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디지털 전환의 역설 극복

2026. 5. 18. 23:34서비스디자인/정책디자인

국민 경험 중심 디지털 서비스 전환
편리함을 느끼게 하는 기술, '디자인'이 필요하다

핵심 문제

한국 전자정부는 세계 최상위권이다. OECD 디지털정부지수 1위, UN 전자정부 발전지수 상위권. 그런데 정작 국민이 체감하는 공공 디지털 서비스는 왜 불편한가. 액티브X 장벽, 부처마다 다른 로그인, 이해하기 어려운 민원 화면. 행정 디지털화는 기술 중심에 머물러 있고, 국민이 실제로 체감하는 편의성과는 거리가 있다. 기술이 앞서는데 경험이 뒤처진다. 이것이 디지털 전환의 역설이다. 지표는 인프라를 측정하지만, 편리함은 측정하지 못한다. 기술을 '편리함으로 느끼게 만드는 일'이 바로 디자인이다. 1위에서 빠져 있는 고리가 여기에 있다.

* 이 블로그의 내용은 필자의 개인적 관점/제안이며, 한국디자인진흥원을 포함한 어떠한 기관의 입장도 대변하지 않습니다.

 

1. 현황과 문제점

세계 최상위 전자정부, 그런데 왜 불편한가

한국의 디지털 정부 성과는 지표상으로는 세계 최상위권이다. OECD 디지털정부지수(Digital Government Index, DGI)에서는 2019년(파일럿)·2023년에 이어 최신 2025년판(2026년 2월 발표, 2023~2024년 정책 대상)에서도 0.95점으로 회원국 중 1위를 기록했다. 반면 UN 전자정부 발전지수(EGDI)에서는 2024년 기준 4위(2010~2022년 최상위 3위권)로, 평가 기관과 방법론에 따라 순위가 갈린다. 어느 쪽이든 인프라와 제도 성숙도에서 상위권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정부24, 홈택스, 건강보험공단 앱, 도로교통공단 등 방대한 디지털 공공 인프라도 구축되어 있다. 그런데 국민이 이 서비스들을 이용할 때 느끼는 경험은 이 순위와 거리가 있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순위 자체가 아니라 순위와 체감의 간극이다. EGDI는 온라인서비스·통신인프라·인적자본 세 축을 합산한 지수이고, OECD DGI는 디지털 전환의 '기반(governance·foundation)'을 평가한다. 둘 다 인프라와 제도의 성숙도를 측정하지, 국민 한 사람이 민원을 끝내기까지 겪는 경험의 질을 측정하지 않는다. 지표가 높다는 것과 사용하기 편하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표가 측정하지 못하는 '경험'은 무엇이 만드는가. 기술 자체가 편리함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같은 기능도 화면 구조, 용어, 절차의 순서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쉽고 누군가에게는 불가능해진다. 기술을 사람이 '편리함으로 느끼도록' 번역하는 일, 그것이 디자인이다. 1위라는 지표와 국민의 불편 사이에 빠져 있는 고리가 바로 이 디자인이다. 디지털 전환의 역설은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기술을 경험으로 옮기는 설계가 빠졌기 때문에 생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공공 디지털 서비스 UX에 대한 비판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추가 프로그램 설치 요구, 불필요한 페이지 이동, 고령층을 배려하지 않은 디자인, 복잡한 화면 구성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이런 불편이 단순한 사용자 불만을 넘어, 공공 디지털 서비스 사용률 저하와 정부 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공공서비스는 여전히 공급자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어 사용자 경험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는다. 행정 디지털화는 기술 중심에 머물러 있고, 부처 간 협업 부재로 시스템 간 단절·중복 서비스·비효율성이 초래된다.

