “빈센트”라 불렀다.
그런데 사후 유명해지고 난 뒤에도 그는 여전히 '빈센트'로 불리고 있다. 영화, 음악, 소설 등 많은 문화 콘텐츠들이 그를 ‘빈센트’라는 이름으로 일컫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리고 이 작품들은 화가의 천재성보다는 고통과 순수성에 집중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 La Vie de Vincent van Gogh (1931) 초창기 전기 영화, 이름 중심으로 감정적 접근
(노래) Vincent (Starry, Starry Night) (1971) 돈 맥클린의 대표곡, 전 세계적으로 ‘빈센트=순수한 예술가’ 이미지 고착
(영화) Vincent & Theo (1990) 로버트 알트만 감독, 형제 관계를 중심으로 인간적 서사 강조
(애니메이션) Loving Vincent (2017) 65,000장의 유화로 제작, 제목 자체가 ‘Vincent’ 중심
예술사에서 이름만으로 정체성이 확립된 인물은 드물다. 전체 이름을 줄여 부르는 경우에는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바실리) 칸딘스키’, ‘(호안) 미로’, ‘(피에트) 몬드리안’과 같이 성으로만 호명한다. ‘빈센트’는 감정과 기억의 언어이고, ‘반 고흐’는 제도와 기록의 언어다.*
* Van Gogh Museum, Van Gogh Foundation 과 같이 공식적·제도적 영역, 국제 전시, 학술 자료 등에서는 ‘반 고흐’가 표준 표기로 쓰인다.
‘빈센트(Vincent)’라는 이름이 독립적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그가 드물게 ‘인간적 서사’가 예술과 분리되지 않은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다른 화가들과 달리 그의 삶 자체가 작품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 경향이 생긴 것은 한 인물 - 동생 테오의 부인, 요한나 반 고흐-봉허(Johanna van Gogh-Bonger) - 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1890년 빈센트가 세상을 떠난 뒤, 불과 6개월 만에 동생 테오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망연자실한 상태에 빠졌다. 그녀는 두 사람의 죽음 뒤에 남겨진 그림과 편지를 정리하면서, 두 형제가 주고받은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요한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빈센트의 편지는 그 자체가 예술이며, 그의 그림을 해독하는 열쇠다.”
요한나는 더이상 단순한 유산관리의 책임자가 아니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서사를 감정적으로 체험하도록 구성함으로써, 작품을 경험하는 새로운 경로를 만드는 경험디자이너가 되었다. 요한나는 전시와 출판, 그리고 편지의 편집을 통해 빈센트 반 고흐의 예술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미술계와 사회운동계를 넘나들며 전략적으로 활동했다. 그녀는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하나의 맥락으로 엮어냈고, 이를 통해 ‘예술을 사회가 경험하는 방식’을 새롭게 정의했다.
그는 그림마다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의 일부를 함께 전시해, 관람자가 작품을 단순히 ‘보는’ 것 뿐 아니라 ‘이해하고 공감하는 과정’을 경험하도록 설계했다. 또한 당시 유명한 미술평론가들을 찾아가 직접 빈센트의 편지를 건네며 읽어보도록 권했다. 그녀는 ‘인간 빈센트’를 통해 작품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그들이 작품을 보던 비판적 시각을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그 결과 그의 작품은 인간 빈센트의 감정과 사유가 녹아든 이야기로서 사람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2021년 4월 14일,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에 실린 러셀 쇼르토(Russell Shorto)의 기사 「반 고흐를 만든 여자(The Woman Who Made Van Gogh)」는 빈센트 반 고흐의 명성이 ‘광기의 천재’ 빈센트 반 고흐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요한나가 그녀의 일생을 통해 인물의 서사를 구축하려 노력했던 결과였음을 밝힌다. 그녀가 밝혀낸 내러티브 덕분에 ‘반 고흐’는 예술사적 이름으로 남았고, ‘빈센트’는 꿈을 향해 일생을 던진 무모하고 아름다운 이름으로 기억된다.
요한나는 ‘빈센트를 경험하는 방식’을 디자인했던 것이다.
2025.10.9. 윤성원


반 고흐를 만든 여자 (The Woman Who Made van Gogh)
2021년 4월14일 뉴욕타임즈
저자 러셀 쇼르토(Russell Shorto)
출처 : https://www.nytimes.com/2021/04/14/magazine/jo-van-gogh-bonger.html
빈센트 반 고흐의 사후 명성을 사실상 구축한 인물, 요한나(“Jo”) 반 고흐-봉거(Johanna van Gogh-Bonger)의 삶과 역할을 이야기한다.
The Woman Who Made van Gogh (Published 2021)
Neglected by art history for decades, Jo van Gogh-Bonger, the painter’s sister-in-law, is finally being recognized as the force who opened the world’s eyes to his genius.
www.nytimes.com
반 고흐를 만든 여자 The Woman Who Made van Gogh
2021년 4월14일. 뉴욕타임즈.
저자 : 러셀 쇼르토 Russell Shorto
원문 출처 : https://www.nytimes.com/2021/04/14/magazine/jo-van-gogh-bonger.html
번역 : 챗GPT (요약, 생략,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원문을 확인하세요.)
1885년, 스물두 살의 네덜란드 여성 요한나 봉거(Johanna Bonger)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이자 파리의 미술상으로 이름을 알리던 테오 반 고흐를 만났다. 역사는 테오를 두 형제 중 더 침착한 사람, 감정적으로 불안한 형을 헌신적으로 지탱한 상징적 인물로 기억하지만, 그 역시 충동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단 두 번 만난 뒤 청혼했다.
‘조(Jo)’라고 자신을 부르던 그녀는 검소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극동에서 수입되는 커피와 향신료 무역 같은 해운 관련 소식을 다루는 신문 편집자였다. 그는 자녀들에게 단정함과 감정의 절제를 강요했다. ‘가장 높이 솟은 못이 먼저 두드려 맞는다’는 네덜란드 속담은 봉거 가문이 그대로 신조처럼 받아들인 것이었다. 조는 암스테르담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며 무난하지만 흥미롭지 않은 삶을 택했다. 충동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이미 사귀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테오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러나 테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일종의 ‘영혼이 느껴지는 매력’을 지닌 남자였다. 형보다 조금 마르고 창백했지만, 감수성 있는 인상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예술과 문화, 지적인 대화의 세계에 끌렸고, 테오는 그 욕구를 충분히 채워줄 수 있는 남자였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음을 얻었다. 1888년, 청혼한 지 1년 반 만에 조는 결혼을 승낙했다. 그 순간부터 그녀의 인생은 전혀 다른 궤도로 들어섰다.
그곳은 벨 에포크의 파리였다. 예술, 연극, 지식인들, 그리고 피가르(Pigalle) 거리의 카페와 사창가로 들끓는 도시.
테오는 평범한 미술상이 아니었다. 그는 예술의 최전선에 있었다. 아카데미 데 보자르(Académie des Beaux-Arts)가 강요하던 돌같은 사실주의를 거부하는 젊은 예술가들을 전문적으로 다뤘다.
