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 18. 23:17ㆍ서비스디자인/정책디자인
정책 R&D 도입 의무화
만들기 전에 연구하고, 집행하기 전에 검증하라
핵심 문제
기업은 신제품을 출시하기 전에 수년간 R&D를 한다. 그런데 정책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정책은 직관·관행·정치적 판단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수요자의 실제 삶을 이해하는 연구 없이, 파일럿 없이, 검증 없이 확정되고 집행된다. 의도는 좋지만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는 정책이 반복되는 이유다. 정책에도 R&D가 있어야 한다. '만들고 집행하는' 구조에서 '이해하고 실험하고 검증하고 확산하는' 구조로.
* 이 블로그의 내용은 필자의 개인적 관점/제안이며, 한국디자인진흥원을 포함한 어떠한 기관의 입장도 대변하지 않습니다.
1. 현황과 문제점
정책에 R&D가 없다
한국의 연간 R&D 투자는 131조 원(2024년). GDP 대비 5.13%로 OECD 세계 2위다. 기술 개발에 이만한 투자를 하는 나라가 왜 정책 개발에는 같은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가.
정책 수립 과정을 보면 이렇다. 문제 상황이 보고된다. 해결책 방향이 결정된다. 법령이 마련된다. 예산이 편성된다. 집행된다. 그리고 1~2년 후 효과를 평가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수요자가 실제로 어떻게 생활하는가'를 관찰하는 단계, 다양한 해결책을 소규모로 실험하는 단계, 어떤 것이 더 효과적인지 비교 검증하는 단계가 없다.
기업이 신제품을 출시할 때 거치는 과정 — 사용자 리서치, 프로토타이핑, 파일럿 테스트, 피드백 반영, 개선 — 이 정책 개발에는 없다. 이것이 "좋은 의도로 만든 정책이 현장에서 실패하는" 반복의 구조적 원인이다.
국민디자인단 — 정책 R&D의 단초
행정안전부와 KIDP가 공동 운영하는 공공서비스디자인사업(국민디자인단)은 그나마 정책 영역에서 R&D라 부를 수 있는 요소를 갖춘 드문 사례다. 정책 수요자인 국민·서비스디자이너·공급자인 공무원이 정책 과정 전반에 함께 참여해 서비스디자인 방법으로 공공서비스를 개발·발전시킨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 사업의 지원 규모는 과제당 서비스디자이너 자문비 명목으로 최대 600만 원 이내다. 충분한 연구개발이라고 보기 어려운 수준이다. 2024년 공공서비스디자인사업 성과사례집이 발간될 만큼 성과가 쌓였지만, 이것이 정부 전체 정책 개발 방식의 표준이 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예외적 사업에 머물고 있다.
정책 실패의 비용
정책 R&D 부재가 초래하는 비용은 측정되지 않는다. 작동하지 않는 복지 사업에 투입된 예산, 이용하지 않는 공공시설 건설비, 현장에서 외면받는 정책의 집행 비용. 이 비용들이 더해지면 정책 R&D에 투자하는 비용보다 훨씬 크다. 반대로, 사전 검증 없이 전국 확대된 정책이 문제를 드러내고 수정될 때 드는 비용 — 법령 개정, 예산 낭비, 시민 신뢰 하락 — 도 있다. 이것이 "정책 R&D는 비용이 아니라 투자"라는 논거의 핵심이다.
혁신조직의 역설
공공기관 혁신팀이 혁신을 실행하지 못하는 구조(12번 참조)와 정책 R&D 부재는 같은 뿌리다. 혁신 실험을 시도해도 경영평가에서 불이익을 받는 구조(11번 참조), 담당자가 1.5~2년마다 교체되는 구조(10번 참조)에서는 R&D가 불가능하다. 정책 R&D를 도입하려면 구조도 함께 바뀌어야 한다. 실험을 허용하는 평가 체계, 전문성이 축적되는 보직 구조, 실험 권한을 가진 혁신조직이 함께 작동해야 정책 R&D가 실질적으로 가능해진다.
2. 국내외 사례
🇰🇷 한국 — 공공서비스디자인사업의 성과와 한계
2024년 공공서비스디자인사업 성과사례집에는 디자인 방법론을 통해 개선된 다양한 공공서비스 사례가 담겼다. 국민·디자이너·공무원 3자 참여형 정책 개발 모델로 2014년부터 10년간 2,000여 개 과제가 수행됐다. 이것이 한국에서 정책 R&D에 가장 근접한 실천이다. 그러나 이 사업의 한계도 분명하다. 과제당 지원 규모가 작아 충분한 리서치와 파일럿이 어렵다. 사업이 특정 공공서비스 개선에 집중되어 있어 주요 국가 정책에 적용되지 않는다. 전국 단위 정책이 확정된 후 서비스 구현 단계에서만 디자인이 개입하는 경우가 많다. 정책 기획의 가장 초기 단계 —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 방향을 설정하는 단계 — 에 정책 R&D가 없다.