디지털화된 불편함 — 역설의 실체

디지털 전환의 역설은 이렇게 작동한다. 오프라인에서 직원이 안내해주던 서비스가 디지털로 이동한다. 그런데 그 서비스가 담당자의 행정 분류 체계를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다. 국민은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행정 분류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디지털화 이전에는 직원이 통역해줬는데, 디지털화 이후에는 국민이 스스로 행정 언어를 익혀야 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용하기 어려워지는 현상, 즉 디지털화된 불편함이 반복 생산된다. 전환의 결과로 오히려 비사용성이 증가하는 것이다.
그 결과 고령자, 장애인, 디지털 리터러시가 낮은 시민들이 공공서비스에서 배제된다. 정보가 있어도 읽을 수 없고, 절차가 있어도 접근할 수 없으며, 시스템이 있어도 조작이 불가능한 상황이 반복된다. 이것은 서비스 품질 문제가 아니라 기본권 문제다. 디지털 시대의 공공서비스 접근권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부처 간 단절이 만드는 공공 경험의 파편화

키오스크, 청구서, 공지문, 상담창구, 디지털 서비스 — 국민이 접하는 공공 접점마다 논리가 다르다. 용어가 다르고, 화면 구조가 다르고, 로그인 방식이 다르다. 부처마다 각자의 기준으로 시스템을 설계했기 때문이다.
McKinsey의 공공부문 연구는 이 문제를 공급자 관점 설계의 결과로 진단한다.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많은 정부가 국민의 필요가 아니라 자신의 업무 요건과 절차를 기준으로 서비스를 설계하며, 그 결과 시민 만족도 하락, 신뢰 저하, 그리고 여러 채널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 증가가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McKinsey가 2023년 미국 연방정부의 40여 개 핵심 서비스를 대상으로 3만 명을 조사한 결과, 같은 정부 안에서도 서비스 간 고객경험 점수가 27점까지 벌어졌다. 행정 효율·예산 집행·제도 중심으로 운영되는 기관들이 고객 경험 중심 전략 없이 디지털화를 추진하면, 결국 국민이 겪는 경험은 부처마다 따로 노는 파편이 된다.

2. 국내외 사례

🇰🇷 한국 — KRDS 범정부 UI/UX 디자인시스템 (2025.1.16. 정식 개시)

2025년 1월 16일, 행정안전부가 'KRDS(KoRea Design System)'를 범정부 UI/UX 디자인시스템으로 정식 개시했다. 중앙행정기관·소속기관·공공기관·지자체의 웹사이트와 모바일 웹·앱에 적용할 공통 디자인 기준이다.
KRDS의 특징은 주목할 만하다. 기존 문서 형태 가이드라인에서 탈피해 웹사이트와 Figma 파일로 제작했고, 각 컴포넌트와 패턴 페이지마다 WCAG(웹 접근성 국제 기준) 적합성을 명시했다. 디자이너·개발자가 레고 블록처럼 가져다 쓸 수 있도록 디자인과 코드를 함께 제공한다. 공공 웹·앱은 담당 디자이너·개발자가 자주 바뀌어 중복 작업과 인수인계 단절이 잦았는데, KRDS는 이 비효율을 줄이는 도구이기도 하다. 관련 업계에서는 "민간·해외 기업의 디자인 시스템 못지않은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KRDS는 아직 모든 정부기관에 적용되지 않았으며 점차 확대할 예정이다. 가이드라인은 만들어졌지만 강제 적용 기제가 없다는 것이 과제다. 새로운 서비스가 일정 기준을 통과해야 출시되는 영국 GDS의 구조와 비교하면 아직 갈 길이 멀다.

🇯🇵 일본 — 디지털청 설립과 서비스 재설계 (2021~)

일본 디지털청은 2021년 9월 설립됐다. 코로나19 당시 백신 예약·재난지원금 시스템의 잇단 오류로 '디지털 패배(digital defeat)'라는 평가를 받은 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출범한 조직이다. 디지털청의 접근 방식은 기술 조달이 아니라 서비스 설계에서 출발한다. 'Government-as-a-Service', 'Government-as-a-Startup'을 표방하며, 행정 편의가 아닌 국민 여정을 중심으로 시스템을 재설계한다. 조직 구성이 이를 뒷받침한다. 출범 4년 만에 인력이 571명에서 약 1,000명으로 늘었고, 그중 약 43%를 민간 전문가가 채운다. 디지털청 내부에는 사용자 중심 행정 서비스를 전담하는 서비스디자인 유닛이 설치되어 있고, 프로덕트 디자이너·UX 리서처·접근성 분석가 등이 함께 일한다. 정책 평가와 행정사업 검토를 통합 운영해 설계–집행–평가가 한 흐름으로 돌아가도록 한 것도 특징이다. 디지털청은 행정 절차를 이해하기 쉽게 만들기 위한 디자인 시스템도 별도 사이트로 공개해 누구나 활용할 수 있게 하고 있다(2024년 5월 베타 공개).

