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디자인 과제 시리즈 전체 목록) 정책을 디자인하다 - 디자인의 역할을 다시 묻는 32개의 질문

2026. 5. 18. 08:09서비스디자인/정책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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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 디자인은 무엇인가

한국은 디자이너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라 중 하나이고 진흥 예산도 꾸준히 늘려왔지만, 디자인 정책은 괄목할 성과를 내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디자인은 아직 '예쁘게 만드는 일'로 인식되고, 기업의 디자인 활용률은 10년 가까이 30퍼센트대 후반에서 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사이 세계 주요국 정부는 공공부문의 디자인 역할을 정책과 서비스를 설계하는 일로 재정의하고 있다. 영국은 공공디자인을 정책 의도를 달성하며 실행 리스크를 줄이는 과정으로 규정했고, 미국은 2025년 백악관에 최고디자인책임자를 두었다. 디자인을 무엇으로 보느냐가, 디자인의 역할과 지위를 결정한다.

이 시리즈에 묶은 32개의 과제는 각각 독립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무엇을 디자인으로 보는가', 그리고 그 영역과 지원체계(어떤 법·부처·기구로 다루는가)를 어떻게 재정의할 것인가다. 이는 좁게 규정된 기존의 정의를 국제 기준과 현행법의 취지에 맞게 제자리로 되돌리려는 시도이다.

32개 과제는 다섯 묶음으로 나눠볼 수 있다. 디자인을 어떻게 볼 것인가(인식)에서 시작해, 어떤 구조로 다룰 것인가(거버넌스), 누가 어떻게 정책을 설계하는가(공공의 역량과 방법), 국민이 무엇을 경험하는가(서비스 접점), 산업과 사회로 어떻게 확장되는가(생태계와 가치)로 이어진다. 마지막 글은 이 모두를 묶는 총론이다.
각 과제는 현황과 통계, 국내외 사례, 정책 제안, 기대효과의 순서로 구성했다. 모든 내용은 내 개인의 관점과 제안이며, 정답이 아니라 함께 논의할 출발점으로 읽히기를 바란다.

이 글들은 '디자인이 궁금해'(2022), '다시 디자인(2025), '보이지 않는 서비스 보이는 디자인'(2025), '모두의 질문Q(2025) 등에서 제기해온 문제의식을, 최근의 사례와 통계로 업데이트하고 보완해 고쳐 쓴 것임을 알린다.

2026.6. 윤성원

목차

I. 인식과 거버넌스 — 디자인을 어떻게 보고, 어떤 틀로 다룰 것인가

관점·패러다임
01 국가 디자인 역량 고도화
02 경험경제 시대의 디자인 전략 재편
03 공급자 중심 구조 혁파

법·제도·조직
04 국가 디자인 분류 체계 일원화
05 디자인 법제 통합
06 디자인 정책 부처 간 분산 해소
07 국가 디자인 통합조정기구 신설

II. 공공의 혁신 역량 — 누가, 어떻게 정책을 설계하는가

인력·조직
08 공공서비스디자이너 직제 신설
09 공무원 디자인 교육 체계 수립
10 공직 순환보직 제도 개선
11 공공기관 평가·감사 부담 합리화
12 미래 사회문제 대응형 공공조직 재설계

정책 방법론
13 정책 R&D 도입 의무화
14 정책디자인랩 법제화
15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다부처 디자인 협력 사업 제도화
16 근거기반 정책 설계 정상화

III. 공공서비스 접점 — 국민은 무엇을 경험하는가

17 공공서비스 기본값 대조정
18 디지털 서비스 다크패턴 규제
19 국민 경험 중심 디지털 서비스 전환
20 공공정보 전달 체계 혁신
21 공공조달 가치기반 발주 전환

IV. 산업과 사회적 가치 — 디자인을 어디까지 확장할 것인가

디자인 산업 생태계
22 기업 디자인 활용률 제고
23 디자이너 생애주기 경력개발 체계 구축
24 정부 R&D의 서비스 분야 투자 확대
25 디자인 인력 양성 체계 질적 전환
26 수출 경쟁력을 위한 패키지 디자인 지원 체계 구축

