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 18. 23:16ㆍ서비스디자인/정책디자인
공공기관 평가·감사 부담 합리화
본업보다 무거운 평가가 혁신을 막는다
핵심 문제
한 공공기관이 2024년 받은 국정감사 요구 자료는 1,800건 이상. 건당 평균 4시간 소요. 총 7,200시간. 연간 근로일수 240일 기준, 3.7명이 1년 내내 국감 자료만 만드는 것과 같다. 여기에 경영평가 대응까지 더하면 기관 역량의 10% 이상이 본업이 아닌 곳에 소모된다. 이 숫자에 전국 공공기관 수를 곱하면 얼마인가. 그 돈이 모두 국민 세금이다.
* 이 블로그의 내용은 필자의 개인적 관점/제안이며, 한국디자인진흥원을 포함한 어떠한 기관의 입장도 대변하지 않습니다.
1. 현황과 문제점
국감 자료 1,800건 — 한 기관의 실제 경험
2020년 10월, 한 공공기관 홍보팀 담당자가 자신의 에세이에 구체적 수치를 기록했다. 국정감사 요구 자료가 한 해 1,800건을 넘었다. 건당 자료 작성에 최소 3~5시간이 소요됐다. 1건당 4시간으로 계산하면 7,200시간. 연간 근로일수 240일 기준으로 3.7명이 1년 내내 국감 대응 업무만 한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의원실마다 요구 양식과 항목이 제각각이어서 사전 정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10년치 보도자료를 정리해뒀어도 "언론 게재면 표시" 같은 항목 하나 때문에 전량 재조사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것이 한 기관의 에피소드가 아닌 구조적 문제임은 이 관찰이 2024~2025년의 정책 논의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하다. 한 기관이 2024년에도 1,800건 이상의 국감 요구 자료를 받았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중 삼중의 평가 구조
공공기관이 받는 평가는 국정감사 하나가 아니다. 기획재정부 경영평가, 소관 부처 평가, 감사원 감사, 국정감사가 겹친다. 각각의 평가는 각각의 자료를 요구하고, 각각의 기준으로 진행된다. 기관은 이 모든 평가에 동시에 대응해야 한다. 경영평가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국감 자료를 준비하면서, 부처 평가 자료를 따로 제출한다. 이 자료들이 서로 연계되지 않는다. 같은 성과가 다른 양식에 반복 작성된다. 이것이 기관 역량의 10% 이상을 소모하는 구조의 실체다.
평가가 혁신을 막는 이유
평가 부담의 문제는 단순한 행정 비효율이 아니다. 혁신의 구조적 억제다. 공공기관 혁신팀은 대부분 경영평가·리스크 관리 기능과 병합되어 운영된다. 혁신을 설계하고 실험하는 조직이 아니라, 타 부서의 실행을 평가·관리하는 부서로 기능한다. 혁신 실험은 실패할 수 있다. 그런데 경영평가에서 실패는 감점이다. 안전한 길은 검증된 방식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 인센티브 구조에서는 혁신이 일어날 수 없다. 평가 지표가 혁신을 죽인다. 서비스디자인 프로젝트나 정책 파일럿처럼 단기 성과 측정이 어려운 활동이 공공기관에서 자리잡기 어려운 이유도 같다. 2~3년의 호흡이 필요한 서비스 혁신이, 연간 단위 경영평가 주기에 맞춰 쪼개진다.
2025년 기획재정부의 인식 — 그리고 한계
2025년 9월 30일, 기획재정부는 공공기관운영위원회를 개최해 '2025년도 공공기관 경영평가편람 수정안'을 심의·의결했다. 이 수정안에는 "서비스 질 제고와 무관한 과도한 점수경쟁에 따른 비효율 방지 및 평가부담 완화"가 명시됐다. 방향은 맞다. 그러나 이번 수정은 배점체계 조정, 기관장 경영계약 이행실적 평가 도입, AI·혁신 가점 신설에 집중됐다. 국감 자료 요구 방식의 합리화나, 복수 평가 체계의 통합·연계는 이번 개정 범위에 포함되지 않았다.
2. 국내외 사례
🇰🇷 한국 — 경영평가 40년 역사와 반복되는 개편
한국의 공공기관 경영평가는 1983년 도입된 이후 40년 이상 운영됐다. 방만 경영을 막고 공공서비스를 개선하겠다는 취지는 정당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평가를 위한 평가로 변질되는 경향이 생겼다. 정부업무평가포털은 경영평가의 목표로 "공공기관의 자율·책임경영체계 확립 및 공공서비스 개선 유도"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 이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다른 이야기다. 2025년 편람 수정은 의미 있는 변화다. AI·혁신 가점 신설(각 1.5점)은 혁신 실험을 공식 인정하는 첫 발걸음이다. 그러나 평가 자료 요구의 중복·과잉 문제, 국감 요구 자료의 비표준화 문제는 이번 개편에서 다루지 못했다.
