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미래 사회문제 대응형 공공조직 재설계

2026. 5. 18. 23:17서비스디자인/정책디자인

미래 사회문제 대응형 공공조직 재설계

새로운 문제에는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다


핵심 문제

공공기관 내 '혁신팀'이 있다. 그런데 그 팀은 새로운 정책을 설계하지 않는다. 타 부서의 실행 계획을 '혁신적'이라고 포장하는 역할을 한다. 혁신조직이 혁신을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처음부터 권한이 없는 구조로 설계됐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다. 기후위기·초고령화·지방소멸·AI 전환 같은 새로운 사회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공공기관을 설계할 때,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기업 설계를 위한 컨설팅은 수백 개지만, 공공기관 설계를 위한 전문 기관은 없었다.

* 이 블로그의 내용은 필자의 개인적 관점/제안이며, 한국디자인진흥원을 포함한 어떠한 기관의 입장도 대변하지 않습니다.

 

1. 현황과 문제점

혁신조직이 혁신하지 못하는 구조

공공기관 대부분은 '혁신팀', '혁신기획관', '전략기획팀' 같은 이름의 조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조직들은 실질적으로 혁신을 설계하는 권한이 없다. 혁신조직이라 불리는 대부분의 팀은 경영평가·리스크 관리 기능과 병합된 구조로 편성되어 있다. 이들은 혁신을 실행하는 조직이 아니라, 오히려 타 부서의 실행을 평가·관리하는 부서로 존재한다. 혁신의 방향을 잡기보다는 결과를 점검하고 서류를 정리하는 부서로 기능한다. 이는 처음부터 혁신조직이 갖춰야 할 기획력·실험 권한·조정 권한이 부여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디자이너도 이 안에서 '전문가'가 아닌 '외부 자문'이나 '실행 위탁 대상'으로 취급된다. 혁신의 실질적 설계 권한은 여전히 행정 내부자의 손에 있으며, 디자인 기반 접근은 형식적 '참조'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문제에 낡은 조직 — 구조적 불일치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기존 공공조직은 예측 가능하고 반복적인 문제를 처리하도록 설계됐다. 정해진 절차대로 민원을 처리하고 예산을 집행하는 구조다. 그런데 지금 공공이 마주하는 문제들은 그 구조로 해결할 수 없다. 기후위기, 초고령화, 지방소멸, 디지털 전환, 인구절벽. 이 문제들은 여러 분야가 얽혀있고, 해결책이 불명확하며, 시도하고 실패하면서 배워야 하는 복잡계 문제다. 단일 부처가 선형적 절차로 해결할 수 없다. 복잡계 문제를 단순계 구조로 풀려고 하는 것. 이것이 한국 공공조직의 구조적 한계다.

공공기관 설계를 위한 전문 영역의 부재

기업을 설계하는 비즈니스 디자인은 전문화된 분야다. MBA, 경영 컨설팅, 스타트업 생태계 전체가 이것을 지원한다. 그런데 공공기관을 설계하는 전문 분야는 사실상 없었다. 새로운 사회문제가 등장할 때 새로운 공공기관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그 기관을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론과 전문성이 없다. 과거 조직 구조를 그대로 복사해서 새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새로운 문제에 새로운 조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유다.

2. 국내외 사례

TIAL — 공공기관 설계를 위한 최초의 전문 기관 (2024)

2024년 1월, 제프 멀건(Geoff Mulgan) UCL 교수와 유하 레파넨(Juha Leppänen), 제시카 세든(Jessica Seddon)이 TIAL(The Institutional Architecture Lab)을 출범시켰다. 록펠러 재단의 초기 지원을 받아 시작됐다. TIAL은 명확한 문제 인식에서 탄생했다. "비즈니스 설계에는 수백 개의 전문 기관이 있지만, 새로운 공공기관을 만들려는 정부가 찾아갈 곳이 없다." 현재 TIAL은 UNDP, 다양한 국가 정부, 도시들과 함께 기후·AI·정신건강·일자리 같은 2020년대의 핵심 과제에 대응하는 새로운 공공기관을 설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TIAL이 제시하는 새로운 공공기관 설계 원칙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전통적 피라미드 조직도 대신 네트워크·균사체(mycelium) 같은 다양한 구조 모델을 활용하는 '동적 은유(Dynamic Metaphors)', 데이터와 집단 지성을 조직 설계의 중심에 놓는 '공유 지능(Shared Intelligence)', 변화하는 사회적 필요에 실험·적응·진화할 수 있는 구조인 '적응성(Adaptability)'.
* TIAL 에 대한 소개글 : 미래 공공부문 조직 디자인하기 - 2024.1.22. 제프 멀건 

