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 19. 06:40ㆍ서비스디자인/정책디자인
사회적 약자 중심의 정책 설계 체계화
형식적 포용을 넘어 실질적 형평성을 담보하는 설계 구조
핵심 문제
공공서비스는 본래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의 설계는 평균적 사용자나 특정 계층에 맞춰지기 쉽다. 현재의 정책 설계 과정은 형식적으로만 '모두를 위한 것'을 표방할 뿐, 실질적 포용성과 형평성을 확보하는 장치가 미비하다. 좋은 공공서비스는 평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장 소외된 사람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 이 블로그의 내용은 필자의 개인적 관점/제안이며, 한국디자인진흥원을 포함한 어떠한 기관의 입장도 대변하지 않습니다.
1. 현황과 문제점
복지 사각지대 — 제도는 있지만 닿지 않는다
한국의 복지 제도는 양적으로 확대돼 왔다. 기초생활보장, 긴급복지, 의료급여, 에너지 바우처, 주거급여 등 다양한 제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제도들이 정작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닿지 않는 '복지 사각지대' 문제가 반복적으로 지적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복지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사회보장 개편 기초연구」는 이 구조를 명확히 짚는다. 2000년대 이후 다양한 사회안전망이 갖춰졌지만 근로빈곤층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사각지대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소득보장과 고용 안전망의 사각지대에 놓인 근로빈곤층이 안정적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긴급복지지원제도를 개편하고, 긴급복지지원제도와 국민취업지원제도를 연계하는 등 제도 간 정합성을 높여야 한다고 제안한다. 단순히 제도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사각지대에 처한 사람의 삶에서 출발해 제도를 연결하는 설계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보건복지부는 2023년 12월 「제1차 사회서비스 기본계획(2024~2028)」을 발표하며 '국민 누구나 필요할 때 누리는 질 높은 사회서비스'를 목표로 제시했다. 선언은 있다. 문제는 이 선언이 어떻게 실제 서비스 설계로 이어지는가다.
분절적 지원의 한계
교육부는 2023년 7월 19일 제6차 사회관계장관회의에서 '취약계층 지원을 위한 범사회부처 협업전략'을 발표했다. 그간 분절적으로 추진된 취약계층 지원 정책의 연속성·정합성을 높이기 위해 사회 분야 데이터 연계·활용과 중앙-지방-민간 협업체계 구축을 추진하고, 발굴–지원–예방·관리 전주기에 걸친 협업 체계를 세우겠다는 내용이다.
이 협업전략의 존재 자체가 현재의 문제를 드러낸다. 부처별로 따로 운영되는 지원 체계, 서로 연결되지 않는 데이터, 중앙-지방-민간 사이의 단절. 취약계층은 여러 창구를 각각 찾아다니며 복잡한 서식을 반복 작성해야 한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가장 복잡한 절차를 감내해야 하는 역설이다.
공공서비스가 불평등을 강화할 수 있는 구조
설계 과정에서 특정 집단의 요구만 반영되거나 고급화된 디자인이 우선되면, 모든 시민이 공평하게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공공서비스의 설계 실패는 모든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만, 그 피해는 가장 취약한 사람에게 가장 크게 집중된다. 터치포인트의 결함은 비교적 쉽게 드러나는 반면, 시스템 차원에서 잘못 설계된 구조는 사회적 약자가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문제 제기조차 하지 못한 채 따르게 만든다는 점에서 더 위험하다.
디자인 정의(Design Justice) — 새로운 프레임
디자인 정의(Design Justice)는 디자인 과정에서 소외되어 온 사람들이 설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MIT의 사샤 코스탄자-척(Sasha Costanza-Chock)이 저서 『Design Justice』(MIT Press, 2020)에서 체계화한 이 개념은, 누가 설계하고 누가 혜택을 받는지의 문제를 디자인의 핵심에 놓는다. 좋은 의도의 설계라도 누가 설계에 참여하느냐에 따라 기존의 권력 구조와 불평등을 오히려 재생산할 수 있다는 점이 핵심 통찰이다. 이 원칙은 모든 공공디자인 사업에 '사회적 약자의 관점'을 제도적으로 포함해야 한다는 정책적 함의로 이어진다.
2. 국내외 사례
🇰🇷 한국 — 범사회부처 취약계층 협업전략 (2023)
교육부 주관 제6차 사회관계장관회의(2023.7.19)에서 발표된 범사회부처 협업전략은 취약계층 지원의 발굴–지원–예방·관리 전주기에 걸친 협업 체계를 수립한 것이다. 데이터 연계를 통한 취약계층 발굴 강화, 범부처 정책 협력을 통한 누수 없는 지원, 데이터 기반 선제적 대응이 세 축이다.
