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 18. 23:40ㆍ서비스디자인/정책디자인
공공조달 가치기반 발주 전환
최저가낙찰에서 디자인·혁신 품질 기반 발주로
핵심 문제
공공환경과 공공서비스는 국민 모두가 사용하는 기반 인프라다. 한 번 만들어지면 한 세대 동안 오래도록 사용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가장 싼 가격으로 만들고 있다. 비용을 최소화하는 데 집중하다 보니 디자인 품질과 기술적 완성도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가격이 사실상 결정권을 갖는 구조가 유지되는 한, 공공환경과 공공서비스는 저품질에 머물 수밖에 없다.
* 이 블로그의 내용은 필자의 개인적 관점/제안이며, 한국디자인진흥원을 포함한 어떠한 기관의 입장도 대변하지 않습니다.
1. 현황과 문제점
가격 중심 조달 — 공공품질 저하의 구조적 원인
한국 공공조달의 기본 메커니즘은 가격 경쟁이다. 일정 규모 이하 사업에서는 적격심사를 통과한 업체 중 최저가에 가까운 가격을 써낸 곳이 사업을 가져간다. 예산 절감이라는 논리는 명확하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한가.
규모는 결코 작지 않다. 조달청 공공조달통계연보에 따르면 2023년 공공조달 전체 계약규모는 208조 6,000억 원으로 통계 작성 이래 역대 최고치였고, 명목 GDP의 9.3%를 차지했다. 이 가운데 지방자치단체가 43.5%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업 유형으로는 공사·물품·용역 순이다. 이만한 규모의 '구매 방식'을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곧 산업 전체의 품질 기준을 결정한다.
문제의 핵심은 가격 경쟁이 품질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예산 절감을 최우선으로 삼는 발주 방식으로는 공공환경도, 공공 디지털 서비스도 품질이 올라가기 어렵다. 특히 주목할 논거가 있다. 디지털 공공서비스는 한 번 잘 만들어 두면 재사용·복제 비용이 0에 가깝게 수렴한다. 처음부터 최고 품질로 개발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가장 합리적이라는 뜻이다. 최저가로 조악하게 만든 시스템을 계속 수리·개선하는 누적 비용이, 처음부터 제대로 만든 비용보다 더 클 수 있다.
가격 중심 조달이 만드는 세 가지 악순환
품질 하락. 낮은 가격으로 수주하면 이익을 내기 위해 품질을 낮출 수밖에 없다. 재료비 절감, 인력 감축, 하도급 중복, 사용자 테스트 생략. 품질을 높이려는 노력이 오히려 손해가 되는 구조다.
혁신 배제. 혁신적 접근은 대개 초기 비용이 높다. 사용자 리서치, 프로토타이핑, 파일럿 테스트는 시간과 비용이 든다. 가격이 결정권을 갖는 구조에서는 이 과정이 먼저 생략된다. 혁신이 구조적으로 배제되는 것이다.
소규모 전문기업 배제. 작은 디자인 회사나 사회혁신 조직은 실적·서류 경쟁력이 부족하다. 가격 경쟁에서는 대형 하도급 구조를 갖춘 기업이 유리하다. 진짜 전문성을 가진 소규모 기관이 시장에서 밀려난다.
공공조달은 '전략 도구'가 될 수 있다
세계적으로 공공조달은 단순 구매를 넘어 정책 목표를 달성하는 지렛대로 재인식되고 있다. EU에서 공공조달은 역내 GDP의 약 14%(연 약 2조 유로)에 이르며, 그중 약 45%를 지방·지역 기관이 집행한다. OECD는 공공조달이 "가장 싼 것을 사는 일 이상을 할 수 있으며, 혁신과 경쟁력을 자극하고 공공 지출을 전략 목표 달성에 활용하는 힘을 가진다"고 강조한다. 정부가 어떤 품질 기준으로 구매하느냐가 산업 전체의 방향을 바꾼다는 것이다.
2. 국내외 사례
🇪🇺 EU — 10년 만의 공공조달 대개혁(2026)
EU는 2014년 이후 한 번도 근본 개정되지 않은 공공조달 지침을 10여 년 만에 전면 손본다. 유럽위원회는 2026년 작업계획에 '공공조달법(Public Procurement Act)'을 포함했고, 입법안은 2026년 2분기 제출이 예정돼 있다. 방향은 분명하다 — 규칙 단순화, 혁신조달 확대, 지속가능성·가치 기반 평가 강화다. 2026년 3월 유럽지역위원회(CoR)는 "조달 개혁은 규칙을 단순화하고 시민·혁신·지속가능성을 최우선에 놓아야 한다"며 결과 중심·가치 기반 조달로의 전환을 공식 촉구했다. 가격이 아니라 '무엇을 달성하는가'를 평가의 중심에 두려는 흐름이다.