다른 미술상들은 인상파를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테오 반 고흐에게 그들은 고객이자 영웅이었다. 그리하여 고갱, 피사로, 툴루즈 로트레크 같은 전위적 젊은 예술가들이 마치 동물원에서 탈출한 야수처럼 그녀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조는 자신이 하나의 거대한 예술적 전환기의 중심에 서 있음을 느꼈다. 세상의 방향이 바뀌는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다.
가정에서도 그녀는 생의 충만함을 느꼈다. 결혼 첫날 밤을 일기에서 ‘황홀했다’고 기록한 그녀는 남편이 귓가에 속삭인 말을 잊지 못했다.
“우리 아기를 갖고 싶지 않아요, 내 아기?”
그녀는 완전히 사랑에 빠졌다. 테오와, 파리와, 그리고 삶 자체와.
테오는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그들의 미래에 대해, 그리고 색채·빛·안료 같은 주제에 대해. 그는 아내가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독려했다. 그러나 대화의 대부분은 한 사람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그는 처음 만난 날부터, 형 빈센트의 고통받는 천재성에 대한 이야기로 조를 매혹시켰다.
그들의 아파트는 빈센트의 그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새로운 상자가 수시로 도착했다. 프랑스·벨기에·영국·네덜란드를 떠돌며 살았던 빈센트는 광적인 속도로 캔버스를 쏟아냈다 — 올리브나무, 밀밭, 프로방스의 태양 아래 농부들, 노란 하늘, 복숭아꽃, 비틀린 나무, 물결 같은 흙덩이, 불꽃처럼 솟은 포플러들. 그는 거의 하루에 한 점씩 그렸고, 그것들을 테오에게 보내며
“이 그림을 팔 수 있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테오는 거의 팔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 두터운 유화의 질감, 폭력적인 붓자국이 얽힌 그림들은 조에게 현대미술을 배우는 첫 교과서가 되었다.
결혼 첫날 밤으로부터 9개월이 조금 넘은 시점, 조는 아들을 낳았다. 테오가 제안한 이름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아기의 이름을 ‘빈센트’라고 지었다.
테오는 형을 존경했지만, 동시에 늘 불안해했다. 조가 테오를 만날 무렵, 빈센트의 정신상태는 이미 심각하게 무너져 있었다.
그는 한겨울에 스스로를 벌주기 위해 밖에서 잠을 자고, 감각을 자극하거나 마비시키려 알코올·커피·담배를 과도하게 섭취했다. 성병(임질)에 시달렸고, 목욕을 멈추었으며, 이빨은 썩어갔다.
그는 자신의 경력을 도와줄 예술가들과의 관계를 끊었다. 1888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테오와 조가 약혼을 발표하던 시점에
빈센트는 아를에서 고갱과의 격렬한 다툼 끝에 자신의 귀를 잘랐다.
어느 날, 화풍의 전환을 알리는 캔버스 한 점이 도착했다. 빈센트는 아를의 밤하늘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는 테오에게 이렇게 썼다.
“푸른 깊이 속에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지. 초록빛, 노란빛, 흰빛, 분홍빛, 더 밝게, 더 에메랄드처럼, 라피스 라줄리처럼, 루비와 사파이어처럼.”
그는 그런 하늘을 그리고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인기가 높던 시인 월트 휘트먼을 읽으며, 휘트먼이 ‘거대한 별들의 하늘’을 ‘신과 영원의 상징’으로 본다고 해석했다. 완성된 그림을 그는 테오와 조에게 보냈다. 그리고 짤막한 메모를 덧붙였다.
“이건 약간의 과장이야.”
그것이 바로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이었다. 그 작품은 그가 사실주의에서 멀어지는 과정을 보여줬다. 붓자국은 마치 무언가 더 깊은 것을 파내는 도랑 같았다. 테오는 그 그림을 불안하게 여겼다. 형이 멀어져 간다는 느낌을 받았고,
무엇보다 시장이 이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답장에 이렇게 썼다.
“형은 현실적인 것을 그릴 때 가장 강하다 생각해.” 그러나 여전히 150프랑을 함께 보내주었다.
1890년 봄, 소식이 전해졌다. 빈센트가 파리에 온다는 것이었다. 조는 허약한 정신병 환자를 예상했지만, 눈앞에 나타난 남자는 그들의 벽을 채운 그림들 속 생명력 그 자체였다. 그녀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내 앞에는 건강한 안색의 넓은 어깨를 가진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쾌활했고, 표정에는 결연함이 있었다. ‘그는 테오보다 훨씬 강해 보인다.’ 이것이 내 첫인상이었다.”
그는 거리로 뛰어나가 좋아하던 올리브를 사오며 “이걸 꼭 맛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보낸 그림 앞에 서서 하나하나를 깊은 집중으로 바라보았다. 테오가 아기를 재우는 방으로 안내했을 때,
조는 두 형제가 요람을 들여다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의 눈에는 모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녀는 썼다.
그 다음 일어난 일은 두 번의 망치질 같았다.
테오는 빈센트를 파리 북쪽의 오베르쉬르우아즈(Auvers-sur-Oise) 마을로 보냈다. 동종요법을 신봉하던 의사 폴 가셰(Dr. Paul Gachet)가 그의 치료를 맡았다. 몇 주 뒤, 소식이 왔다. 빈센트가 스스로에게 총을 쐈다는 것이었다
(일부 전기 작가들은 그 상처가 자해가 아니라고 본다).
테오는 급히 달려가 형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그는 완전히 무너졌다. 10년 남짓한 형의 예술 경력을 금전적으로, 정신적으로 지탱했던 그 노력— 빈센트가 “진지한 무언가, 신선한 무언가, 영혼이 담긴 무언가”를 만들고자 했던 그 시도— 그 모든 것이 형의 죽음과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불과 세 달 뒤, 테오 역시 육체적으로 붕괴되었다. 그는 과거 매춘업소 방문으로 감염된 매독의 말기 증상으로 환각을 보였다.
그의 고통은 끔찍하고도 괴이했다. 1891년 1월, 그는 세상을 떠났다.
결혼 21개월 만에 조는 완전히 홀로 남았다. 그녀는 방금 자신이 겪은 삶의 폭발적 강렬함에 멍했고, 그 결과 남겨진 것은 약 400점의 그림과 수백 점의 데생뿐이었다. 그것이 시동생 빈센트의 전부였다.
두 형제가 이렇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화가는 명성을 얻지 못한 채—테오가 팔 수 있었던 그림은 단 몇 점뿐이었다—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은 그들의 예술이 영원히 잊힐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름, 예술, 그리고 그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산업이 되었고, 전 세계를 휩쓸었다.
역사상 그 어떤 예술가보다도 더 널리 알려진 이름이 되었다.
그 일의 중심에는 요한나 반 고흐 봉거가 있었다. 그녀는 키가 작고, 자신감이 부족했으며, 예술이나 사업의 경험도 없었다. 남성 중심의 미술계에서 혼자 싸워야 했다. 그녀의 전모는 이제서야 밝혀졌다. 지금에서야 우리는 안다. ‘반 고흐가 반 고흐가 된 이유’를.