방향성은 맞지만 실행 측면에서 과제가 많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2024년 사회서비스 정책의 전망과 과제」에서 "빠른 사회변동에 따른 인간다운 삶을 위협하는 사회적 위험이 확장·심화되고 사적 지지 체계가 약화되는 상황에서 관계성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서비스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 미국 — 형평성 정책의 부상과 후퇴, 그 교훈 (2021~2025)
미국은 2021~2024년 형평성 행정명령(EO 13985, 14091)을 통해 연방기관이 '형평성 행동계획(Equity Action Plans)'을 수립하고, 정책 결과를 인종·소득·지역·장애 여부로 분해해 불평등을 가시화하도록 했다. 2023년 23개 주요 연방기관이 계획을 발표했고, 조달·계약·보조금에서 소외 지역사회에 대한 장벽을 제거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 틀은 2025년 1월 정권 교체와 함께 관련 행정명령이 전면 폐지(EO 14148)되고 백악관 형평성 담당 조직도 해체되면서 사실상 중단됐다. 이 사례는 형평성을 행정명령에만 의존할 때의 취약성을 보여준다. 한국에 주는 함의는 분명하다. 형평성은 선언이나 한시적 행정 조치가 아니라 설계 절차·법제·평가지표로 제도화해야, 정권 변화와 무관하게 지속될 수 있다.
🇬🇧 영국 — 당사자 공동설계(Co-design)
영국 교통부(DfT)는 2024년 11월 '항공 접근성 태스크포스(Aviation Accessibility Task and Finish Group)'를 출범시켰다. 패럴림픽 챔피언 태니 그레이-톰슨(Baroness Tanni Grey-Thompson)이 의장을 맡았고, 항공사·공항 등 업계와 장애 당사자·소비자단체가 함께 권고안을 공동 개발해 2025년 발표했다. 자문(consultation)을 넘어, 당사자가 기준 설계의 공동 설계자로 참여하는 방식이다(국제민간항공기구(ICAO)도 이를 다른 나라가 참고할 만한 모델로 소개했다).
영국 정부의 디지털 서비스 표준(GOV.UK Service Standard)에도 같은 원칙이 담겨 있다. 첫 번째 기준이 '사용자와 사용자의 필요를 먼저 이해하라'인데, 여기서 사용자는 평균적 사용자가 아니라 서비스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 OECD — 사람 중심 사법 툴킷 (2025)
OECD가 2025년 11월 발표한 「사람 중심 사법 접근 툴킷(Toolkit for Access to Justice and People-Centred Justice Systems)」은 목적·문화, 서비스 설계·전달, 거버넌스 인프라, 시민 역량강화, 근거기반 기획의 5개 기둥으로 구성되며, 뉴질랜드를 비롯한 여러 나라 사례를 포함한다. 취약계층과 복합 필요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건강·주거·노숙·가정폭력 등 다른 공공서비스와의 경로를 연결하는 협업 메커니즘을 갖추고, 이해관계자가 아니라 대상 그룹과 공동으로 설계된 참여 전략을 사용하도록 권고한다.
🇪🇺 EU — 지속가능 전환의 형평성 보장 (EEA 2024)
유럽환경청(EEA)의 2024년 보고서 「지속가능 전환에서의 정의 실현(Delivering Justice in Sustainability Transitions)」은, 기후 위기 적응 전략의 모든 단계에 취약 집단을 의미 있게 참여시킬 것을 요구한다. 분배·절차·인정·회복의 여러 정의 차원을 고려해, 탈탄소화·에너지 전환·도시 재설계 과정에서 소외되는 집단이 없도록 하는 것을 정책 원칙으로 제시한다.
3. 제안
법
공공서비스 설계 형평성 평가 의무화: 일정 규모 이상의 공공서비스 신설·개편 시 '사회적 포용성 사전 영향 평가'를 의무화한다. 어떤 계층이 소외될 수 있는지를 기획 단계에서 점검하고 설계에 반영하는 절차를 행정절차법 또는 정부혁신 지침에 규정한다.
취약계층 공동설계 참여 법제화: 장애인·고령자·이주민·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하는 공공서비스는 해당 당사자가 기획 단계부터 공동 설계자로 참여하도록 규정한다. 자문(consultation)이 아닌 공동설계(co-design)를 법적 절차로 명시한다. 영국 항공 접근성 태스크포스가 그 운영 모델이 될 수 있다.
제도
디자인 정의(Design Justice) 원칙 도입: 모든 공공디자인 사업에 사회적 약자의 관점을 제도적으로 포함하는 원칙을 수립한다. 초기 조사 단계에서 다양한 사회적 배경의 시민 참여를 보장하고, 평가 기준에 포용성 지표를 포함한다.
사회적 포용성 지표 개발 및 적용: 공공디자인·공공서비스 평가에 사회적 포용성 지표를 도입한다. 서비스가 장애인·고령자·이주민·저소득층에게 실제로 작동하는지를 측정하는 별도 지표 체계를 개발한다.