🇬🇧 영국 — SBRI에서 'Contracts for Innovation'으로
영국은 2005년부터 운영해 온 SBRI(Small Business Research Initiative)를 2024년 5월 'Contracts for Innovation(혁신계약)'으로 명칭을 바꾸며 제도를 재정비했다. 핵심 구조는 그대로다. 기업이 가격을 낮춰 수주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공기관이 풀어야 할 과제를 먼저 제시하면 기업이 경쟁적으로 해법을 개발하고, 정부가 그 효과를 검증한 뒤 단계적으로 계약을 진행한다. R&D 비용을 100% 지원하고 1·2단계로 나눠 시제품을 검증하는 '선(先)개발·후(後)도입' 방식이다. 명칭 변경은 이 제도가 소기업만이 아니라 스타트업·대학·연구기관·비영리 등 모든 규모의 조직에 열려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혁신적 해법이 시장에 없을 때, 조달을 통해 그 해법을 '만들어 내는' 통로다. 영국은 또한 2023년 제정한 조달법(Procurement Act 2023)을 2025년 발효시켜, 12개월 앞을 내다보는 발주 예고(pipeline notice)와 유연한 경쟁 절차를 기본값으로 도입했다.
🇫🇷 프랑스 — 설계공모와 제안 보상금의 법제화
프랑스는 일정 규모 이상의 공공 건축·설계에 설계공모(concours)를 의무화하고, 공모에 참여한 탈락자에게도 제안 보상금을 지급한다. 경쟁에 참여한 기업의 노력에 최소한의 비용을 보전함으로써, 질 높은 제안을 유도하고 소규모 전문기업의 참여 부담을 낮춘다. '좋은 제안을 받으려면 제안을 만드는 비용을 인정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도로 못 박은 사례다.
🇩🇰🇸🇪 북유럽 — 평가 기준에서 가격을 끌어내리다
스웨덴은 공공디자인 발주에서 가격 단독 경쟁 대신 디자인의 질·공공성·지속가능성을 종합 평가하는 방식을 운영해 완성도와 사회적 가치를 함께 끌어올린다. 덴마크는 공공혁신랩(과거 MindLab의 전통을 잇는 흐름)에서 보듯, 제안·기획 단계에 시민 인터뷰와 공동 설계를 사전 요건으로 넣어 '사용자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참여시켰는가'를 평가 기준으로 삼아 왔다. 공통점은 분명하다 — 평가표에서 가격의 비중을 의도적으로 낮추고, 그 자리에 품질과 사용자 가치를 채워 넣었다는 것이다.
🇰🇷 한국 — 이미 시작된 제도, 그러나 디자인 분야는 사각지대
한국에도 가격 일변도를 보완하는 장치가 이미 있다. 300억 원 이상 대형 공사에 적용되는 종합심사낙찰제는 가격과 함께 공사수행능력·사회적 책임을 평가한다. 혁신조달 제도는 공공기관이 필요를 먼저 제기하고(수요자제안형) 그에 맞는 혁신제품을 지정·시범구매하며, 구매 담당자를 '구매면책'으로 보호해 새로운 시도의 위험 부담을 덜어 준다. 혁신제품 지정 평가에서는 혁신성보다 공공성을 먼저 보는 2단계 평가도 도입됐다. 문제는 이런 가치·품질 기반 장치가 물품·기술제품 중심으로 작동하고, 디자인·서비스디자인·공공디자인처럼 '과정과 사용자 이해'가 핵심인 영역에는 잘 닿지 않는다는 점이다. 디자인 분야 발주는 여전히 가격과 정량 실적 중심에 머무는 경우가 많고, 심의 기준의 불명확성, 가격 경쟁으로 인한 품질 저하, 공공성·지속가능성 훼손이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지적된다.
3. 제안
법
국가계약법 개정 — 디자인·혁신 분야 가격 비중 제한: 디자인·서비스디자인·정책디자인·공공디자인·사회혁신 분야 공공계약에서 가격이 사실상 결정권을 갖지 않도록, 기술점수와 가격점수의 비율을 최소 80:20 수준으로 규정한다. 이미 종합심사낙찰제가 대형 공사에서 작동하는 만큼, 그 원리를 디자인 분야로 확장하는 것이다.
제안 보상금 제도 법제화: 복수 기업이 참여하는 제안형 공모에서 탈락자에게도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국가계약법에 근거를 마련한다. 프랑스 설계공모처럼 제안 난이도에 따라 자동 적용되는 구조로 설계한다.
공공 디지털 서비스 품질 기준 법제화: 공공 디지털 서비스 개발 조달 시 사용성(UX)과 접근성(Accessibility) 충족을 계약 이행 기준으로 규정한다. 기술 스펙이 아니라 실제 사용자 경험이 검수 기준이 되도록 한다.
제도
가치기반 평가 체계 도입: 공공성·혁신성·실행력·지속가능성을 종합 평가하는 기준을 개발한다. "이 제안이 국민의 삶을 얼마나 개선하는가"를 평가의 중심에 둔다.