코로나19 훨씬 이전부터, 한스 루이턴(Hans Luijten)은 빈센트 반 고흐를 바이러스에 비유하곤 했다. “그 바이러스가 당신 삶에 들어오면 절대 떠나지 않는다”고 그는 2020년 4월 우리가 처음 대화했을 때, 밝고 현대적인 암스테르담의 그의 아파트에서 말했고, 경고의 뉘앙스를 담아 이렇게 덧붙였다. “그건 백신이 없다.” 루이턴은 예순 살, 마른 체형, 철테 안경을 쓰고, 여기저기 떠 있는 듯한 회색 머리 숱이 있으며, 아메리칸 루츠 음악—가스펠, 돌리 파튼, 저스틴 타운스 얼—에 강한 애정을 지녔다. 그는 네덜란드 남부, 벨기에 국경 가까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둘 다 신발로 생계를 꾸렸다—아버지는 공장에서, 어머니는 집에서 재봉틀로—그 덕에 그는 근면함을 존중하게 되었고, 신발을 보는 안목이 생겼다. “난 사람을 만나면 발부터 내려다보지 않고는 못 배긴다.”
집에 책 한 권도 없었지만, 부모는 루이턴과 그의 형이 지적인 꿈을 따르도록 격려했다. 두 사람의 길은 서로 평행하게 흘렀다. 한스보다 다섯 살 많은 형 게르 루이턴은 미술사를 공부했고, 지금은 파리의 미술관 퐁다시옹 쿠스토디아(Fondation Custodia) 관장이다. 한스는 네덜란드 문학을 전공하고 미술사를 부전공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뒤,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이 빈센트 반 고흐 서신(그와 테오가 주고받은 편지를 포함해 총 902통)의 새로운 비평판을 만들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1994년에 연구원으로 채용되어 그 일에 15년을 바쳤다.
그 과정에서 루이턴은 이 예술가에 대한 특별한 친화성을 키웠다. 그는 그림에 관해서도 유창하게 말할 수 있지만, 또 하나의 통찰의 층을 빈센트의 편지에서 발견했다. “그는 편지를 아주 신중히 다뤘다. 출판된 편지를 읽으면 ‘짙은 잿빛 하늘…’이라고 되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필 원본을 보면 ‘잿빛’을 쓰고 나서 ‘짙은’을 덧붙인 것을 본다. 마치 붓질을 덧대는 것처럼. 그의 예술과 글 모두에서, 그가 세상을 모든 것이 살아 있고 의식이 있는 듯 바라봤다는 걸 볼 수 있다. 그는 나무를 인간과 동일하게 대했다.”
루이턴은 집요한 연구자이다. 파리에서 뉴욕까지의 아카이브에서 썩어 가는 종이 쪽지까지 뒤져서 찾아내고, 문서의 단어들이 무엇을 말하는지뿐만 아니라 어떻게 쓰였는지에서도 의미를 끌어낸다. “반 고흐의 필체에서 감정을 볼 수 있다. 의심, 분노. 그가 술을 마셨던 때도 알아볼 수 있었다. 아주 큰 글자로 시작해서, 페이지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더 작아지기 때문이다.”
이 방대한 연구 프로젝트의 최종 결과물은, 빈센트의 예술 활동 기간보다 훨씬 오래 걸린 끝에 완성된 『Vincent van Gogh: The Letters』이다. 이 책은 총 6권, 2,000쪽이 넘으며 2009년에 출간되었다. 온라인판에는 원문의 네덜란드어 또는 프랑스어와 함께 영어 번역, 주석, 편지 원본의 필사본, 그리고 편지에서 언급된 예술작품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다.
15년 동안 루이턴과 함께 작업했던 레오 얀센(Leo Jansen, 현재 네덜란드 역사연구소 Huygens Institute 재직)은 이렇게 말했다. “프로젝트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한스가 새로운 생각을 품기 시작한 걸 느꼈습니다. 아마도 그는 우리가 마침내 빈센트의 편지를 세상에 내놓고 있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빈센트는 생애 말기에도 여전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으니까요.”
이 질문이 생겼다. 어떻게 생전 내내 상인들과 불화를 겪고 스스로의 야망을 번번이 좌절시켰던 이 ‘고통받는 천재’가 사후에 그렇게도 유명해졌는가? 그리고 단순한 ‘유명인’이 아니라, 예술사상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 되었는가?
그동안 요한나 반 고흐-봉허(Jo van Gogh-Bonger)는 반 고흐의 명성을 쌓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 역할은 ‘주변적’ 수준으로 평가되어 왔다. 예술계 경험이 전무했던 그녀의 배경 탓에, 편견과 상식이 섞인 판단이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흔적들이 있었다.
2003년, 네덜란드 작가 바스 헤이네(Bas Heijne)는 반 고흐 미술관 도서관에서 편지 몇 통을 우연히 발견했고, 이를 계기로 요한나의 삶을 주제로 한 희곡을 썼다. 그는 말했다. “이 여성의 인생 자체가 이미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라고 느꼈습니다.” 루이턴 또한 말했다.
“형제 간의 편지, 그리고 다른 화가나 상인들과 주고받은 서신에는 수많은 단서들이 흩어져 있었어요.”
그는 미술관의 도서관과 아카이브를 샅샅이 뒤져 사진과 회계장부를 찾아냈고, 그 속에서 또 다른 실마리를 발견했다. 프랑스, 덴마크, 미국의 여러 아카이브와도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러면서 하나의 가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녀가 바로 그 ‘거미줄의 중심’이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어요.”
루이턴이 특히 주목한 또 다른 자료가 있었다. 일종의 ‘성배’와도 같은 존재, 그러나 지금까지 연구자들에게는 접근이 금지되어 왔던 자료였다. 그는 요한나가 일기를 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읽지 못한 일기’라는 점이 오히려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녀가 1925년 세상을 떠난 뒤, 반 고흐 일가는 일기를 철저히 봉인해왔기 때문이다.
루이턴은 말했다. “그들이 그녀의 역할을 인정하기 싫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겸손함’ 때문이었을 겁니다.”
요한나의 아들 빈센트 빌렘은 어머니가 후년에 다른 화가와 가졌던 관계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고, 사생활 침해를 막고 싶어 했다. 일기는 그렇게 봉인된 채 남았다. 2009년, 루이턴은 그녀의 손자 요한 반 고흐에게 일기를 볼 수 있겠냐고 요청했고, 그는 마침내 허락했다. (현재 요한나의 일기와 관련 자료는 반 고흐 미술관 웹사이트와 도서관에서 열람 가능하다.)
일기 첫 페이지는 단순한 줄 공책 몇 권에 불과했지만, 루이턴의 관심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요한나는 17세 때, 테오를 만나기 5년 전에 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 여성에게 주어진 삶의 선택지는 극히 제한적이었지만, 그녀는 이렇게 썼다.
“내 인생이 끝날 때, ‘나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고, 아무 의미 있는 일을 하지 못했다’라고 말해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끔찍한 일일 것이다.”