🇬🇧 영국 — GDS, 서비스 기준 심사권을 가진 디지털 기관

영국 GDS(Government Digital Service)는 사용자 여정 중심으로 전자정부를 전면 재설계한 모델이다. 2012년 수천 개의 정부 웹사이트를 GOV.UK라는 단일 플랫폼으로 통합했다. "먼저 사용자를 이해하라", "필요 없으면 만들지 말라"는 원칙이 설계의 기반이다. GDS의 핵심은 심사권이다. 새로운 정부 디지털 서비스는 출시 전에 GDS 서비스 기준(Service Standard)에 따른 평가를 통과해야 한다. 통과하지 못하면 서비스가 공개되지 않는다. 이 구조 덕분에 영국 공공 디지털 서비스는 부처에 관계없이 일관된 품질 기준을 유지한다.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것'과 '지키게 하는 것'의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다.

🇺🇸 미국 — USDS, 최고 기술인력이 정부에 합류한다

미국 정부디지털서비스(USDS)는 민간의 최고급 기술·디자인 인재가 정부에 한시적으로 합류해 실제 공공 디지털 서비스를 개선하는 모델이다. 의료보험 가입 사이트(Healthcare.gov)가 출시 직후 마비되자 긴급 투입된 민간 개발자·디자이너들이 시스템을 복구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이후 USDS는 노후 시스템을 사용자 관점에서 재설계하는 방식을 연방정부 전반으로 확산시켰다.

🇪🇪 에스토니아 — 디지털 국가 설계의 선도 사례

에스토니아는 '한 번만 원칙(Once Only Principle)'을 전자정부의 기본값으로 채택했다. 시민이 정부에 같은 정보를 두 번 제출하지 않아도 된다. 한 번 제출된 정보가 부처 간에 연계되어 후속 행정이 자동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기술이 특별히 뛰어나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시민 경험을 중심으로 시스템 전체를 설계했기 때문이다.

3. 제안

디지털 공공서비스 사용자 경험 기준 법제화: 현행 전자정부법에 공공 디지털 서비스의 사용자 경험(UX) 기준 준수 의무를 명시한다. 디지털 전환 전후의 사용자 여정을 비교 검토하도록 하여, 전환 후 오히려 불편해지는 것을 제도적으로 방지한다.

'한 번만 원칙' 법제화: 에스토니아처럼 시민이 같은 정보를 정부에 두 번 제출하지 않도록 하는 '한 번만 원칙'을 전자정부법에 명시한다. 부처 간 데이터 연계를 의무화하는 법적 근거가 된다.

제도

KRDS 적용 의무화 및 심사 제도 도입: 현재 KRDS는 가이드라인이지만 강제 적용 기제가 없다. 영국 GDS처럼 새로운 공공 디지털 서비스가 KRDS 기준과 서비스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면 출시되지 않도록 심사 제도를 도입한다.

공공 디지털 서비스 UX 전담 조직 설치: 기술·UX·정책이 통합된 범부처 디지털 서비스 전담 조직을 둔다. 일본 디지털청처럼 민간 전문가를 상당 비율로 채용하고, 설계–집행–평가가 한 흐름으로 돌아가도록 조직을 구성한다.

사용자 여정 기반 서비스 설계 의무화: 공공 디지털 서비스 기획 단계에서 사용자 여정 지도 작성을 의무화한다. 어느 지점에서 막히고,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며, 어떤 절차가 통역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지를 설계 전에 드러낸다.

정책

디지털 취약계층 포용 설계 기준 강화: KRDS에 고령자·장애인·외국인·저문해 시민을 위한 '간편 모드' 기본 제공을 의무화한다. 포용디자인 기준 의무화와 연계해, 디지털 서비스의 접근성이 물리적 서비스보다 낮아지는 것을 방지한다.