디자인 분야 전용 평가 체계 마련: 정량 실적 중심 대신 과정 설계 능력·사용자 이해도·협업 역량을 평가하는 표준 매뉴얼을 만든다. 사용자 대표·민간 전문가·지역 공무원이 함께 참여하는 평가위원단 구성을 필수화한다.
소규모 전문기업 진입장벽 완화: 실적 요건을 완화하고 포트폴리오·기획안 중심 평가 비중을 확대한다. 신생 디자인·사회혁신 조직도 참여할 수 있는 소규모 공공조달 실험사업을 신설한다.
2단계 심사형 혁신조달 확대: 영국 Contracts for Innovation처럼 1단계(아이디어 평가 + 소규모 개발 지원) → 2단계(시제품 검증 후 본계약) 절차를, 한국의 기존 혁신조달·시범구매 제도와 연계해 디자인·서비스 분야로 넓힌다.
정책
혁신조달 행동계획 고도화: 혁신조달 목표치, 공공 구매자 역량 강화, 전담 지원센터를 디자인·서비스 영역까지 포괄하도록 정비한다.
조달 성과지표 개편: 예산 집행률·납기 준수율 중심에서 사용자 만족도·서비스 이용률·사회적 영향으로 성과 측정을 전환한다.
제안서 평가 투명성 강화: 평가 결과 요약·불합격 사유·피드백 제공을 제도화하고, 블라인드·다단계 심사를 확산한다.
사업
디자인 품질 우수 발주기관 인증제: 가치기반 발주를 선도하는 기관을 인증하고 사례를 공유해, 좋은 발주 관행이 확산되는 선순환을 만든다.
한국형 혁신계약 시범사업: 영국 Contracts for Innovation을 참조해, 해법을 제안–검증–확산하는 조달 방식을 디자인·공공서비스 분야 일부 부처에서 시범 운영한다.
발주 담당자 역량 교육 강화: 발주기관 담당자에게 가치기반 발주 방법론, UX 기준 설정, 평가위원 운영법을 교육한다. '발주를 잘 하는 것'이 공무원의 핵심 역량이 되도록 한다.
4. 기대효과
단기: 디자인·혁신 분야 가격 비중 제한으로 가격 경쟁이 줄고 품질 중심 경쟁이 시작된다. 제안 보상금 제도로 공모 참여의 경제적 부담이 줄면서, 소규모 전문기업과 사회혁신 조직이 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한다.
중기: 가치기반 조달이 정착되면서 공공 환경과 서비스의 품질이 가시적으로 높아진다. 정부가 좋은 품질 기준으로 구매하기 시작하면 시장 전체가 그 기준에 맞춰 발전한다. 조달이 혁신을 자극하는 전략 도구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장기: '처음부터 제대로 만드는 것이 결국 더 싸다'는 인식이 데이터로 뒷받침되며 정착된다. 최저가로 조악하게 만들어 반복 수리하는 누적 비용보다, 처음부터 고품질로 만드는 비용이 더 낮다는 점이 증명된다. 한국의 공공환경과 공공서비스가 한 단계 도약하는 구조적 기반이 마련된다.
이 포스팅과 연결된 주제
공급자 중심 구조 혁파 — 가격 일변도 발주는 공급자 논리의 극단
읽히는 공공정보 체계로의 전환 — 품질 저하가 정보 전달에 미치는 영향
국민 경험 중심 디지털 서비스 전환 — 공공 디지털 서비스 품질의 구조적 원인
지속가능디자인 산업 전환 — 지속가능성을 조달 기준으로
기업 디자인 활용률 제고 — 공공조달이 민간 디자인 시장을 견인
참고 자료: 조달청, 『2023 공공조달통계연보』(2024.5. 발간) — 2023년 공공조달 208.6조 원, GDP 9.3%, 지자체 43.5% / European Commission, Public Procurement(2014 지침 평가 및 2026 개정 추진; 공공조달법 입법안 2026년 2분기 제출 예정), 조달은 EU GDP 약 14%·연 약 2조 유로·지방지역 약 45% / European Committee of the Regions(CoR), EU 공공조달 개혁 의견(2026.3.4.) / OECD, 공공부문 혁신을 위한 공공조달 및 전략적 공공조달 관련 보고서 / UK Innovate UK·UKRI, Contracts for Innovation(구 SBRI, 2024.5. 명칭 변경; 2005~) / UK Procurement Act 2023(2025 발효) / 프랑스 공공 설계공모(concours) 및 제안 보상금 법령 / 스웨덴·덴마크 공공디자인·공공혁신 발주 사례 / 한국 조달청, 혁신조달·혁신제품 지정·시범구매·구매면책 제도, 종합심사낙찰제 / 윤성원, 『모두의 질문Q』(2025) / 윤성원, 『다시 디자인』(2025) / 한국디자인진흥원, 『디자인이 궁금해』(2022)
2026.06.02. 윤성원 + 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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