루이턴은 말했다. “그건 정말로 흥미로운 발견이었습니다.” 이것이 곧 단서였다. 요한나는 결국 가족의 격언—‘튀어나온 못은 망치질당한다’—에 순응하지 않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2009년, 루이턴은 요한나의 전기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암스테르담 뮤지엄 광장 맞은편의 옛 학교 건물에 마련된 사무실에서 작업했다. 집필에는 10년이 걸렸다. 결국 그는 자신의 전 생애, 25년을 이 세 사람(빈센트, 테오, 요한나)의 삶에 바쳤다. 그 결과물인 『Alles voor Vincent』(모든 것은 빈센트를 위해)는 2019년에 출간되었다. 아직 네덜란드어판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예술학계에 천천히 파급되기 시작한 단계다. 『반 고흐: 더 라이프』(2011)의 공저자이자 곧 『반 고흐와 그가 사랑한 예술가들』을 출간할 스티븐 나이퍼(Steven Naifeh)는 이렇게 평했다. “이 책은 엄청나게 중요하다. 요한나가 없었다면, 세상에 ‘반 고흐’라는 이름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술사가들은 루이턴의 전기가 단지 반 고흐의 명성의 기원을 재조명한 것이 아니라, ‘예술가란 무엇인가’라는 근대적 개념 자체를 다시 성찰하게 하는 계기라고 말한다. 그것 역시 요한나가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나 반 고흐-봉허와 그녀의 아들 빈센트 빌렘 반 고흐, 1890년.
테오가 세상을 떠난 뒤, 요한나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네덜란드 부셈(Bussum)이라는 마을에 사는 친구가 하숙집을 열어보라고 제안하자, 그 말은 위로처럼 들렸다.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가족과는 적당히 거리를 둘 수 있고, 자립심을 중요하게 여긴 그녀에게는 이상적인 환경이었다. 나무가 무성한 조용한 마을이었지만 문화적으로는 활기찼고, 손님으로부터 얻는 수입은 생계를 꾸리는 데 중요했다.
파리를 떠나기 전, 그녀는 화가 에밀 베르나르(Émile Bernard)에게 편지를 썼다. 베르나르는 빈센트와 유일하게 갈등이 없었던 예술적 친구였다. 그녀는 그가 파리에서 빈센트의 유작전을 열 수 있는지 물었다. 베르나르는 그림들을 파리에 남기라고 권했다. 그곳이 판매에 유리하다는 이유였다. 그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빈센트는 개인전 규모의 인지도를 얻지는 못했지만, 죽기 직전에 몇몇 그룹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림이 팔릴 수도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빈센트는 일정한 명성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에밀 베르나르 정도의 이름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나의 본능은 달랐다. 그녀는 그림들을 직접 가지고 가기로 했다.
이는 놀라운 결정이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일기에는 삶의 모든 선택 앞에서 불안과 망설임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나는 못난 외모를 하고 있으면서도 종종 허영심에 사로잡혀 있다.”
“내 인생관은 지금 완전히 잘못되어 있다.”
“삶은 너무 어렵고, 내 주변은 슬픔으로 가득하며, 나는 너무나 용기가 없다!”
그 후 몇 주 동안, 검은 상복 차림의 그녀는 새 보금자리에서 천천히 정착했다. 침구와 은식기를 풀어놓고, 이웃들과 인사하며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한편 아기 빈센트를 돌보았다.
그녀가 가장 오랜 시간을 들였던 일은 — 몇 달에 걸친 — 그림의 배치였다. 결국 집의 거의 모든 벽이 그림으로 덮였다.
‘감자 먹는 사람들(The Potato Eaters)’ — 농민들이 소박한 식탁을 마주한 장면을 그린, 빈센트의 첫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 — 은 벽난로 위에 걸었다. 침실에는 활짝 핀 과수원 그림 세 점을 걸었다.
한 손님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그 집 전체가 온통 ‘빈센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것이 어느 정도 정리된 뒤, 그녀는 다시 공책을 꺼내 들었다. 젊은 시절에 시작했던 일기를 다시 쓰기 위해서였다. 결혼 후, 파리로 떠나던 날 그녀의 마지막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목요일 아침, 나는 파리로 떠난다!”
그 뒤의 세 해는 정신없이 바빴다. 이제야 그녀는 다시 펜을 잡았다.
“이 모든 것이 꿈에 불과한가! 내 뒤에 남은 것 — 짧았지만 황홀했던 결혼의 행복 — 그것조차 꿈이었다! 1년 반 동안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었다.”
그리고 담담히 이렇게 썼다.
“그는 나에게 아이와 함께 또 하나의 과업을 남겼다. 빈센트의 작품이 최대한 세상에 알려지고 사랑받게 하는 일이다.”
방법을 배운 적도, 예술계에 아는 이도 없던 그녀는 손에 잡히는 것부터 시작했다.
빈센트의 그림들 외에, 형제가 주고받은 방대한 편지들이 있었다. 밤이면 손님들을 돌보고, 아이가 잠든 후, 그녀는 그 편지들을 읽었다. 대부분은 빈센트가 쓴 것이었다. 테오는 꼼꼼히 편지를 보관했지만, 빈센트는 동생의 편지를 그렇게 관리하지 않았다.
그 편지에는 그의 일상과 고통—불면, 가난, 자책—이 기록되어 있었고, 그가 그리던 그림과 실험 중인 기법, 읽은 책, 다른 화가들의 작품에 대한 감상도 섞여 있었다. 그는 자주 색을 통해 이루고자 한 목표를 말로 설명하려 했다.
“도시는 보랏빛, 별은 노란색, 하늘은 청록색. 밀밭에는 모든 색조가 있다. 오래된 금, 구리, 초록빛 금, 붉은 금, 노란 금, 초록·빨강·노랑의 청동빛.”
그는 자신이 보고자 한 것을 단순화하고 본질을 강조하는 식으로 재구성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소나무와 삼나무 덤불의 자존적이고 변치 않는 본질을 강조하며 그 장면을 재창조하려 했다.”
그는 정신적 붕괴의 고통과, 또다시 찾아올 위기에 대한 두려움도 썼다.
“더 격렬한 발작이 오면, 나는 다시는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는 요양원이나 감옥의 독방에 들어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또 다른 독서도 많이 했다. 실상 미술비평의 독학 과정을 스스로 수행한 셈이었다. 그녀는 진보적 정치 목적에 예술이 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벨기에 잡지 『라르 모데른(L’Art Moderne)』을 읽고 메모했다. 아일랜드 소설가 조지 무어의 비평서도 읽었고, 그중 적절하다고 여긴 문장을 옮겨 적었다. “비평가의 운명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기억되는 일이다.” 또한 다가올 과업을 위해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 매듯, 그녀는 자신의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인 메리 앤 에번스 — 필명 조지 엘리엇으로 소설을 쓴, 영국의 초기 페미니스트이자 사회비평가 — 의 전기도 읽었다. 그녀는 일기에 에번스를 “어린 시절부터 사랑하고 우러러온 위대하고 용감하며 지적인 여성”이라 묘사했고, “그녀를 떠올리는 일은 언제나 더 나아지려는 동기가 된다”고 적었다.
