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 18. 23:20ㆍ서비스디자인/정책디자인
근거기반 정책 설계 정상화
데이터보다 사람의 삶을 먼저 이해하는 정책 방법론
핵심 문제
정부는 "근거기반 정책"을 표방한다. 통계, 조사, 수치 데이터가 정책의 근거다. 그런데 통계는 삶을 요약할 뿐, 설명하지 못한다. 정량 데이터는 '무엇이 문제인지'는 보여주지만, '왜 그게 문제인지'는 말해주지 못한다. 그 결과 좋은 의도의 정책이 현장에서 실패한다. 수혜자가 이해하지 못하고, 접근하지 못하고, 사용하지 않는다.
* 이 블로그의 내용은 필자의 개인적 관점/제안이며, 한국디자인진흥원을 포함한 어떠한 기관의 입장도 대변하지 않습니다.
1. 현황과 문제점
근거기반 정책의 역설 — 근거가 삶을 가리고 있다
근거기반 정책(Evidence-Based Policy, EBP)은 과학적 데이터에 기반해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는 패러다임으로, 1990년대 이후 전 세계 정책 입안의 표준이 됐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정책연구보고서, 통계청 데이터, 설문조사 결과, 복지 수혜자 통계가 모든 정책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이 방법론의 근본적 한계가 있다. 통계는 평균을 측정한다. 평균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경험은 데이터에 나타나지 않는다. 고독사 위험에 처한 독거노인이 '복지 서비스를 신청하지 않는 이유'는 설문조사로 파악되지 않는다. 이주 배경 아동이 '학교에서 왜 뒤처지는지'는 학업 성취도 통계로 설명되지 않는다. 장애인이 '키오스크 앞에서 왜 포기하는지'는 이용률 데이터에 잡히지 않는다.
통계 수치는 인간의 삶을 요약하지만, 설명하지는 못한다. 정량 데이터는 '무엇이 문제인지'는 보여주지만, '왜 그게 문제인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좋은 의도, 실패하는 정책 — 왜 반복되는가
선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정책이 왜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대부분 하나다. 정책을 설계한 사람이 수혜자의 실제 삶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에너지 복지 사각지대가 대표적이다. 공공서비스디자인사업에서 에너지 복지 대상자들과 함께 공감 활동을 벌인 뒤 발견한 것은, 복지 대상자들이 신청하지 않는 이유가 '몰라서'가 아니라 '절차가 너무 복잡해서'였다. 하나를 신청하면 다른 혜택이 자동 연결되는 시스템으로 바꾸는 것이 해결책이었다. 데이터로는 나올 수 없는 통찰이다.
행동을 관찰해야 '왜'가 나온다. 의료 현장에서 특정 행정 절차가 왜 지켜지지 않는지를 통계가 아닌 현장 관찰로 접근하면, 처벌이나 인센티브가 아닌 구조 설계로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디자인 리서치의 핵심이다.
OECD·EU의 공식 인정 — 데이터만으로는 부족하다
OECD와 유럽위원회(EC) 공동연구센터(JRC)가 2025년 발표한 '국가 증거기반 정책 생태계 강화 보고서'는 전통적 근거기반 정책 패러다임의 한계를 공식 인정한다. 이 보고서는 유럽 7개국(벨기에·체코·에스토니아·그리스·라트비아·리투아니아·네덜란드)의 증거기반 정책 역량을 분석한 결과물이다.
보고서는 데이터의 공급(supply)과 수요(demand) 양면을 동시에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근거를 만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책 담당자가 그 근거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 그리고 현장의 삶을 이해하는 질적 증거(lived experience)가 정량 데이터와 함께 정책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EU 공공행정 네트워크(EUPAN) 회의에서 2024년 2월 서명된 겐트 선언(Ghent Declaration)은 29개국이 "데이터 기반 정책 수립이 가능한 더 대표적인 공공행정 구현"을 약속했다. 이것은 정량 데이터 중심에서 시민 삶의 경험을 포함한 복합적 근거 체계로의 전환을 국제 표준으로 확인한 것이다.
정책 설계의 공감 결여가 만드는 구체적 피해
수치로 잡히지 않는 피해가 있다. 노인 복지관 이용자가 프로그램 신청서를 이해하지 못해 포기할 때, 이 사람은 이용률 통계에서 '비이용자'로만 분류된다. 이주민 자녀가 학교 알림장을 이해하지 못해 정보에서 소외될 때, 이 문제는 학업 성취도 격차 데이터에 포함되지 않는다. 복지 사각지대의 반복은 데이터가 문제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2. 국내외 사례
🇰🇷 한국 — 공공서비스디자인사업의 에너지 복지 사례
공공서비스디자인사업(국민디자인단)에서 수행한 에너지 복지 사각지대 개선 사업은 근거기반 정책 정상화의 국내 모범 사례다. 정책 담당자·서비스디자이너·당사자로 구성된 팀이 현장에서 에너지 복지 대상자들과 함께 그들의 일상을 경험했다. 발견한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절차가 너무 복잡해서 신청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떤 설문조사에도 나오지 않는 현장 관찰의 통찰이었다.
