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0. 13. 12:54ㆍ디자인/디자인·예술이야기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神奈川沖浪裏
The Great Wave off Kanagawa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
1831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 자연의 맹위에 속수무책인 사람들, 그리고 그 너머에 엄숙히 자리한 후지산. 보는 이는 마치 자신도 바다 위에 떠서 거대한 파도에 휘말려드는 듯한 감각을 갖게 된다. 원근의 대비가 뚜렷한 이 작품은 고흐가 극찬했고, 드뷔시에게 교향곡 ‘바다’를 구상하게 하는 등 예술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 후지산에 오르다, 야마나시 전시 소개글에서 발췌. 2025.9. 국립청주박물관
에도시대 대표 풍속화 화가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 Katsushika Hokusai. 1760.10.31. ~ 1849.5.10.). 그가 제작한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는 서양인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동양화다. 그의 작품은 반 고흐, 드가, 마네, 모네, 르누아르, 로트렉, 루소, 에곤 실레, 클림트 등 인상파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그림에 대해 받은 인상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했다.
“...호쿠사이도 같아. 하지만 그는 선과 드로잉으로 그것을 표현해. 네 편지를 읽으며 이렇게 느끼게 된다. ‘이 파도들은 발톱이고, 배는 그 발톱에 잡혀 있다.’ 나도 그게 느껴져. 색이나 형태를 완벽히 재현하려 했다면 이런 감정을 만들 수 없었을 거야.”
(1888.9.8. 반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 인용)
파리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주목받게 되면서 일본 도자기가 유럽에서 많이 팔렸는데 도자기가 깨지지 않게 쌌던 포장지, 판화의 강렬한 표현이 야심 찬 젊은 화가들의 눈에 띄게 된다. 프랑스 화가 브라크몽은 친구들에게 그림을 공유했다. 친구들 중 마네, 드가와 같은 예술가들이 있었고 이들이 색, 형태, 구성 등 강렬한 표현을 따라 하면서 일본풍(자포니즘 Japonisme) 열풍이 일어난다.
정작 일본에서는 전단지 같이 하찮게 다뤄졌던 그 그림은 가츠시카 호쿠사이 등의 화가들이 그렸던 우키요에(풍속화 浮世繪)였다. 우키요에는 인상주의가 불타오르게 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고, 근대회화의 상징적 연결고리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가츠시카 호쿠사이는 ‘만화’라는 말을 만들어 냈고 많은 만화의 원형이라 할 만한 작품들을 통해 일본 만화의 시조가 되었다. 촉수물, 요괴, 춘화 등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많은 판화를 만들었고 인기가 많아 사본이 수백 장씩 팔렸다.
판화임에도 최초 원본 값만 받고 팔았던 탓에 중간상인만 돈을 벌었다는 지적이 있다. 그는 평생 매우 가난한 삶을 살았다. 저작권 계약에 대한 이해 부족도 있었겠지만, 당시 화가들의 사회적 입지가 얼마나 열악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중간상인에게 피해를 입은 가난한 창작가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고 말았다.
출처 : 다시 디자인 중에서 발췌. 윤성원. 2021.5.20.
참고한 글 :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 속으로 들어간 우키요에. 조정육. 주간조선. 2011.10.13.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위키피디아.
가츠시카 호쿠사이 (1760 ~ 1849)
가쓰시카 호쿠사이 는 일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이자 일본 목판화의 중요한 거장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호쿠사이는 독창적이고 역동적인 구도로 유명하지만, 가장 큰 강점은 뛰어난 작화 실력이었다. 채색가로서 그는 대담하면서도 섬세한 표현력을 지녔으며, 뛰어난 드로잉과 눈부신 색채의 절묘한 조화가 특징이다.
일본 예술가들이 이름을 바꾸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호쿠사이는 생전에 최소 30개 이상의 다른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당시 다른 어떤 예술가보다도 많은 수이다. 그는 1779년에 첫 번째 스승 슌쇼가 지어준 '슌로'라는 이름으로 연작을 발표했다. 말년에는 스스로를 '가쿄로진만지(賀敬老人望子)'(예술에 미친 노인)라고 불렀다. 그의 이름은 다양한 양식과 제작 시기를 나타내는 데 자주 사용되었다. 이사도 약 90회 이상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나치게 잦은 이사(약 93회)와 호(號) 변경(약 30여 회)로 볼 때 그는 안정을 추구하는 대부분의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을 가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생활상의 불안정 정도가 아니라, 변화와 도전에 대한 집착적 태도, ‘자기 갱신 강박’의 징후로 읽을 수 있다. 한 글귀에서 그는 “50세 이후의 내가 아직 만족할 수 없다. 90세가 되면 그 비밀을 꿰뚫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스로 끊임없이 갱신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느낄 수 있다.
실제 그의 대표작 후지산 36경은 70세가 넘어서 만들어졌고 89세 삶을 다하는 순간까지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했다. 88세에 “천년 더 살 수 있다면 신의 세계를 그릴 수 있을 텐데(百年生きば神の境に達せん)”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도쿄 스미다호쿠사이미술관 보유 유작 중 상당수가 사망 직전(1848~1849년경)의 미완성 드로잉이다.
그는 '만화'라는 용어를 사용한 최초의 예술가다. 1811년, 51세의 나이에 호쿠사이는 제자들과 다른 야심 찬 예술가들이 모방할 수 있도록 재미있는 그림들을 담은 호쿠사이 만화를 제작했다. 이 만화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만화라는 용어가 최초로 사용된 기록 중 하나이지만, 미학적으로는 현대의 만화와 상당히 다르다.
호쿠사이는 작품 활동에 몰두했고, 빠른 속도로 작업했다고 한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밤늦게까지 작업을 이어갔다. 그는 회화, 스케치, 목판화, 그림책, 심지어 야한 에로틱 일러스트까지 포함하여 3만 점의 작품을 제작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들과 그의 작업실의 대부분은 1839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출처 : 가츠시카 호쿠사이에 대해 당신이 몰랐던 10가지 중에서 발췌. 구글 아트앤컬쳐
호쿠사이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작가가 70세가 넘었을 때 제작한 "후지산 36경" 연작이다. 제목과는 달리 실제로는 다양한 계절과 기상 조건에서의 후지산을 보여주는 46장의 판화이다. 당초 36점으로 발행되었지만, 그림이 인기를 얻게되자 이후 10점이 추가 제작(위 그림 중 오른쪽의 10개)되었다. 초판은 그가 70세쯤이던 1823년 무렵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약 74세 무렵(1831년부터 1835년으로 추정)에 걸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예술적 표현의 독창성과 후지산을 바라보는 놀랍도록 다양한 관점은 호쿠사이의 창의성을 증명한다. 그중 그의 대표작 '가나가와 앞바다의 높은 파도'가 포함되어 있다.
출처 : '후지산 36경'에서 발췌.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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