그녀는 사교적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알던 이들 가운데에는 ‘더 뉴 가이드(The New Guide)’라는 예술 잡지를 창간한 예술가·시인·지식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있었다. 1880년대 말과 1890년대 초의 산업화가 아나키즘 운동과 고조되는 민족주의를 낳자, 그들은 서구 사회의 소용돌이를 해석하고 예술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모색했다. 조의 일기에 따르면, 그녀는 그들의 모임에서 대화에 적극 가담하기보다는 지식인들이 고전 전통의 예술 — 규범을 따르고, 감정보다 관념을, 색보다 선을 중시하는 — 의 문제점을 장황히 논하는 것을 주로 들었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원 미학·미술사 교수 요제프 알베르딩크 타임 같은 비평가들은, 예술가가 사회를 떠받치는 기독교적 이상을 지키고 “자연의 재현”을 “견고하고, 명료하고, 정화된” 방식으로 고양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혼자서 지낸 첫해가 끝날 무렵 — 빈센트의 그림과 말과 함께 살며, 깊이 읽고, 때때로 그런 모임에 몸을 담그던 시간 끝에 — 조는 일종의 계시를 얻었다. 반 고흐의 편지는 예술의 일부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을 푸는 열쇠였다. 편지는 예술과, 비극적이면서 강렬하게 살아낸 삶을 하나의 꾸러미로 결합시켰다. 조는 파리에서 만난 프랑스 인상파들의 관점을 높이 샀을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한다는 규칙을 따르는 발상은 더 이상 진정할 수 없다는 것, 중앙 권위가 부재한 세계에서 예술가는 내면에서 길잡이를 찾아야 한다는 것. 모네와 고갱 등은 그렇게 했고, 결과는 그들의 캔버스에 드러났다. 예술가의 전기를 이 혼합물에 들여오는 일은 같은 방향으로 내딛는 또 하나의 걸음이었다.
편지는 또한 빈센트가 염두에 둔 관객을 가리켰다. 한때 목회를 주관했고 스스로를 낮추기 위해 농민들과 함께 살기도 했던 빈센트는, 식자층을 넘어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에 곧장 닿는 예술을 간절히 원했다. 그는 다른 예술가의 말을 인용해 테오에게 썼다. “내 작업의 어떤 성과도, 평범한 노동자들이 그런 판화를 자신의 방이나 일터에 걸어놓는 것만큼 기쁜 것은 없을 것이다.” 빈센트의 편지와 그림은 조 자신의 오래된 사회정의 신념을 더욱 북돋았다. 소녀 시절, 주일 설교의 영향으로 그녀는 목적 있는 삶을 갈망했다. 테오와 결혼을 받아들이기 직전, 그녀는 벨기에를 방문했고, 함께 지내던 목사의 안내로 인근 탄광 노동자들의 생활 환경을 보았다. 그 경험은 그녀를 뒤흔들었고, 노동자 권리에서 여성 참정권에 이르는 대의에 평생 헌신하는 불씨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빈센트가 말한 그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보았고, 빈센트 역시 자신을 그렇게 여겼음을 알았다. 1891년 어느 폭풍우 치던 밤, 하숙집에 홀로 앉아 고통받는 시동생의 글을 읽고 난 뒤, 그녀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나는 너무도 황량했다 — 그때서야 처음으로, 모두가 그에게서 돌아섰던 때 그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이해했다.”
(1887년의 빈센트 자화상들)
이제 그녀는 빈센트 반 고흐의 대리인으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처음 취한 조치 중 하나는, 친구의 남편이기도 하며 ‘뉴 가이드’ 서클의 선두에 있던 미술비평가 얀 페스에게 접근하는 일이었다. 페스는 아카데믹 아트를 공개적으로 거부했고 개인적 표현을 옹호했다. 그러나 처음에 페스는 빈센트의 작업을 완전히 일축했고, 조의 노력을 깎아내렸다. 그는 나중에 스스로 인정했듯, 처음에는 “몇몇 반 고흐의 날것의 격렬함에 질려 있었고”, 그 그림들을 “거의 천박하다”고 느꼈다. 새로운 것을 지지하던 그조차 이런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은, 빈센트의 캔버스가 첫인상에서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를 보여준다. 또 다른 초기 비평가는 빈센트의 풍경을 “깊이도, 분위기도, 빛도 없으며, 섞이지 않은 색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나란히 놓여 있다”고 했고, 작가가 “근대적이고, 기괴하고, 유치해 보이려는 욕구” 때문에 그림을 그린다고 불평했다.
조는 페스의 반응이 실망스러우리만큼 상투적이라고 느꼈다. 그는 또한 여성의 미술계 진입에 대해 폄하하는 말을 했던 듯하다 — 그녀가 그와 만난 뒤 일기에 “우리는 대부분 남자들이 우리에게 바라듯 그러한 존재다”라고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중요한 비평가이며 새로운 생각에 열려 있다는 점을 알아, 설득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녀는 일기에 적었다. “그가 좋아하게 만들 때까지 쉬지 않겠다.”
그녀는 빈센트의 편지들이 가득 든 봉투를 페스에게 건네며, 자신이 그랬듯 그림을 비추는 열쇠로 삼으라고 권했다. 비평가처럼 굴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그에게 쏟아, 새로운 양식의 예술을 인지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느낀 사고의 전환으로 그를 이끌고자 했다. 그녀는 페스에게 설명했다. 남편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 형제의 서신을 읽기 시작했지만, 그러다 빈센트가 자기 내부로 파고들었다고. “나는 편지를 읽었습니다 — 머리로만 읽지 않았습니다 — 온 영혼을 담아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갔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썼다. “나는 그것들을 읽고 또 읽어, 빈센트의 전체상이 내 앞에 분명해질 때까지 읽었습니다.” 그녀는 “빈센트가 내 삶에 미친 영향을 당신도 느끼게 해주고 싶다… 나는 평정을 찾았다”고 덧붙였다.
때도 좋았다. 네덜란드 역사학자 요한 회이징가는 나중에 “1890년 무렵 예술과 문학에서 감지되기 시작한 정신의 변화”를, “사회주의와 신비주의라는 두 극을 중심으로 응결된 사상의 소용돌이”로 규정했다. 조는 빈센트의 예술이 그 둘을 가로지른다는 것을 보았다. 얀 페스는 인상주의에서 새로운 무엇으로의 전환 — 개인주의를 사회적·영적 물음에 적용하는 예술 — 을 소화하려 애쓰던 이들 중 하나였다. 그는 조의 말을 듣고 마음을 돌렸다. 그는 그 예술가에 대한 초기 찬사 중 하나를 쓰며, 이제 “위대한 겸허가 지닌 놀라운 천시(洞視)”를 보게 되었다고 했고, 빈센트를 “사물의 거친 뿌리를 찾는” 예술가로 규정했다. 특히, 시동생의 삶을 그의 예술에 접속시킨 조의 시도가 페스에게 먹힌 것으로 보인다. “한번 그의 아름다움을 파악하고 나니, 나는 그 사람 전체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그 비평가는 썼다.
비슷한 일이 영향력 있는 예술가 리하르트 롤란트 홀스트에게 빈센트 홍보를 도와 달라 요청했을 때도 일어났다. 그녀가 끈질기게 그를 성가시게 했음이 분명한데, 롤란트 홀스트가 친구에게 “반 고흐 부인은 매력적이지만,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광적으로 칭송할 때는 짜증난다”고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도 마음을 돌렸고, 1892년 12월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빈센트의 초기 개인전 가운데 하나를 도왔다.