해결책은 데이터 분석이 아닌 시스템 재설계였다. 하나의 복지 서비스를 신청하면 관련 혜택이 자동으로 연결되는 구조로 바꿨다. 이것이 정량 데이터 너머의 근거를 기반으로 한 정책 설계의 실제 사례다.
🇬🇧 영국 — Policy Lab의 에스노그라피와 시나리오 프로토타이핑
영국 Policy Lab은 정책 설계에 두 가지 핵심 질적 방법론을 적용해왔다.
에스노그라피(Ethnography): 정책 담당자가 직접 현장에 나가 정책 수혜자의 일상을 관찰하는 훈련이다. 사무실에서 통계를 읽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사람들의 환경에서 그들의 행동을 직접 보고 이해한다. 노숙인 지원 정책, 육아 지원 정책, 장애인 고용 정책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됐다.
시나리오 프로토타이핑: 아직 존재하지 않는 정책이 실제로 작동하는 것처럼 시뮬레이션해서 문제를 사전에 발견하는 방법이다. "이 정책이 실제 작동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실행 전에 검증한다.
2025년 영국 정부의 공공 디자인 증거 보고서는 이 방법론들이 정착한 결과 공무원의 88%가 업무에 디자인을 활용한다고 밝혔다. 데이터 너머의 근거를 다루는 역량이 공직 전반에 내재화된 것이다.
🇫🇮 핀란드 — DfG, 사용자 여정 분석을 정책 출발점으로
핀란드 알토대학의 Design for Government(DfG) 과정은 모든 정책 과제에 사용자 여정 분석과 디자인 리서치를 포함한다. 어떤 정책이든 그 정책이 영향을 미치는 사람의 하루를 시간 순서로 추적하는 것이 시작점이다. "이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서 무엇을 하는가, 이 서비스를 어떤 맥락에서 만나는가"가 정책 설계의 출발점이 된다.
핀란드 총리실이 이 과정을 국가 실험적 거버넌스 정책 수립의 기반으로 활용한 것은, 질적 경험 데이터를 공식 정책 근거로 인정하는 구조적 전환을 보여준다.
🇪🇺 EU — 겐트 선언과 OECD·JRC 공동 보고서 (2024~2025)
2024년 2월 EU 공공행정 네트워크(EUPAN) 회의에서 29개국이 서명한 겐트 선언은 "데이터 기반 정책 수립이 가능하고 사회를 더 대표하는 공공행정"을 국제 공동 목표로 설정했다.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OECD·JRC가 7개 EU 국가와 2년간 공동 작업을 통해 증거기반 정책 역량 강화 로드맵을 도출한 후속 작업으로 이어졌다.
OECD·JRC 공동 보고서는 증거기반 정책의 핵심 과제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데이터 공급뿐 아니라 정책 담당자의 수요 역량 강화. 둘째, 부처 칸막이를 넘는 범분야 지식 활용 구조. 셋째, 질적 증거(lived experience)를 정량 데이터와 통합하는 방법론. 이 세 가지가 한국 정책 설계 정상화의 구체적 방향이기도 하다.
🇳🇱 네덜란드 — 근거의 공급만으로는 부족하다
OECD·JRC 보고서가 사례로 다루는 네덜란드는 독립적 과학자문위원회(WRR)를 갖추고 있음에도, 정책 담당자들이 그 근거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활용이 제한된다는 문제를 경험했다. 근거를 만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근거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역량을 정책 담당자가 갖춰야 한다. 이것이 '근거기반 정책의 생태계'가 필요한 이유다.
3. 제안
법
- 행정절차법에 '삶의 경험 탐색 단계' 법적 의무화: 일정 규모 이상 공공사업의 기획 단계에 현장 리서치·행동 관찰·당사자 인터뷰를 포함하는 '삶의 경험 탐색 단계'를 법적으로 의무화한다. 현행 공청회·의견수렴 절차가 대부분 형식적임을 인정하고, 실질적인 수요자 이해 과정으로 대체한다.
- 정책 영향평가에 질적 지표 포함 의무화: 규제영향분석, 성별영향분석 등 기존 의무 평가 항목에 정책 대상자의 이해도·접근성·경험을 측정하는 질적 지표를 추가한다.
제도
- 공감기반 정책설계 표준 절차 수립: 모든 정책 기획의 사전 단계에 ①현장 리서치(관찰·심층인터뷰), ②페르소나 개발 및 사용자 여정 지도, ③당사자 이야기 기반 브리핑, ④사용자 기반 프로토타이핑을 표준 절차로 규정한다.