사회적 가치·포용
27 포용디자인 기준 의무화
28 초고령사회 대응 디자인 전략 수립
29 지속가능디자인 산업 전환
30 사회적 약자 중심의 정책 설계 체계화
31 농업·1차산업 디자인 혁신

V. 총론

32 공공부문 디자인 영역과 체계 재정의



I. 인식과 거버넌스 — 디자인을 어떻게 보고, 어떤 틀로 다룰 것인가

관점·패러다임

01 국가 디자인 역량 고도화
디자이너를 가장 많이 배출하고 진흥 예산을 꾸준히 늘려온 나라에서, 디자인 활용률은 왜 37.3퍼센트(2024)에 멈춰 있는가. 선진국 평균 60퍼센트와 격차가 크고, 활용하는 기업조차 대부분 완성품에 외형을 입히는 스타일링 단계에 머문다. 2023년 디자인의 경제적 가치는 159.9조 원으로 전년보다 10.3퍼센트 줄었다. 디자인 수준을 측정하고 단계별 성장 경로를 설계하는 국가 전략이 없으면, 양적 투자는 질적 도약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02 경험경제 시대의 디자인 전략 재편
카카오톡이 인터페이스를 한 번 바꾸자 4거래일 만에 시가총액 3조 5천억 원이 증발한 이유는 무엇인가. 2025년 9월 개편 직후 구글플레이 평점은 1.0으로 떨어졌고, 평점을 매긴 318만 명 중 312만 명이 1점을 줬다. 기술 격차가 사라진 시대에 차별화의 마지막 영역은 경험의 질감이다. 그런데 한국의 많은 기업과 정책은 여전히 효율화·표준화의 언어로 사고하며, 사용자를 마지막 검증 단계에서야 만난다.

03 공급자 중심 구조 혁파
한국 서비스산업의 노동생산성이 OECD 33개국 중 28위에 머무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상당 부분이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것'에서 출발해 사용자를 마지막에 배치하는 공급자 중심 설계에 있다. 만족도 조사는 서비스를 이용한 사람만 측정할 뿐, 접근조차 못한 사람의 규모는 데이터에 잡히지 않는다. 수요자 경험을 설계의 출발점으로 옮기지 않으면 이 생산성 격차는 좁혀지지 않는다.

법·제도·조직

04 국가 디자인 분류 체계 일원화
서비스디자인은 2014년 법에 편입되고 2020년 국가기술자격까지 생겨 1,165명(2020~2025 누적)을 배출했는데, 왜 산업통계에는 보이지 않는가. 한국표준산업분류에 독립 코드가 없어 '기타'로 흩어지기 때문이다. 기업 수도, 종사자도, 매출도 국가 통계에서 따로 잡히지 않는다. 측정되지 않는 산업은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05 디자인 법제 통합
산업디자인진흥법과 공공디자인진흥법은 둘 다 디자인을 말하는데, 왜 그 디자인은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키는가. 산업통상부의 디자인은 경쟁력이고 문체부의 디자인은 문화·심미성이다. 법이 쪼개진 것은 결과이고, 원인은 디자인을 이해하는 방식이 분열되어 있다는 데 있다. 이 인식의 분열을 해소하지 않으면 법을 통합해도 다시 갈라진다.

06 디자인 정책 부처 간 분산 해소
공무원·국민·서비스디자이너가 함께 12년간 2,000개 과제를 수행한 공공서비스디자인사업은 왜 2026년 예산을 배정받지 못하고 멈췄는가. 디자인 정책이 산업통상부·문체부·행안부 세 부처에 나뉘어, 어떤 사업도 두 개 이상 부처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부처 간 협의는 있지만 협력이 제도화되어 있지 않아, 담당자가 바뀌거나 예산이 끊기면 기반이 흔들린다. 협력을 사업이 아닌 구조로 만들지 않으면 성과는 일회성에 그친다.