페스와 롤란트 홀스트는 처음에는 요한나의 아마추어적 열정에 불평을 늘어놓았다. 두 사람 모두, 예술가의 삶을 염두에 두고 그림을 보는 태도를 비전문적이라고 여겼다. 그런 접근은, 롤란트 홀스트가 허풍스럽게 말하길, “순수한 미술비평적 성격이 아니다.” 요한나가 자신의 비전문가 정체성이나 여성이라는 위치를 이 권력자들 앞에서 얼마나 의식적으로 활용했는지는 일기에서 분명치 않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녀는 그들의 경계를 풀어, 자신과 함께 그냥 보고 느끼게 만들었다. 암스테르담 첫 전시의 도록 표지 그림을 부탁했을 때, 롤란트 홀스트는 검은 바탕에 시들어가는 해바라기를 그리고, 아래에는 ‘Vincent’라는 글자를, 해바라기 위에는 후광을 얹은 석판화를 만들었다. 일종의 미학적 시성(諡聖)이었다. 이어 다른 전시의 주최자들은 빈센트의 초상 위에 가시면류관을 걸었다. 비평가들은 거듭, 처음에는 빈센트의 삶과 작업을 하나로 보는 관점을 거부하다가 결국 항복했다. 그들이 그림을 볼 때, 그들은 예술만이 아니라 빈센트를 보았다 — 노동하고 고통받고, 귀를 자르고, 창조 행위를 향해 발톱을 세운 빈센트를. 예술과 예술가가 융합되었다. 그들은 요한나 반 고흐-봉거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을 보았다.
(1892년 암스테르담 첫 전시 도록 표지)
요한나는 초반 비평가 설득의 성과 위에서 끈질기게 일했다. 물론 그녀의 삶에는 다른 일들도 많았다. 아들을 키웠다. 화가 이자크 이스라엘과 사랑에 빠졌지만, 그가 결혼 의사가 없음을 깨닫자 관계를 정리했다. 결국 또 다른 네덜란드 화가 요한 코언 호스할크와 재혼했다. 네덜란드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했고, 노동과 여성의 권리에 헌신하는 단체의 공동 설립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활동은 시동생의 사후 경력을 관리하는 과업을 중심으로 촘촘히 짜여 있었다. “그녀가 생각을 소리 내어 정리하는 모습이 보인다”고 한스 루이턴은 내게 말했다. 초기에는 상상 가능한 한도 내에서 가장 소박했다. “암스테르담의 중요한 화랑을 하나 고르고 그곳으로 간다. 서른 살 여자, 곁에는 어린 아들, 겨드랑이에는 그림 한 점. 그리고 유럽 전역의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다.”
언어 교사로서의 훈련 —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 이 활동 반경을 넓히는 데 특히 요긴했다. 베를린, 파리, 코펜하겐의 화랑과 미술관들에서 관심이 오기 시작했다. 1895년, 서른셋의 요한나가 보낸 작품 가운데 파리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반 고흐 작품 20점을 전시에 포함시켰다. 빈센트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정으로 충만한 접근은 시대를 앞섰지만, 시간이 따라잡고 있었다. 앤트워프에서는 그를 개척자로 여긴 젊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과 함께 전시하려 반 고흐 작품 여러 점을 빌려 달라고 요청했다.
조는 장사의 요령도 익혔다 — 예컨대, 최고의 작품은 손에 쥐고 있으되, 판매작 옆에 ‘대여(온 로운, on loan)’로 함께 걸어두는 방식이다. “벽에 최고작 몇 점만 올려도, 바로 옆 작품을 사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자극된다는 걸 그녀는 알았다”고 루이턴은 말한다. “그녀는 유럽 전역에서, 100회가 넘는 전시에서 그렇게 했다.” 미술사가 마틴 베일리(『Starry Night: Van Gogh at the Asylum』 등 저자)는 그녀의 성공 비결을 “작품을 통제된 방식으로 판매하며, 대중에게 반 고흐를 점진적으로 소개한 것”이라고 요약한다. 이를테면 1908년 파리 전시에선 작품 100점을 보내면서도 그중 4분의 1은 비매품이라 못 박았다. 화상은 재고(再考)를 간청했지만 그녀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스스로를 의심하던 평소의 경향을 거슬러, 그녀는 장군이 영토를 점령하듯 치밀하고 단호하게 전진했다.
1905년, 그녀는 암스테르담의 현대미술 중심지인 스테델릭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를 열었다. 이제 ‘큰 선언’을 할 때라고 판단한 것이다. 시동생의 예술을 홍보해온 성공이 그녀의 자신감을 끌어올렸다. 점점 더 많은 미술계 인사들이 그녀의 빈센트 평가에 동의하자, 그녀는 젊은 날의 머뭇거림을 벗어던졌다. 전시 실무를 타인에게 맡기지 않고 전부 직접 했다. 전시실을 임대하고, 포스터를 인쇄하고, 초청할 중요 인사 명단을 모으고, 심지어 직원들용 나비넥타이까지 샀다. 이제 15살이 된 아들 빈센트는 초대장을 손글씨로 썼다. 그 결과 탄생한 전시는 — 지금까지도 — 사상 최대 규모의 반 고흐 전시로, 총 484점이 걸렸다.
(1905년 암스테르담 스테델릭 전시 포스터. 당시까지 최대 회고전, 480점 이상 전시.)
유럽 각지에서 비평가들이 몰려왔다. 예술가의 비전을 대중 언어로 번역하는 고된 작업은 이때쯤이면 거의 끝난 상태였다. 과업을 부여받고(남편의 유언) 예술과 예술가를 하나의 패키지로 ‘판매’하겠다는 깨달음을 얻은 지 14년, 미술계는 마치 빈센트를 ‘직접 아는’ 듯했다. 그가 평생토록 미와 의미를 찾고 전하려 애쓴 비극적 투쟁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이 전시는 그를 근대 미술의 거장으로 굳혔다. 전시 이후 몇 달 사이, 그의 작품 가격은 두세 배로 뛰었다.
단, 주의할 지점이 하나 있었다. 오늘날 그의 작업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축에 속하는 남프랑스 요양원 시기와 그 이후의 후기 작품이 일부에게는 불편함을 주었다. 초기의 몇몇 비평가에게 그 그림들은 명백히 ‘정신질환의 산물’처럼 보였다. 뽕나무 한 그루, 사이프러스 숲, 작열하는 태양 아래 밀밭에 쏟아부은 빈센트의 억눌림 없는 강도는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한 평론가는 암스테르담 전시에 대해 “진정 위대한 작품들에 내재하는 고유한 평정이 결여되어 있다. 그는 영원히 폭풍일 것이다”라고 적었다.