범부처 취약계층 통합 지원 플랫폼 구축: 교육부의 범사회부처 협업전략을 넘어, 취약계층이 하나의 창구에서 자신에게 해당하는 지원을 모두 안내받고 신청할 수 있는 원스톱 시스템을 구축한다. 17번(공공서비스 기본값 대조정)과 연계해 자격이 되면 자동 연결되는 구조로 발전시킨다.
정책
'약자 우선(Vulnerable First)' 서비스 설계 원칙 채택: 새로운 공공서비스를 설계할 때 "이 서비스가 가장 취약한 이용자에게 작동하는가"를 먼저 검토하는 원칙을 채택한다. 평균적 사용자가 아닌 가장 소외된 사람의 경험이 설계의 기준점이 된다.
당사자 참여 설계 표준 프로세스 개발: 장애인·고령자·이주민 등 집단별로 공동설계 방법론을 표준화한다. 어떤 기관이 어떤 서비스를 설계할 때 어떤 절차로 당사자를 참여시켜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규정한다.
공공디자인 사회적 포용성 점검 체계 구축: 공공디자인 사업 완료 후 지속적인 시민 평가와 피드백을 수렴하는 시스템을 구축한다. 개선 필요 사항이 지속적으로 반영될 수 있는 운영 체계를 확보한다.
사업
취약계층 당사자 리서치 의무화: 공공서비스 기획 시 주요 이용 대상이 되는 취약계층 당사자와의 인터뷰·동행관찰·공동워크숍을 의무적으로 포함한다. 통계로는 보이지 않는 실제 삶의 어려움을 포착하는 것이 목적이다.
사회적 약자 서비스 경험 지표 공표: 주요 공공서비스에 대해 장애인·고령자·이주민·저소득층의 실제 이용 경험과 접근성 지표를 별도로 측정·공표한다. 숫자가 드러나야 개선 압력이 생긴다.
지역사회 기반 서비스 설계 지원: 기초지자체 단위에서도 고품질 포용 서비스를 구현할 수 있도록 국비 또는 광역단위 보조금 연계 방안을 마련한다. 서울과 지방, 도시와 농촌 간 서비스 품질 격차 해소도 포용성의 핵심 과제다.
4. 기대효과
단기: 사회적 포용성 사전 영향 평가가 의무화되면서 새로 설계되는 공공서비스가 처음부터 취약계층을 배제하지 않는 구조를 갖추기 시작한다. 범부처 취약계층 통합 지원 플랫폼이 구축되면서 복지 사각지대의 실질적 해소가 시작된다.
중기: 당사자 참여 설계가 정착하면서 서비스의 실질적 이용 경험이 개선된다. 사회적 포용성 지표가 공표되면서 기관 간 경쟁이 서비스 품질 향상으로 이어진다. 복지 중복·누락 문제가 데이터 연계와 자동 연결 구조로 감소한다.
장기: 공공서비스 설계의 기준점이 평균 시민에서 가장 소외된 시민으로 이동한다. 형평성이 행정명령이 아니라 설계 절차·법제·지표로 제도화되면서, 정권 변화와 무관하게 '제도가 있어도 닿지 않는' 사각지대가 구조적으로 해소된다. 사회적 약자의 경험이 더 나은 공공서비스의 척도가 된다.
이 포스팅과 연결된 주제
공공서비스 기본값 대조정 — 취약계층을 위한 자동 적용이 핵심 과제
포용디자인 기준 의무화 — 사회적 약자 중심 설계의 물리적 구현
근거기반 정책 설계 정상화 — 당사자 리서치가 정책의 출발점
초고령사회 대응 디자인 전략 — 고령자는 가장 큰 취약계층
참고 자료 — 국제기구·정부·국책연구기관: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복지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사회보장 개편 기초연구」 및 「2024년 사회서비스 정책의 전망과 과제」 / 보건복지부, 「제1차 사회서비스 기본계획(2024~2028)」(2023.12.12. 발표) / 교육부, 「취약계층 지원을 위한 범사회부처 협업전략」(제6차 사회관계장관회의, 2023.7.19.) / 미국 백악관, EO 13985(2021)·EO 14091(2023) 및 이를 폐지한 EO 14148(2025.1.20.) / 영국 교통부(DfT), 항공 접근성 태스크포스(Aviation Accessibility Task and Finish Group, 2024.11. 출범) 및 GOV.UK Service Standard / OECD, 「Toolkit for Access to Justice and People-Centred Justice Systems」(2025.11.) / EEA, 「Delivering Justice in Sustainability Transitions」(2024) / Costanza-Chock, Sasha, 『Design Justice』(MIT Press, 2020), 『다시 디자인』(2025); 윤성원, 『모두의 질문Q』(2025)
2026.06.06. 윤성원 + 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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