07 국가 디자인 통합조정기구 신설
디자인이 정책·서비스·제품·공간을 모두 아우르는 수단이 된 지금, 한국에서 국가 디자인 전략을 총괄하는 기관은 어디인가. 없다. 산업디자인은 산업통상부, 공공디자인은 문체부가 맡고, KIDP가 많은 역할을 하지만 산업통상부 산하 집행기관이라는 한계가 있다. 컨트롤타워가 없으면 국가 디자인 역량의 총합은 각 부처 역량의 합보다 작아진다.

II. 공공의 혁신 역량 — 누가, 어떻게 정책을 설계하는가

인력·조직

08 공공서비스디자이너 직제 신설
2020년 공공서비스디자이너로 채용된 별정직 공무원 약 10명 중, 지금 정부에 남아 있는 사람은 몇 명인가. 한 명도 없다. 채용은 일회성에 그쳤고 정규 직렬로 자리잡지 못했다. 공공조직에는 문제를 실행하는 사람은 많지만 문제를 새롭게 정의하는 사람은 없고, 직제가 없으면 역할도 생기지 않는다.

09 공무원 디자인 교육 체계 수립
영국 공무원의 88퍼센트가 업무에 디자인을 활용한다(2025). 한국 공무원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어떤 답이 나올까. 한국의 공무원 디자인 교육은 디자이너 양성에 초점을 두기 쉽지만, 정작 필요한 역량은 디자이너와 협력하며 사용자를 먼저 이해하는 감수성이다. 이 감수성이 공직 진입 시점부터 기본 소양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10 공직 순환보직 제도 개선
한국 공무원의 평균 보직 기간 1.5~2년은 미국(4~5년)이나 영국·독일(3~4년)의 절반 이하다. 전문성이 쌓이기 전에 자리를 옮기면, 전임자의 현장 경험과 관계망은 전달되지 않고 다음 사람은 처음부터 다시 배운다. 1~2년 호흡이 필요한 서비스디자인 과제는 담당자 교체로 연속성이 끊긴다. 순환보직 자체보다 전문성 없는 순환이 문제다.

11 공공기관 평가·감사 부담 합리화
공공기관 하나가 국정감사 자료를 만드는 데만 한 해 7,200시간, 3.7명이 1년 내내 매달린다면 그 기관은 언제 본업을 하는가. 경영평가·부처 평가·감사원 감사까지 겹쳐 기관 역량의 10퍼센트 이상이 본업 밖에서 사라진다. 실패가 감점인 이 구조에서는 혁신팀조차 실험 대신 검증된 방식을 반복한다. 평가가 혁신을 막는 구조를 그대로 둔 채 혁신을 요구하는 방식은 작동하지 않는다.

12 미래 사회문제 대응형 공공조직 재설계
공공기관마다 혁신팀이 있는데, 왜 그 팀은 새 정책을 설계하지 못하는가. 처음부터 권한 없는 구조로 설계됐기 때문이다. 기후위기·초고령화·지방소멸 같은 새 문제를 다룰 공공조직을 어떻게 설계할지 아는 주체도 없다. 핀란드 Sitra가 2025년 공공부문 생산성에 5,000만 유로를 투자했듯, 조직 설계 자체를 국가 과제로 삼아야 한다.

정책 방법론

13 정책 R&D 도입 의무화
한 해 131조 원(2024, GDP의 5.13퍼센트)을 연구개발에 쓰는 나라에서, 왜 정책은 검증 없이 만들어지고 집행되는가. 기업은 신제품 출시 전 수년간 R&D를 하지만, 대부분의 정책은 직관·관행으로 확정되고 수요자의 삶을 이해하는 연구나 파일럿 없이 현장에 투입된다. 그 결과 좋은 의도의 정책이 현장에서 반복 실패한다. 만들고 집행하는 구조에서 이해하고 실험하고 검증하는 구조로 바꿔야 한다.