특히 한 작품, 오늘날 가장 상징적 작품으로 꼽히는 「별이 빛나는 밤」은 표적이 되었다. 그 왜곡이 주는 불편함은 생전에 빈센트가 생트 레미에서 그림을 테오와 조에게 보냈을 때부터 시작됐다. 조 역시 처음엔 남편의 불편함을 어느 정도 공유했을지 모른다. 그녀는 초기 기획 전시에 이 작품을 포함하지 않았고, 결국 한때는 이를 팔기도 했다. 평생 대체로 ‘최고작’은 붙잡고 있던 그녀였지만, 암스테르담 대전에는 소장자에게 대여를 받아 걸었다. 작품의 강도를 그녀도 받아들였음을 시사한다.
한 평론가는 — 전시 전체를 두고 “미술애호가보다 심리학 관심자에게 더 어울리는 추문”이라며 펄쩍 뛴 — 바로 그 「별이 빛나는 밤」을 공격하며, 화면의 별들을 네덜란드가 새해 전날 먹는 튀김빵 ‘올리볼렌(oliebollen)’에 빗댔다. 그러나 이런 비난은 오히려 작품에 더 많은 주의를 불러모았고, 결국 예술을 ‘작가의 정신과 삶을 들여다보는 창’으로 보는 관점에 정당성을 보태 주었다. 이는 빈센트의 보다 양식화된 작업에 대한 조의 재평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녀는 다음 해에 이 작품을 다시 사들였다. 그리고 이 작품은 반 고흐 작품 중 최초의 뉴욕 현대 미술관 컬렉션이 된다.
(1914년, 벨기에 안트베르펜 전시 중인 빈센트의 작품들)
2020년 초, 미술사가 에밀리 고던커가 반 고흐 미술관 관장으로 부임했을 때, 직원들은 한스 루이턴의 요한나 전기 한 권을 건넸다. 그녀의 전공은 17세기 네덜란드·플랑드르 미술로, 2008년부터 헤이그의 마우리츠하위스 관장을 지냈다. 반 고흐를 빨리 따라잡아야 했기에 곧장 책을 읽었다.
고던커는 여성으로서 요한나의 이야기와 자신이 맞닿아 있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나는 요한나만큼 개척자는 아니지만, 그녀가 겪은 난점들엔 공감한다. 이를테면, 내가 결정을 내리면 때로 이런 말을 듣는다. ‘당신은 여자니까 다르게 한다.’ 우리는 생각으로 평가받고 싶은데, 때로는 상자에 갇힌다. 그녀가 겪은 건 훨씬 더 심했다. ‘여자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그녀는 요한나의 ‘셀프-튜튼(독학) 아티스트 마케팅’에 놀랐다고 했다. “가면서 만들어야 했다. 관련 배경이 전무했다. 그러나 그녀는 솔직하고 단도직입적이었고, 동시에 매우 불확실해했다. 그 조합은 의외로 생산적이었다.” 고던커는 요한나의 깨달음이 단순한 ‘직감’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그 직감이 ‘작품과 사람을 하나의 패키지’로 만들게 했다. 물론 편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편지를 독보적 판매 포인트로 삼았고, 그 패키지를 평론가들에게 ‘판매’했으며, 그들은 샀다.”
고던커는 요한나의 방식이 시대와 맞아떨어졌기에 작동했다고 강조한다. “모든 것이 한 점으로 모이던 순간이었다. 예술과 문학에서 낭만주의로의 회귀가 있었고, 사람들은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성취는 오늘날까지 ‘예술가란 무엇을 해야 하는가 — 필요하면 예술을 위해 고통받는 개인’이라는 우리의 이미지를 규정한다.”
오늘날에는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예술가를 늘 그렇게 보았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미술사를 공부할 때, 다락방의 굶주린 예술가 이미지는 지우라고 배웠다. 초기 근대에는 맞지 않는다. 렘브란트 같은 이는 도제들을 거느린 거장이고, 부유한 고객이 많았다. 어떤 의미에서 요한나는 오늘의 이미지를 빚는 데 일조했다.”
요한나는 자신의 일을 잇는 ‘가족의 유산’도 가동시켰다. 고던커는 내게 요한나의 증손자 빈센트 빌럼 반 고흐를 연결해 주었다. 예순일곱의 그는 편안한 우아함을 풍겼다. 그는 할아버지 빈센트(요한나와 테오의 아들)에 대한 애정을 담아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과 할아버지가 모두 가문의 유산(동시에 요한나의 집념)에서 한때 거리를 두려 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엔지니어가 됨으로써, 그는 변호사가 되고(그리고 가운데 이름을 쓰기로 하여) 그랬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 모두 제자리로 돌아와, 요한나가 시작한 일의 관리인 역할을 받아들였다.
증손자는, 할아버지가 살던 라런(Laren)의 집에서 여름을 보내던 기억을 들려주었다. 요한나 사후, ‘엔지니어’(가문에서는 다른 ‘빈센트’들과 구별하려 아들을 이렇게 부른다)는 그 집을 컬렉션의 임시 보금자리로 삼았다. — 요한나가 생전에 판매를 병행하면서도 끝내 지켜 남겨 아들에게 유증한 반 고흐 원화 220점과 수백 점의 드로잉.
그는 어린 시절 많은 방학을 그 집에서 보냈다고 했다. 거실에는 「해바라기」 한 점(빈센트가 같은 주제로 그린 다섯 주요 버전 중 하나)이 걸려 있었고, 복도 끝에는 꽃병에 꽂힌 아몬드꽃 가지의 작은 그림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책 더미에 기대 세워 둔 아를 풍경을 가장 아꼈다. 하지만 전시된 것은 컬렉션의 일부에 불과했다. “윗층 침실에 드나들 수 있는 큰 벽장이 하나 있었어요.” 그곳에 모든 작품이 있었다. 요한나가 팔지 않았던 전부 — 오늘날 가치로는 수십억 달러에 이를 수장품. “MoMA나 파리 오랑주리 같은 전시를 준비할 때면 내가 도왔던 기억이 납니다. 꽃 그림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그 벽장을 함께 훑었죠. 내가 하나를 집어 들고 ‘이거요, 할아버지?’라고 묻곤 했습니다.” 지금은 반 고흐 미술관 이사회 자문인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죠.”
아들은 그 작품들을 영원히 벽장에 두어 둘 생각이 없었다. 1959년 그는 네덜란드 정부와 협상에 들어가 상설 보관처를 마련했다. 요한나가 지켜온 모든 작품은 빈센트반고흐재단(Vincent van Gogh Foundation)으로 이관되었다. 재단 이사회에는 요한나와 테오의 외아들의 생존 후손 3명이 앉고, 네 번째 이사는 네덜란드 문화부 소속 공무원이다. 정부는 작품을 수용할 반고흐미술관을 지어 대중 공개의 책무를 맡았다. 요한나의 증손자는 약간의 자부심을 담아 내게 말했다. “이제 우리 집안에는 빈센트의 회화나 드로잉이 한 점도 없습니다. 요한나, 그리고 그의 아들 덕분에 그건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 되었으니까요.”
그리하여 미술관 자체가, 빈센트의 예술을 민주화하려는 요한나 반 고흐-봉거의 노력에서 나온 또 하나의 산물이 되었다. 숫자만 보아도 성과는 압도적이었다. 1973년 본관이 문을 열 당시 연 6만 명 방문을 예상했으나, 팬데믹 이전인 2019년에는 2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의 캔버스 앞에서 잠시라도 머물기 위해 몰려들었다.