🇫🇮 핀란드 Sitra + TIAL — "우리 행정 구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조건에서 만들어졌다"

핀란드 국가혁신기금 Sitra는 2025년 TIAL과 공동 보고서 "Rethinking Institutions in an Era of Demographic Transition"을 발표했다(2025년 9월). 핵심 진단은 "우리의 행정 구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조건에서 만들어졌다. 이것이 고령화 같은 장기 과제를 다루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TIAL의 공동 창업자 유하 레파넨(Juha Leppänen)은 이렇게 말한다. "핀란드의 많은 기관들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존경받는다. 핀란드 종합학교 시스템이 좋은 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기관을 만들기 위해 같은 상상력과 노력이 필요하다."
보고서는 '제도적 혁신(Institutional Innovation)'을 "거버넌스 구조와 운영 모델을 의도적이고 전략적으로 혁신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이것이 핀란드가 인구구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핵심 역량이라고 강조한다.
Sitra는 2025년 신전략을 발표하며 공공부문 생산성 향상에 5,000만 유로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2030년까지 핀란드 공공부문이 기술 활용 면에서 세계 최고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 덴마크 — MindLab에서 Disruption Task Force로

덴마크 MindLab(2002~2019)은 재무부·내무부·경제부 3개 부처가 공동 운영한 세계 최초의 공공부문 디자인 혁신 랩이었다. MindLab이 2019년 총리 직속 'Disruption Task Force'로 개편된 것이 중요한 교훈을 준다. '랩(실험)'에서 '태스크포스(실행)'로 역할이 확장됐고, 위상이 총리실 직속으로 격상됐다. 공공 혁신 조직이 살아남으려면 상위 의사결정 구조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실험이 실행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이 핵심 교훈이다.

🇦🇺 호주 — TACSI, 다학제 팀이 사회문제를 직접 해결

호주 TACSI(The Australian Centre for Social Innovation)는 2009년 설립된 독립 비영리기관으로, 사회학자·인류학자·서비스디자이너·사회복지사·재무 전문가가 함께 호주 사회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아이디어를 실행한다. TACSI의 모델이 주는 시사점은 혁신 조직이 정부 내부에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독립 기관으로서 정부와 협력하면서, 공공 혁신에 필요한 다학제 역량을 갖추는 방식이다.

🇰🇷 한국 — 사회혁신추진단, 시도와 한계

한국에도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문재인 정부 시기 행정안전부 산하 '사회혁신추진단'이 시민 참여형 정책 실험을 진행했고, 서울시 혁신기획관도 초기 실험적 형태로 운영됐다. 그러나 이 조직들은 조직의 위상과 권한이 불분명했고, 제도화 되지 못했기에 리더십 교체와 함께 동력을 잃었다.

3. 제안

  • 공공기관 조직 재설계 정례화 법적 근거 마련: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 기관의 설립 목적 적합성을 5~7년 주기로 재검토하고, 사회 변화에 따라 조직을 재설계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신설한다. '조직이 생기면 없어지지 않는' 관성을 법적으로 제어한다.
  • 실험적 공공기관 설립 특례 마련: 특정 사회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한시적·실험적으로 운영되는 공공조직을 설립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만든다. 성과가 확인되면 제도화하고, 효과가 없으면 해산하는 '파일럿 공공기관' 개념이다.

제도

  • 한국형 TIAL 설립 — 공공기관 설계 전문 기관: TIAL처럼, 행정학·디자인·사회혁신이 통합된 공공기관 설계 싱크탱크를 설립한다. 새로운 사회문제에 대응하는 공공조직의 설계 방법론을 개발하고 적용하는 전문 기관이다. 덴마크처럼 기존 조직(KIDP, 한국행정연구원 등)과 협력해 시작할 수 있다.
  • 혁신조직 독립 위상 보장: 현재 경영평가·리스크 관리와 병합된 혁신팀 구조를 해소한다. 혁신조직을 기관장 직속으로 배치하고, 독립적 예산·인사 권한을 부여한다. 위상이 보장될 때 혁신이 작동한다.
  • 다학제 팀 구성 제도화: TACSI처럼, 공공문제를 해결하는 팀이 행정직 공무원만이 아닌 사회학자·서비스디자이너·데이터과학자·행동경제학자로 구성될 수 있도록 외부 전문가 결합을 제도화한다. 단기 자문이 아닌 팀의 정규 구성원으로.