14 정책디자인랩 법제화
10년간 2,000개 과제와 2만 명이 참여하고 2016년 iF 디자인 어워드 금상을 세계 최초로 받은 사업이, 왜 2026년 예산 부족으로 멈췄는가. 공공서비스디자인사업이 여전히 예산이 끊기면 멈추는 '사업'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참여 공무원이 학습한 방법론도 조직에 내재화되는 경로가 없다. 세계적 규모의 정책 실험을, 예산에 좌우되지 않는 상설 제도로 법제화할 시점이다.

15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다부처 디자인 협력 사업 제도화
고독사를 예방하려면 복지·주거·기술·도시계획이 동시에 작동해야 하는데, 왜 그 업무는 복지부 한 곳의 소관인가. 한국 정부는 복합 사회문제를 부처별로 쪼개 담당시키고, 나머지 부처는 협력 대상일 뿐 공동 실행 주체가 아니다. 서울시 생활안심디자인이 경찰청·구청·연구기관·디자이너의 협력으로 2012년 이후 67개소로 확산된 것은 다주체 협력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흩어진 정책을 사용자 경험으로 통합하는 디자인 기반 협력을 제도화해야 한다.

16 근거기반 정책 설계 정상화
정부는 통계를 근거로 정책을 만들지만, 통계는 '무엇이 문제인지'는 보여줘도 '왜 문제인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독거노인이 복지를 신청하지 않는 이유, 장애인이 키오스크 앞에서 포기하는 이유는 평균을 측정하는 데이터에 잡히지 않는다. 한 조사에서 에너지 복지 대상자들이 신청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절차의 복잡함이었다. 정량 데이터에 수요자의 삶을 이해하는 질적 근거를 더해야 정책이 작동한다.

III. 공공서비스 접점 — 국민은 무엇을 경험하는가

17 공공서비스 기본값 대조정
별도로 행동하지 않을 때 자동 적용되는 기본값은 법보다 강력하게 시민의 행동을 규정한다. 영국이 연금을 자동가입 방식으로 바꾸자 가입률이 36퍼센트에서 71퍼센트로 올랐고, 2024년까지 1,110만 명이 자동 가입됐다. 신청해야 받는 복지, 거부해야 빠지는 알림처럼 한국의 공공서비스 기본값은 대부분 제공자 편의로 설정되어 있다. 공무원은 이미 선택설계자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으며, 기본값을 수요자 중심으로 재편하는 것만으로 행동이 달라진다.

18 디지털 서비스 다크패턴 규제
구독 해지를 일부러 어렵게 만들고 결제 단계마다 비용을 끼워 넣는 설계로, EU에서만 연간 최소 79억 유로의 소비자 피해가 발생한다(EU 집행위 추산). EU 공청회 응답자의 89퍼센트가 이런 다크패턴으로 혼란을 겪었고, 76퍼센트는 원치 않는 구매를 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무한 스크롤·자동재생 같은 중독적 설계는 2025년 Lancet Psychiatry가 공중보건 의제로 규정할 만큼 영향이 크다. 착취적 설계를 금지하고 공정한 디지털 환경의 기준을 세우는 규제가 필요하다.

19 국민 경험 중심 디지털 서비스 전환
한국 전자정부는 OECD 디지털정부지수 1위(2025판 0.95점)인데, 왜 국민이 민원 화면 앞에서 느끼는 경험은 그 순위와 거리가 먼가. 지표는 인프라와 제도 성숙도를 측정할 뿐, 한 사람이 민원을 끝내기까지 겪는 경험의 질은 측정하지 않는다. 같은 기능도 화면 구조와 용어, 절차 순서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쉽고 누군가에게는 불가능해진다. 기술을 편리함으로 옮기는 설계가, 1위라는 지표와 국민의 불편 사이에 빠진 고리다.