1915년, 암스테르담에서의 빈센트 빌렘 반 고흐(요한나의 아들)와 그의 아내 요지나 반 고흐-위바우트.
1916년, 쉰네 살의 요한나는 빈센트를 세상에 알리는 자신의 캠페인에서 가장 벅찬 도전에 직면했다. 유럽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이고 금욕적 성향의 미국 사회는 그 예술가를 이해하는 데 뒤처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유럽—곧 자신의 전 세계—을 떠나 뉴욕으로 이주해 그 상황을 바꾸고자 했다. 이후 거의 3년을 미국에서 지내며, 한동안 어퍼웨스트사이드와 퀸스에 살았고, 인맥을 넓히고 예술가의 비전을 설명하는 한편, 남는 시간에는 빈센트의 편지를 영어로 번역했다.
초반은 험했다. 그녀는 미술 프로모터 뉴먼 에머슨 몬트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한탄했다. “미국의 미술 취향이 충분히 발달해 반 고흐를 온전히 이해할 것이라 짐작했는데, 그 판단이 꽤나 빗나갔습니다.” 그러나 변화가 왔다. 그녀는 마침내 몬트로스의 5번가 화랑에서 전시를 성사시켰다. 이어 곧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 회화’전을 열었고, 요한나는 거기에 캔버스 4점을 제공했다.
비슷한 시기에, 컬럼비아대의 한 교수가 공개 강연에서—미국 취향에는 요란하고 만화적으로 보이던—그 작품들을 해석하려 했다. 뉴욕타임스는 그 강연을 보도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그 예술가의 과장된 색채가 “원초적 상징 언어”를 두드린다는 것이다.
그동안에도 요한나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들—그 속에서 빈센트는 낭만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인물로 드러났다—이 미국과 그 너머에 그의 영혼을 열어줄 것이라 믿었다. 편지를 영어로 출판하는 일은 그녀의 마지막 큰 목표였다.
시간과의 경주가 되었다. 그녀의 건강은 악화되고 있었고—파킨슨병을 앓았다—계약한 출판사 알프레드 크노프는 축약판만 내고 싶어 했지만, 그녀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유럽으로 돌아와 암스테르담의 위풍 있는 코닝힌네베흐 거리의 널찍한 아파트와 라런의 시골집에서 말년을 보냈다. 아들 빈센트와 며느리 요지나는 가까이로 이사했고, 요한나는 매일 손주들과 보내는 한 시간에서 기쁨을 찾았다. 그 밖의 시간에는 놀라울 정도로 자신의 소명에 몰두했다. 캔버스를 잇달아 전시장으로 보내고, 출판사와 줄다리기를 하며, 병의 통증과 다른 증상을 견뎌냈다.
오히려 삶의 끝에 다가갈수록 집념은 더 커진 듯했다. 반 고흐의 홍보에 긴밀히 협력했던 독일 딜러 파울 카시러와는 적은 돈 문제로 다투다 우정이 깨졌다. 1921년, 반 고흐 형제를 낭만화한 소설이 독일어로 나오자, 사실과 다른 부분들에 깊이 상심했다. 파리, 프랑크푸르트, 런던, 클리블랜드, 디트로이트 등지에서 전시 요청은 숨 가쁘게 이어졌고, 그녀는 더 이상 힘이 닿지 않을 때까지 촘촘히 관여했다. 1925년, 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어판 편지집의 첫 출간은 두 해 뒤인 1927년에 이루어졌다. 런던의 컨스터블 & 컴퍼니와 미국의 하우턴 미플린이 냈고, 요한나의 서문이 실렸다. 그녀는 그 글에서 ‘고통받는 예술가’의 신화를 더 단단히 하며 남편의 역할도 부각했다. “그를 이해하고 지지한 이는 언제나 테오 한 사람뿐이었다.” 7년 뒤 어빙 스톤이 형제 관계를 소재로 한 베스트셀러 소설 『불멸의 연인(Lust for Life)』을, 편지에 크게 의존해 펴냈다. 이 작품은 1956년 커크 더글러스 주연 영화의 원작이 되었다. 그 무렵이면, 신화는 이미 뿌리내렸다. 파블로 피카소조차 반 고흐의 삶—“본질적으로 고독하고 비극적”—을 “우리 시대의 전형”이라 불렀다.
그리고 요한나가 시동생과 남편에게 바친, 어쩌면 가장 놀라운 헌사가 하나 더 있었다. 말년에, 편지를 영어로 옮기던 그녀는 네덜란드 묘지에 묻혀 있던 테오의 유해를 파내어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이장해 빈센트 곁에 눕혔다. 암스테르담 전시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장군처럼 작전을 수행하며, 맞춤형 쌍둥이 묘비를 주문하는 데 이르기까지 모든 세부를 감독했다. 한스 루이턴은 그것이 그녀의 일편단심을 드러내는 놀라운 장면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둘을 영원히 나란히 두고 싶어 했다.”
아내가 남편의 유해를 파내는 장면은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시선을 그녀 삶의 핵심 물음으로 되돌린다.
무엇이 그녀를 끝내 이 과업에 붙들어 매어 평생을 관통하게 했는가? 물론 빈센트의 천재성에 대한 신념과, 테오의 뜻을 기리고픈 마음은 강력했다. 루이턴은, 그녀가 반 고흐의 예술을 알리는 일을 통해 자신의 사회주의적 신념을 함께 전진시키고 있다고 믿었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사람을 움직이는 동기는 때로 더 작고 단순하다. 테오와 함께한 21개월은 그녀 인생에서 가장 농밀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파리, 기쁨, 색과 문화의 혁명을 경험했다. 테오의 도움으로 그녀는 조심스럽고 관습적인 세계를 뛰어넘어 열정에 자신을 내맡겼다. 오늘, 그녀가 차마 내놓지 못한 그림들이 모여 있는 그 미술관을 거닐다 보면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 빈센트 반 고흐에게 자신을 완전히 바치고, 그를 세상에 ‘판매’함으로써, 그녀는 자기 청춘의 그 순간을 살아 있게 했고, 우리 모두가 그 순간을 느끼게 했다는 것이다..
(1909년 이후 암스테르담의 책상 앞 요한나 반 고흐-봉거. 왼쪽에 빈센트의 「정직의 꽃병」(1884)과 앙리 팡탱-라투르의 「꽃들」이, 그 위로 빈센트의 「황혼의 풍경」(1890)이 걸려 있다.)
정정 공지 — 2021년 4월 16일: 이전 판에서 한 예술가의 성을 잘못 표기했다. 정확한 이름은 리하르트 롤란트 홀스트이며, 리하르트 롤란트-호르스트가 아니다.
정정 공지 — 2021년 4월 23일: 이전 판에서 빈센트 빌렘 반 고흐의 반 고흐 미술관 내 직책을 잘못 표기했다. 그는 이사회 ‘자문’이며, 이사회 ‘위원’이 아니다.
우리는 오류를 알게 되면 정정한다. 오류를 발견하면 nytnews@nytimes.com 으로 알려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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