🇬🇧 영국 — What Works Centres, 근거 기반 정책의 생태계
영국은 "무엇이 효과가 있는가(What Works)"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독립 기관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교육(Education Endowment Foundation), 복지(What Works for Children's Social Care), 형사 사법(What Works Centre for Crime Reduction), 지역 성장(What Works Centre for Local Economic Growth) 등 분야별 What Works Centre가 운영된다.
이 기관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현장 실험을 설계하고 데이터를 수집한다. 어떤 개입이 어떤 조건에서 효과가 있는지 분석한다. 정책 결정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근거를 생산한다. 정책이 집행되기 전에 효과를 검증하는 구조다.
2025년 영국 정부의 공공 디자인 증거 보고서(Public Design Evidence Review)는 디자인 방법론을 이 근거 기반 접근의 핵심 도구로 명시한다. Policy Lab이 수행하는 시나리오 프로토타이핑·에스노그라피 리서치·참여 설계가 What Works 접근과 결합된다.
🇺🇸 미국 — 행정명령 13985, 근거 구축 및 정책 투명성
미국은 2018년 '증거 기반 정책 수립에 관한 재단법(FEPA, Foundations for Evidence-Based Policymaking Act)'을 제정했다. 이 법은 모든 연방기관이 근거(Evidence) 구축 계획을 수립하고, 정책 평가·통계·프로그램 수행 등을 조율하는 최고 평가 책임자(Chief Evaluation Officer)를 임명하도록 의무화했다. 정책 개발에 체계적인 증거 수집과 평가를 제도적으로 의무화한 것이다.
이와 연계해 미국 행정관리예산처(OMB)는 '학습 의제(Learning Agenda)'를 연방기관에 의무화했다. "우리 기관이 더 잘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매년 공식화하는 절차다. 정책 실행 전에 필요한 지식이 무엇인지를 먼저 정의하는 구조다.
🇩🇰 덴마크 — 시민을 사전 요건으로 포함한 정책 파일럿
덴마크 MindLab(현 Disruption Task Force)은 제안서 평가 단계에 시민 인터뷰와 공동 아이디어 도출을 사전 요건으로 포함했다. 정책이 확정되기 전에 수요자가 실제로 어떻게 문제를 경험하는지 이해하는 과정이 의무화된 것이다.
이것이 정책 R&D의 핵심 원리다. "이 정책이 실제로 필요한가"를 수요자의 삶에서 먼저 검증한다. 덴마크는 코펜하겐 시민 참여를 통한 공공 공간 설계, 고령자 복지 서비스 파일럿 등에서 이 방법론을 지속 적용하고 있다.
🇫🇮 핀란드 — Sitra, 공공부문 생산성 투자와 정책 실험
핀란드 국가혁신기금 Sitra는 2025년 공공부문 생산성 향상에 5,000만 유로를 투자하며 정책 실험을 제도화하고 있다. Sitra는 새로운 정책 방식을 파일럿으로 먼저 실험하고, 효과가 확인되면 전국으로 확산하는 방식을 원칙으로 한다. "실험을 시작해서 배우는 것"이 Sitra의 작동 방식이다. 알토대학과 협력한 DfG(Design for Government) 과정도 정부 정책 과제에 디자인 리서치와 파일럿을 공식화하는 구조다.
🇦🇺 호주 — TACSI, 사회혁신의 파일럿-검증-확산 모델
호주 TACSI(The Australian Centre for Social Innovation)는 사회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작게 시도하고, 효과가 확인되면 확산하는 모델을 운영한다. 하나의 프로그램이 전국에 배포되기 전에 작은 규모로 파일럿을 거치고, 실패하면 학습해서 다음 버전을 만든다. 정책 R&D의 실천 모델이다.
3. 제안
법
- 근거 기반 정책 수립 촉진법 제정: 미국 FEPA처럼, 모든 일정 규모 이상의 정책이 집행 전에 근거 구축 계획을 수립하고, 사전 파일럿을 거치도록 의무화하는 법을 제정한다. '최고 평가 책임자(Chief Evaluation Officer)' 임명을 주요 부처에 의무화한다.
- 정책 실험 면책 조항 법제화: 11번(평가·감사 부담 합리화)과 연계해, 사전 승인된 정책 파일럿이 실패하더라도 경영평가·감사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법령에 명시한다. 실험을 허용하는 법적 보호막이 있어야 R&D가 가능하다.
제도
- 정책 기획 단계 'R&D 단계' 의무 포함: 일정 규모 이상의 신규 정책 기획 시 ①수요자 현장 리서치, ②복수 해결안 설계, ③소규모 파일럿, ④효과 비교 분석을 거치도록 행정 절차에 명시한다. 이 단계가 완료되지 않은 정책은 예산 편성에 제한을 둔다.
- '학습 의제(Learning Agenda)' 부처 의무화: 미국 OMB처럼, 각 부처가 연간 "우리가 더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공식화하는 학습 의제를 수립·공개한다. 정책 집행 전에 필요한 지식을 먼저 정의하는 구조다.