20 공공정보 전달 체계 혁신
생명과 직결된 재난정보가 텍스트와 숫자 목록으로만 제공되면, 고령자·외국인·장애인에게는 도달하지 않는 정보가 된다. 2011년 에너지 고지서를 색상으로 재설계한 시범사업은 방배동 600가구에서 월 10퍼센트의 전기료 절감 효과를 냈지만, 전국 확산 과정에서 핵심 아이디어가 훼손돼 절감 효과가 2퍼센트로 떨어졌다. 좋은 디자인을 만드는 것과 그 핵심을 끝까지 지켜 확산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정보를 읽히고 행동되게 옮기는 정보디자인을, 권한을 가진 주체가 끝까지 관리해야 한다.

21 공공조달 가치기반 발주 전환
한 세대 동안 쓰일 공공환경과 공공서비스를, 왜 우리는 가장 싼 가격으로 만드는가. 일정 규모 이하 사업에서 가격이 사실상 결정권을 갖는 구조에서는 디자인 품질과 기술적 완성도가 뒷전으로 밀린다. 비용 최소화에 집중하다 보면 한 번 잘못 만든 인프라를 한 세대 내내 감당하게 된다. 최저가 낙찰에서 가치·품질 기반 발주로 전환해야 공공서비스의 품질이 올라간다.

IV. 산업과 사회적 가치 — 디자인을 어디까지 확장할 것인가

디자인 산업 생태계

22 기업 디자인 활용률 제고
한국 기업의 디자인 활용률은 2018년 35.9퍼센트에서 2023년 37.3퍼센트로, 사실상 제자리다. 같은 해 대기업은 67.4퍼센트인데 중소기업은 한참 못 미치고, 서울권(52.1퍼센트)과 지방의 차이도 뚜렷하다. 디자인 역량이 일부 대기업 안에 갇혀 산업 전반으로 퍼지지 않는 것이다. 중소기업 중심으로 디자인 수요를 확산하는 구조적 지원 없이는 이 정체가 풀리지 않는다.

23 디자이너 생애주기 경력개발 체계 구축
한국 디자인 인력의 평균 연령은 33.9세로, 전체 취업자 평균(44.7세)보다 10.8세 낮다. 이는 디자이너가 다른 직종보다 약 10년 일찍 현장을 떠난다는 의미다. 오랜 경험으로 쌓은 지식과 통찰이 사회에 다시 쓰일 기회가 없는 것이다. 독일의 디터 람스가 93세에도 현역으로 활동하듯, 초기 경력에서 멈추는 인적 자산을 사회 전반으로 잇는 경력 경로가 필요하다.

24 정부 R&D의 서비스 분야 투자 확대
서비스업이 GDP의 63.8퍼센트(2023)를 차지하는 나라에서, 정부 R&D의 서비스 분야 비중은 왜 5.5퍼센트(2021)에 그치는가. 기술을 만드는 데는 세계 2위로 투자하면서, 그 기술이 만드는 경험을 설계하는 데는 거의 투자하지 않는다. 제조업 대비 서비스업 노동생산성은 2024년 47.5퍼센트로 OECD 평균(95.7퍼센트)을 크게 밑돈다. 서비스 경험 설계를 R&D의 정당한 대상으로 인정하고 투자 구조를 재편해야 한다.

25 디자인 인력 양성 체계 질적 전환
한국은 매년 약 2만 명의 디자인 전공자를 배출하는데, 왜 디자인전문기업은 만성적 구인난을 겪는가. 우수 인재가 대기업 인하우스로 흡수되고, 학교 교육은 여전히 스타일링 위주여서 현장이 요구하는 서비스디자인·UX·문제해결 역량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AI가 스타일링·시안 작업을 빠르게 대체하면서 이 미스매치는 더 커진다. 양적 배출 규모보다, 산업 수요에 맞는 역량을 무엇으로 기를지를 국가 차원에서 정의해야 한다.