🇳🇿 뉴질랜드 — 결과 중심 성과관리와 평가 단순화
뉴질랜드는 공공부문 성과관리를 '투입·산출'이 아닌 '결과(outcome)'와 '영향(impact)' 중심으로 전환하는 개혁을 지속해왔다. 어떤 서류를 제출했는가보다 실제로 시민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측정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평가 기준이 단순하고 명확해야 한다. 복잡한 서류 작성보다 실질 성과 달성에 인센티브가 집중된다. OECD 2025 정부 개요(Government at a Glance 2025)는 뉴질랜드의 이 접근을 성과 지향 거버넌스의 사례로 인용한다.
🇬🇧 영국 — National Audit Office, 위험 기반 감사
영국 국가감사원(NAO)은 '위험 기반 감사(Risk-based Audit)' 방식을 채택한다. 모든 기관을 동일한 강도로 감사하지 않는다. 리스크가 높은 기관·사업에 감사 자원을 집중하고, 잘 운영되는 기관에는 자율성을 부여한다. 이것이 감사의 억제 부담을 줄이면서 실질적 통제 효과를 높이는 방식이다. 영국 GDS(정부디지털서비스)처럼 혁신 실험을 수행하는 조직은, 일반 기관에 적용되는 표준 감사 기준과 다른 '혁신 조직 맞춤 기준'을 적용받는다. 실험 실패가 감사 지적으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가 혁신을 가능하게 한다.
🇦🇺 호주 — 정책 실험 면책과 혁신 보호
호주는 공공부문 혁신을 위해 사전 승인된 실험·파일럿 사업에 대한 감사 면책 조항을 도입했다. 잘 설계된 실험이 실패하더라도 담당자가 감사 지적을 받지 않는 구조다. 이것이 '실패 위험 때문에 혁신을 시도하지 않는' 공직 문화를 바꾸는 제도적 장치다. 호주 공공서비스위원회(APSC)는 혁신 친화적 평가 환경 조성을 공공부문 개혁의 핵심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 스웨덴 — 기관 자율성과 결과 책임의 균형
스웨덴 공공기관은 '기관 자율성(Agency Autonomy)'이 높다. 정부는 기관이 달성해야 할 목표(결과)를 설정하고, 어떻게 달성할지(과정)는 기관 자율에 맡긴다. 국정감사식의 세부 자료 요구보다 연간 성과 보고가 중심이다. 과정에 대한 통제보다 결과에 대한 책임이 강조된다. 이 구조가 가능한 것은 기관이 목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 목표 달성을 측정하는 명확한 지표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제는 목표와 지표가 명확하지 않아, 과정 전체를 감시하는 방식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3. 제안
법
- 국정감사법 또는 국정감사 운영 규칙 개정 — 자료 요구 표준화: 국감 자료 요구 형식을 의원실별로 임의 요구하는 방식에서, 표준 양식 기반으로 전환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다. 동일 자료를 다른 형식으로 중복 요구하는 것을 제한하는 조항을 신설한다.
- 정책 실험 면책 조항 법제화: 호주 모델처럼, 사전 승인된 정책 실험·파일럿 사업이 실패하더라도 담당자와 기관이 경영평가·감사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법령에 명시한다.
제도
- 국감·경영평가 연계·통합 체계 구축: 경영평가가 요구하는 자료와 국감이 요구하는 자료를 최대한 통합한다. 기관이 한 번 작성한 성과 자료가 국감과 경영평가 모두에 활용될 수 있는 표준 데이터 체계를 구축한다. 동일한 자료를 여러 채널에 반복 제출하는 비효율을 구조적으로 해소한다.
- 혁신 활동 독립 평가 지표 신설: 2025년 편람 수정에서 도입된 AI·혁신 가점을 확대해, 실험·파일럿·서비스디자인·공공서비스 개선 시도를 독립적인 평가 항목으로 공식화한다. '학습과 실험(Learning & Experimentation)' 성과 지표를 정량 지표와 병행 운영한다.
- 위험 기반 감사 원칙 도입: 영국 NAO처럼, 모든 기관에 동일한 감사 강도를 적용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리스크 수준에 따라 감사 자원을 차등 배분하는 원칙을 국내 감사 체계에 도입한다.