- 공공서비스디자인사업 지원 규모 현실화: 현재 과제당 최대 600만 원 수준인 지원 규모를 충분한 리서치·파일럿이 가능한 수준으로 확대한다. 동시에 이 사업이 공공서비스 개선에 국한되지 않고 국가 정책 기획 초기 단계에 적용될 수 있도록 역할을 확장한다.
정책
- 영국 What Works Centres 모델 도입 — 한국형 근거 생산 기관 구축: 교육·복지·지역성장·형사사법 분야에 독립적인 '무엇이 효과가 있는가(What Works)' 연구 기관을 설립한다. 이 기관들이 현장 실험을 설계하고, 근거를 생산하며, 정책 결정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형태로 제공한다.
- 덴마크 모델 참조 — 시민 참여를 정책 파일럿의 사전 요건으로 의무화: 주요 정책 기획의 사전 단계에 수요자 인터뷰·공동 아이디어 도출·프로토타입 테스트를 의무화한다. 정책이 확정되기 전에 수요자의 삶에서 검증하는 구조다.
- 핀란드 Sitra 모델 참조 — 파일럿-검증-확산의 표준화: 새로운 정책 방식은 전국 확대 전에 반드시 제한된 지역·대상에 파일럿을 운영하고 효과를 검증하는 절차를 표준화한다. "실험 없는 전국 확대"를 원칙적으로 금지한다.
- 정책 R&D 전담 예산 신설: 국가 R&D 예산의 일정 비율(0.1% 수준)을 정책 개발 R&D — 사용자 리서치, 프로토타이핑, 파일럿 운영, 효과 평가 — 에 할당하도록 국가재정법에 근거를 마련한다.
사업
- 정책 파일럿 플랫폼 구축: 새로운 정책 아이디어를 소규모로 실험하고 결과를 공유하는 플랫폼을 구축한다. 어떤 실험을 시도했고 무엇을 배웠는지를 정부 전체가 공유하는 학습 생태계를 만든다.
- 공공서비스디자인사업 '국가 정책 R&D 트랙' 신설: 기존 공공서비스 개선 중심의 국민디자인단 사업에, 국가 주요 정책 기획 초기 단계를 지원하는 'R&D 트랙'을 신설한다. 보건·복지·교육·기후 분야 주요 정책 5개를 선정해 파일럿 R&D를 수행하고 모델을 개발한다.
- 정책 R&D 성과 아카이브: What Works Centres처럼, 어떤 정책 개입이 어떤 조건에서 효과가 있었는지를 축적하는 공공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다. 이 데이터베이스가 다음 정책 기획의 출발점이 된다.
4. 기대효과
단기: 정책 기획 의무 R&D 단계가 도입되면서 일부 정책에서라도 파일럿이 먼저 실행된다. 공공서비스디자인사업의 지원 규모가 현실화되면서 충분한 리서치와 파일럿이 가능해진다. 정책 실험 면책 조항으로 담당자들의 심리적 실험 장벽이 낮아진다.
중기: 한국형 What Works Centres가 설립되어 근거 기반 정책의 생태계가 형성된다. '학습 의제'가 정착하면서 부처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먼저 파악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파일럿 없이 전국 확대되는 정책이 줄어들면서 대규모 정책 실패의 빈도가 낮아진다.
장기: "만들고 집행하는" 정책 문화에서 "이해하고 실험하고 검증하고 확산하는" 정책 문화로 전환된다. 한국의 정책 실효성이 높아지면서 공공 신뢰가 회복된다. 기술 R&D만큼 정책 R&D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행정 문화가 자리를 잡는다.
이 포스팅과 연결된 주제
공공기관 평가·감사 부담 합리화 — 실험이 평가 불이익이 되지 않아야 R&D가 가능하다
미래 사회문제 대응형 공공조직 재설계 — R&D를 수행하는 조직의 설계
정책디자인랩 법제화 — 정책 R&D의 상설 실험 공간
근거기반 정책 설계 정상화 — 정량 데이터를 넘어선 근거의 의미
참고 자료: 행정안전부·KIDP, 「2024 공공서비스디자인사업 성과사례집」(2025.9.) / KIDP, 공공서비스디자인사업 소개 — 2014~2024년 2,000여 개 과제, 600만 원 자문비 지원 / 미국, Foundations for Evidence-Based Policymaking Act(FEPA, 2018) / 미국 OMB, 연방기관 학습 의제(Learning Agenda) 의무화 지침 / UK What Works Centres 네트워크(교육·복지·형사사법·지역성장 등 분야별 기관) / UK Government, "Public Design in the UK Government: Evidence Review"(2025) / 핀란드 Sitra, 공공부문 생산성 5,000만 유로 투자(2025.11.) / 핀란드 Aalto University, Design for Government(DfG) 과정 / 호주 TACSI, 파일럿-검증-확산 사회혁신 모델 / 윤성원, 『보이지 않는 서비스 보이는 디자인』(2025) — 국민디자인단 정책 R&D 모델 소개 / 윤성원, 『다시 디자인』(2025) / 한국디자인진흥원, 『디자인이 궁금해』(2022) / 윤성원, 『모두의 질문Q』(2025)
2026.05.17. 윤성원 + 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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