- 정책 초기 설계팀에 디자인리서처 배치: 주요 정책 기획팀에 현장을 관찰하고 당사자 경험을 번역하는 '디자인리서처'를 포함하는 구조로 전환한다. 08번(공공서비스디자이너 직제 신설)과 연계한다.
- 질적 증거 통합 체계 구축: 정기 통계 외에, 민원 분석·현장 공무원 리포트·당사자 인터뷰 데이터를 정책 근거로 공식 통합하는 체계를 마련한다. OECD·JRC 보고서가 권고하는 수요 측 역량 강화의 핵심 장치다.
정책
- Policy Lab 에스노그라피 한국형 도입: 영국 Policy Lab처럼 정책 담당자가 정기적으로 현장에 나가 수혜자의 일상을 직접 관찰하는 프로그램을 제도화한다. 관찰 경험이 정책 문서에 반영되는 경로를 의무화한다.
- 겐트 선언 참조 — 한국형 증거기반 정책 역량 강화 계획 수립: 29개국이 서명한 겐트 선언의 방향을 참조해, 한국 공공행정의 증거기반 정책 역량(데이터 공급 + 활용 역량 + 질적 증거 통합)을 강화하는 중장기 계획을 수립한다.
- 정책 성과 측정 체계 전환: "서비스를 제공했는가"에서 "수혜자가 실제로 이해하고 이용했는가"로 성과 지표를 전환한다. 서비스 포기율, 재문의율, 이해도 측정을 공식 성과 지표로 도입한다.
사업
- 정책 설계자 현장 공감 훈련 정례화: 모든 정책 담당 공무원이 연 1회 이상 정책 대상자의 현장을 방문해 그들의 일상을 관찰하는 공감 훈련을 의무화한다. 09번(공무원 디자인 교육 체계 수립)과 연계한다.
- 당사자 스토리 기반 정책 브리핑 체계: 정책 기획 보고서에 통계 외에 "실제 수혜자 3인의 이야기"를 의무적으로 포함하는 브리핑 체계를 도입한다. 숫자로 압축되기 전의 삶이 의사결정자에게 전달되는 구조다.
- 근거기반 정책 생태계 구축 연구: OECD·JRC 공동 보고서가 7개 EU 국가에 적용한 분석 방법론을 한국에 적용해, 한국 정책 설계의 질적 근거 통합 현황을 진단하고 개선 로드맵을 수립한다.
4. 기대효과
단기: 정책 기획 단계에 현장 리서치가 의무화되면서, 수혜자의 실제 삶에서 발견한 통찰이 정책 설계에 반영되기 시작한다. 에너지 복지 사례처럼, 복잡한 신청 절차가 수요자 관점에서 재설계되는 사례가 늘어난다.
중기: 디자인리서처가 정책팀에 배치되면서 현장 관찰이 정책 과정의 정규 단계로 자리잡는다. 서비스 포기율·이해도 등 질적 성과 지표가 도입되면서 공급자 중심 평가 체계가 전환된다.
장기: 통계 데이터와 삶의 경험 데이터가 함께 정책의 근거가 되는 구조가 완성된다. 겐트 선언이 목표로 하는 "사회를 더 대표하는 공공행정"이 실현된다. 좋은 의도의 정책이 현장에서 실패하는 반복이 구조적으로 줄어든다.
이 포스팅과 연결된 주제
공급자 중심 구조 혁파 — 데이터 중심 설계는 공급자 관점의 연장
공공서비스디자이너 직제 신설 — 현장 리서치를 담당하는 전문 인력
정책 R&D 도입 의무화 — 질적 리서치가 정책 R&D의 핵심 방법론
사회적 약자 중심의 정책 설계 — 통계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설계
참고 자료: OECD & JRC, "Strengthening National Evidence-Informed Policymaking Ecosystems"(2025) — 7개 EU 국가 EIPM 역량 분석, 데이터 공급·수요 양면 접근 / EU EUPAN, 겐트 선언(Ghent Declaration)(2024.2.) — 29개국 데이터 기반 공공행정 약속 / UK Government, "Public Design in the UK Government: Evidence Review"(2025) — 공무원 88% 디자인 활용 / UK Policy Lab, 에스노그라피·시나리오 프로토타이핑 방법론 / 행정안전부·KIDP, 「2024 공공서비스디자인 성과사례집」(2025.9.) — 에너지 복지 사각지대 개선 사례 / 핀란드 Aalto University, Design for Government(DfG) 과정 / 윤성원, 『다시 디자인』(2025) / 한국디자인진흥원, 『디자인이 궁금해』(2022) / 윤성원, 『보이지 않는 서비스 보이는 디자인』(2025) / 윤성원, 『모두의 질문Q』(2025)
2026.05.17. 윤성원 + 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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