정책
- 결과 중심 평가로의 전환: 뉴질랜드처럼, 공공기관 평가 기준을 서류 제출·절차 준수 중심에서 실질 서비스 성과·시민 경험 개선 중심으로 전환한다. "무엇을 작성했는가"에서 "무엇을 이루었는가"로 평가 언어를 바꾼다.
- 공공기관 평가 비용 측정 및 공개: 각 공공기관이 경영평가·국감 대응에 투입하는 인력·시간·비용을 정기적으로 집계하고 공개한다. "3.7명이 1년 내내 국감 자료만 만든다"는 수치가 전국 기관으로 집계되면, 개선 압력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 혁신 조직의 평가·감사 분리 운영: 공공기관 내 혁신 부서를 경영평가·리스크 관리 기능에서 분리해 독립적으로 운영한다. 혁신팀이 혁신을 설계하고 실험할 수 있는 조직적 위상과 권한을 부여한다.
사업
- 국감 자료 디지털 표준화 플랫폼 구축: 공공기관의 핵심 성과 정보를 표준 형식으로 상시 공개하는 데이터 포털을 구축한다. 국감 의원실이 이 포털에서 필요한 정보를 직접 조회하면, 기관의 반복 작성 부담이 줄어든다. 데이터 공개가 국감 자료 요구를 대체하는 구조다.
- 경영평가 대응 시간 측정 표준화: 각 공공기관이 경영평가·국감 대응에 투입하는 시간을 측정하는 표준 방법론을 개발한다. 이것이 제도 개선의 정량적 근거가 된다.
4. 기대효과
단기: 국감 자료 요구 표준화만으로도 기관당 연간 수백~수천 시간의 행정 부담이 줄어든다. 절약된 시간이 실제 국민 서비스 개선에 투입된다. 혁신 실험 면책 조항이 도입되면 파일럿 사업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낮아진다.
중기: 국감·경영평가 연계로 기관의 중복 자료 작성이 줄어든다. 혁신 활동이 평가 가점으로 인정되면서 서비스디자인·파일럿 실험이 늘어난다. 경영평가가 서류 경쟁에서 실질 성과 경쟁으로 전환된다.
장기: '평가를 위한 평가'에서 '국민을 위한 운영'으로 공공기관 문화가 전환된다. 평가 부담이 줄어든 공간에서 혁신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스웨덴처럼 기관이 목표를 자율적으로 달성하고 결과로 책임지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 포스팅과 연결된 주제
미래 사회문제 대응형 공공조직 재설계 — 평가 구조 개혁과 조직 혁신은 함께 가야 한다
공직 순환보직 제도 개선 — 단기 보직과 연간 평가는 같은 뿌리의 문제
공공서비스디자이너 직제 신설 — 평가 부담이 줄어야 혁신 실험이 가능하다
정책 R&D 도입 의무화 — 실험과 학습이 평가받아야 R&D가 작동한다
참고 자료: 기획재정부, 「2025년도 공공기관 경영평가편람 수정」(2025.9.30. 공공기관운영위원회 의결) — "서비스 질 제고와 무관한 과도한 점수경쟁에 따른 비효율 방지 및 평가부담 완화" 명시 / 정부업무평가포털, 공기업·준정부기관 경영평가 제도 소개 / OECD, "Government at a Glance 2025" — 뉴질랜드 결과 중심 성과관리 인용 / UK National Audit Office, Risk-based Audit 방식 / Australian Public Service Commission, 혁신 친화적 평가 환경 구축 과제 / 윤성원, 『다시 디자인』(2025) — 2020.10.4. 에세이 '엎친 데 덮친 격, 국정감사와 공공기관 평가' (1,800건·3.7명 수치 원출처) / 윤성원, 『모두의 질문Q』(2025) — 2024년 기준 1,800건 국감 자료 요구, 기관 역량 10% 소모 분석 / 한국디자인진흥원, 『디자인이 궁금해』(2022) / 윤성원, 『보이지 않는 서비스 보이는 디자인』(2025)
2026.05.17. 윤성원 + 클로드
'서비스디자인 > 정책디자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14. 정책디자인랩 법제화 (0) | 2026.05.18 |
|---|---|
| 13. 정책 R&D 도입 의무화 (0) | 2026.05.18 |
| 12. 미래 사회문제 대응형 공공조직 재설계 (0) | 2026.05.18 |
| 10. 공직 순환보직 제도 개선 (0) | 2026.05.18 |
| 09. 공무원 디자인 교육 체계 수립 (0) | 2026.05.18 |
| 08. 공공서비스디자이너 직제 신설 (0) | 2026.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