정책

  • Sitra-TIAL 보고서 참조 — 한국형 제도적 혁신 역량 구축: "우리 행정 구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조건에서 만들어졌다"는 핀란드의 자기 진단은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기후·고령화·지방소멸 같은 장기 복잡계 과제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공공기관 설계를 국가 의제로 공식화한다.
  • 복잡계 문제 대응 조직 설계 원칙 개발: TIAL의 방법론처럼, 단선형 위계 구조가 아닌 네트워크·협력 기반 구조가 복잡계 문제 해결에 더 효과적임을 조직 설계 원칙으로 명시한다. 기후·고령화·지방소멸 대응 기관을 새로 설계할 때 이 원칙을 적용한다.
  • 실험-학습 문화 정착을 위한 KLEI 지표 도입: KPI(성과 달성) 외에 "무엇을 배웠는가"를 측정하는 학습 지표(KLEI: Key Learning & Experimentation Indicator)를 공식화한다. 실패를 허용하고 학습이 가능한 문화의 제도적 기반이다.

사업

  • 공공기관 리디자인 파일럿 사업: 3~5개 기관을 선정해 기존 조직을 처음부터 다시 설계하는 파일럿을 진행한다. TIAL의 방법론, 서비스디자인 접근법, 행동과학을 통합 적용한다. 결과를 공개해 다른 기관이 학습할 수 있는 사례를 만든다.
  • 국제 공공혁신 기관 네트워크 참여: TIAL, Sitra, TACSI, 덴마크 Disruption Task Force 등 세계 공공혁신 기관들의 국제 네트워크에 한국 기관이 참여한다. 지식 공유와 공동 연구를 통해 한국 공공조직 혁신의 속도를 높인다.
  • 공공기관 조직 진단 서비스 구축: '현재 이 조직 구조는 어떤 시대를 위해 설계됐는가'를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기관 진단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Sitra-TIAL 보고서처럼, 조직 자체를 설계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을 공공 문화로 정착시킨다.

4. 기대효과

단기: 혁신조직의 독립적 위상과 권한이 보장되면서 실질적 조직 혁신 실험이 시작된다. 공공기관 조직 재설계 진단이 이루어지면서 "왜 이 조직이 이 구조인가"를 묻기 시작한다.

중기: 한국형 TIAL이 설립되어 새로운 사회문제에 대응하는 공공기관 설계 방법론이 축적된다. 기후·고령화·지방소멸 등 복잡계 문제에 특화된 조직 모델이 시험된다. KLEI 지표가 정착되면서 실패를 통한 학습이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문화가 형성된다.

장기: 공공조직 설계가 전문 영역으로 자리잡는다. 새로운 사회문제가 등장할 때 그에 맞는 조직을 설계하는 방법론과 전문가가 존재하게 된다. 핀란드 Sitra처럼 "미래를 선행 예측하고 실험하는" 기관이 한국에도 자리잡으면서, 공공조직이 사회 변화의 뒤를 쫓는 것이 아니라 앞서가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 포스팅과 연결된 주제

공공기관 평가·감사 부담 합리화 — 평가 구조 개혁과 조직 혁신은 함께 가야 한다
공공서비스디자이너 직제 신설 — 혁신 조직에 배치될 핵심 인력
정책 R&D 도입 의무화 — 혁신 조직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제도
정책디자인랩 법제화 — 혁신 조직의 실험 공간

참고 자료: Geoff Mulgan, "Designing future public institutions"(geoffmulgan.org, 2024.1.22.) — TIAL 출범 발표 / TIAL 공식 사이트(tial.org) — "비즈니스 설계에는 수백 개의 전문기관이 있지만 공공기관 설계 전문기관은 없었다" / TIAL & Sitra, "Rethinking Institutions in an Era of Demographic Transition"(2025.9.) — "우리 행정 구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조건에서 만들어졌다" / Sitra, 공공부문 생산성 5,000만 유로 투자 발표(2025.11.) — 2030년 핀란드 공공부문 세계 최고 목표 / University of Bath IPR Blog, "Designing new public institutions for the UK in the 2020s and beyond"(2024.5.29.) — TIAL의 5대 설계 원칙 / TACSI 공식 사이트 — 다학제 팀 사회혁신 모델 / 윤성원, 『다시 디자인』(2025) / 한국디자인진흥원, 『디자인이 궁금해』(2022) / 윤성원, 『보이지 않는 서비스 보이는 디자인』(2025) / 윤성원, 『모두의 질문Q』(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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