공공 디지털 서비스 UX 성능 모니터링 도입: 웹·앱·민원 시스템에 UX 성능 기반 모니터링을 도입한다. 전자화율·제공률 같은 공급자 지표 대신 오류율·이탈률·완료율·반복이용률·접근성 지표를 정기적으로 측정하고 공개한다.

'한국형 USDS' 프로그램 추진: 민간 디지털·UX 전문가가 일정 기간 공공기관에서 실제 디지털 서비스를 개선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미국 USDS처럼 외부 전문성이 공직 내로 유입되는 통로를 만든다.

설계–실행–피드백–재설계 루프 제도화: 서비스 출시 후에도 사용자 피드백을 지속 수집·반영하는 구조를 의무화한다. 디지털 서비스가 한 번 만들어지면 수년간 개선되지 않는 관행을 끊는다.

사업

부처 간 공통 디지털 경험 표준 확산 사업: KRDS를 기반으로 키오스크·청구서·공지문·상담창구까지 오프라인 접점을 포함한 공공 경험 전 접점에 공통 UX 언어를 확산한다.

공공 디지털 서비스 개선 제안 공모 상설화: 시민이 직접 공공 서비스 개선을 제안하는 참여형 채널을 상설화하고, 제안이 실제로 반영되는 경로를 공개한다.

디지털 취약계층 디지털 서비스 체험 조사: 고령자·장애인이 공공 디지털 서비스를 실제로 이용하는 과정을 정기적으로 관찰·조사하고, 그 결과가 KRDS 업데이트와 서비스 개선에 직접 반영되도록 한다.

4. 기대효과

단기: KRDS 적용 의무화와 심사 제도 도입으로 새로 출시되는 공공 디지털 서비스의 기본 UX 품질이 보장된다. 사용자 여정 기반 설계 의무화로 '디지털화된 불편함'의 반복 생산이 줄어든다.

중기: 접근성 지표가 개선되면서 고령자·장애인의 실제 이용률이 높아진다. 부처 간 공통 UX 언어가 정착되면서 키오스크부터 웹사이트까지 공공 경험의 일관성이 높아진다.

장기: 'OECD 1위·UN 상위권 전자정부'라는 지표가 국민 체감 경험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기술 중심 디지털 전환에서 국민 경험 중심 디지털 전환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된다. 지표가 측정하던 '인프라의 1위'가, 디자인을 통해 '편리함의 1위'로 옮겨가는 것이다. 에스토니아의 '한 번만 원칙'처럼, 한국도 시민이 정부와의 모든 접점에서 일관되고 편리한 경험을 하는 구조를 완성해 간다.

이 포스팅과 연결된 주제

디지털 정책 부처 간 분산 해소 — 분산된 UX 기준이 만드는 문제
국가 디자인 통합조정기구 신설 — KRDS를 총괄할 컨트롤타워
공공서비스 기본값 대조정 — 디지털 서비스의 기본값 재설계
공공정보 전달 체계 혁신 — 디지털 전환의 콘텐츠 측면
포용디자인 기준 의무화 — 디지털 포용의 제도적 기반


참고 자료: 행정안전부·NIA, 범정부 UI/UX 디자인시스템(KRDS)(2025.1.16. 정식 개시) / OECD, "Digital Government Index and OURdata Index" 2025년판(2026.2. 발표, OECD Working Papers on Public Governance) — 한국 DGI 0.95점 1위 / UN DESA, E-Government Survey 2024 — 한국 EGDI 4위 / McKinsey & Company, 공공부문 고객경험(Citizen/Customer Experience) 연구(2023, 미국 연방정부 40여 개 핵심 서비스 3만 명 조사 포함) / 일본 디지털청(Digital Agency), 서비스디자인 유닛 및 디자인시스템(2024.5. 베타 공개), 조직 현황 / 영국 GDS, GOV.UK Service Standard / 에스토니아 전자정부, Once Only Principle / 미국 USDS(US Digital Service) 사례 / 윤성원, 『모두의 질문Q』(2025) / 윤성원, 『보이지 않는 서비스 보이는 디자인』(2025) / 윤성원, 『다시 디자인』(2025)

2026.05.17. 윤성원 + 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