26 수출 경쟁력을 위한 패키지 디자인 지원 체계 구축
내용물이 같아도 패키지 하나로 매출이 무너질 수 있다. 트로피카나는 2009년 패키지만 바꿨다가 두 달 만에 매출이 20퍼센트 급감하고 5,000만 달러 이상을 잃었다. K-푸드+ 수출이 2024년 130억 달러로 역대 최고를 기록한 지금, 다음 경쟁력은 패키지에서 나온다. 한류가 만든 관심을 진열대 앞에서 구매로 전환하려면, 수출 중소기업의 패키지 디자인 경쟁력을 끌어올려야 한다.

사회적 가치·포용

27 포용디자인 기준 의무화
자막은 청각장애인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시끄러운 식당과 지하철에서 모두가 쓴다. 소수를 위한 설계가 모두의 표준이 되는 이 커브컷 효과에도 불구하고, 왜 배제는 계속되는가. 영국 조사에서 웹사이트의 95.9퍼센트(2026)가 접근성 기준을 위반했고, 장애인의 구매력(퍼플 파운드)은 약 2,740억 파운드에 이른다. 한국이 65세 이상 20퍼센트의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지금, 극단적 사용자를 설계의 시작점으로 삼는 포용 기준을 의무화해야 한다.

28 초고령사회 대응 디자인 전략 수립
2024년 12월, 한국의 65세 이상 인구가 1,024만 명을 넘어 전체의 20퍼센트에 도달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공공서비스와 도시 인프라는 여전히 평균적 중장년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다. WHO 노인친화도시 네트워크에 57개국 1,739개 도시가 가입한 사이, 한국에는 국가 차원의 통합 전략이 없다.

29 지속가능디자인 산업 전환
제품·건축·서비스가 평생 만들어내는 환경 영향의 최대 80퍼센트가 설계 단계에서 결정된다(EU 집행위). 그렇다면 탄소중립과 순환경제는 결국 어떻게 설계하느냐의 문제다. 그런데 한국은 지속가능디자인을 여전히 외관 개선이나 캠페인 수준으로 다루고, R&D·공공조달·산업 표준에 설계 전략이 통합되어 있지 않다. EU가 설계 단계의 지속가능성을 의무로 규율하기 시작한 흐름에 맞춰, 디자인을 환경 전략의 축으로 삼아야 한다.

30 사회적 약자 중심의 정책 설계 체계화
복지 제도는 양적으로 확대돼 왔는데, 왜 정작 도움이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는 닿지 않는가. 현재의 정책 설계는 평균적 사용자에 맞춰지기 쉽고, 실질적 형평성을 확보하는 장치가 미비하다. 미국이 2023년 23개 연방기관에 형평성 계획을 도입했다가 행정명령 폐지로 중단된 사례는, 형평성을 한시적 조치에 의존할 때의 취약성을 보여준다. 가장 소외된 사람도 이용할 수 있도록, 사회적 약자를 설계의 출발점에 두는 구조를 제도화해야 한다.

31 농업·1차산업 디자인 혁신
2026년 한국 농가 인구는 약 194만 명으로 사상 처음 100만 명대로 줄고, 그중 65세 이상이 56.6퍼센트에 이른다(KREI). 생산 기반이 흔들리는 사이, 소비자는 농산물 자체가 아니라 생산자의 이야기와 지역 문화를 함께 산다. 한 조사에서 소비자의 81.6퍼센트가 로코노미 식품을 구매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2024). 생산의 효율화는 기술의 영역이지만, 경험의 설계는 디자인의 영역이다.

V. 총론

32 공공부문 디자인 영역과 체계 재정의
세계 주요국 정부는 공공부문 디자인을 정책과 서비스를 설계하는 일로 다시 정의하고 있다. 영국은 공공디자인을 정책 의도를 달성하며 실행 리스크를 줄이는 과정으로 규정했고(PDER, 2025), 미국은 2025년 백악관에 최고디자인책임자와 국가디자인스튜디오를 신설했다. 그런데 한국은 디자인을 두 법·두 부처로 쪼개 시설·심미성의 문제에 가둬두고 있다. 무엇을 디자인으로 보느냐가 국가가 무엇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느냐를 결정한다. 이 과제는 그런 의미에서 01~31 과제를 묶는 총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