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공공부문 디자인 영역과 체계 재정의

2026. 5. 21. 20:21서비스디자인/정책디자인

공공부문 디자인 영역과 체계 재정의

디자인을 '꾸미는 일'에서 '정책을 설계하는 일'로 — 무엇을, 어떤 틀로 디자인할 것인가

 

핵심 문제

세계 주요국 정부는 지금 공공부문 디자인을 정책과 서비스를 설계하는 일로 다시 정의하며, 정부 최고 수준의 조직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영국 정부의 공공디자인 근거 검토(PDER, 2025)는 공공디자인을 "정책 의도를 생성·정당화·달성하면서 실행 리스크를 줄이는 반복적 과정"으로 규정하고 로고나 앱이 아니라고 못 박는다.
미국은 2025년 백악관에 최고디자인책임자와 국가디자인스튜디오를 신설했고, EU는 디자인을 그린·포용 정책을 잇는 통합 수단으로 제도화했다.
그러나 한국은 디자인 진흥을 「산업디자인진흥법」과 「공공디자인의 진흥에 관한 법률」 두 법·두 부처로 쪼개 놓았다. 디자인의 전략적 잠재력이 분야에 갇히는 근본 원인이다.
무엇을 디자인으로 보느냐가, 국가가 무엇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느냐를 결정한다. 
이제 디자인의 
영역(무엇을 디자인으로 보는가)과 체계(어떤 법·부처·기구로 다루는가)를 함께 재정의해야 한다. 이는 디자인의 권한을 넓히자는 것이 아니라, 좁게 잘못 규정된 정의를 바로잡아 — 이미 서비스디자인까지 포함하는 「산업디자인진흥법」과 국제 기준에 맞게 — 제자리로 되돌리자는 것이다.

* 이 글은 앞선 1~31번 과제의 총론입니다. 개별 과제들이 흩어진 제안이 아니라, '영역과 체계의 재정의'라는 하나의 과제로 수렴한다는 것을 보이려 합니다.
* 이 블로그의 내용은 필자의 개인적 관점/제안이며, 한국디자인진흥원을 포함한 어떠한 기관의 입장도 대변하지 않습니다.

 

1. 현황과 문제점

좁게 규정된 '영역' — 법이 디자인을 시설·심미에 가둔다

「공공디자인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제2조는 공공디자인을, 국가기관 등이 조성·제작·설치·운영·관리하는 '공공시설물 등'에 대해 공공성과 심미성 향상을 위해 디자인하는 행위로 규정한다. '공공시설물 등'은 시설물·용품·시각 이미지를 말한다. 즉 한국의 법적 '공공디자인'은 공간·시설·시각물의 심미성 문제에 묶여 있다.
이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개념과 크게 다르다. 영국 정부의 PDER은 공공디자인을 정책·서비스를 설계하는 과정으로 정의하며, 그 가치를 통찰(insight)·정당성(legitimacy)·실행 리스크 감소(de-risked implementation)로 제시한다. 디자인을 '겉모습'이 아니라 '정책이 의도한 결과를 실제로 달성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보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의 다른 법인 「산업디자인진흥법」은 이미 넓은 정의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법 제2조는 산업디자인을 '제품 및 서비스 등의 미적·기능적·경제적 가치를 최적화하는 창작·개선 행위'로 규정하고, 제품·포장·환경·시각디자인과 함께 서비스디자인을 포함한다(2014년 개정). 디자인을 '가치를 최적화하는 행위'로 보는, 영국 PDER에 가까운 정의다. 결국 한국은 넓은 정의(산업디자인진흥법)와 좁은 정의(공공디자인진흥법)를 동시에 가진 채, 정작 공공부문에는 좁은 쪽을 적용하고 있는 셈이다. '공공디자인'(좁은 법적 용어)과 '공공부문 디자인'(정책·서비스를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 구분 없이 혼용되는 것 자체가, 무엇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합의가 없다는 증거다.

이원화된 '체계' — 가치와 구현이 분리되고 부처가 나뉜다

공공디자인은 안전·접근성·심미성·공동체 정체성 같은 공공의 가치를 다루지만, 그 구현은 결국 제품·시설·서비스를 통해 이뤄진다. 그런데 한국은 디자인법을 서로 다른 부처로 분리해 놓았다. (산업디자인진흥법(산업통상부), 공공디자인진흥법(문화체육관광부)) 그 결과 유사한 기본계획이 이중으로 수립되고, 기관 간 역할이 중복되며, 스마트시티·재난대응·고령자 환경처럼 산업과 공공의 경계를 넘나드는 과제에서 협업보다 개별 추진이 일어난다.
디자인은 본래 보건·복지·교통·교육·환경 등 전 부처를 관통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특정 부처의 소관 법률 아래 갇히면, 그 융합성과 전략성을 살리기 어렵다. 이 체계의 문제와 해법은 05번(디자인 법제 통합)·06번(부처 간 분산 해소)·07번(국가 디자인 통합조정기구 신설)에서 구체적으로 다룬다. 이 글은 그 셋이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문제임을 밝히는 데 초점을 둔다.

결과 — 분야마다 반복되는 '디자인 공백'

영역이 좁게 규정되고 체계가 분절되면, 디자인은 정책·서비스 설계의 초기 단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후의 '시각 정비'로 밀려난다. 이 공백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반복된다. 초고령사회 대응(28번)에서 고령자 경험 설계의 부재로, 지속가능 전환(29번)에서 설계 단계 개입의 부재로, 사회적 약자 정책(30번)에서 당사자 참여 설계의 부재로, 농업·1차산업(31번)에서 경험·브랜드 설계의 부재로 나타난다. 개별 분야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실은 영역과 체계가 좁게 정의된 데서 비롯된 공통 증상이다.

2. 국내외 사례

🇬🇧 영국 — 공공디자인을 '정책 설계'로 재정의 (PDER, 2025)

영국 정부는 2025년 7월 공공디자인 근거 검토(Public Design Evidence Review, PDER)를 발표했다. 내각부 정책직군이 발의하고 고용연금부(DWP)가 편집했으며 학계가 참여한, 정부 주도의 검토다. PDER은 공공디자인을 정책·서비스 설계 과정으로 규정하고, 디자인이 잘 작동하려면 안정적 리더십, 디자인 표준·근거에 대한 투자, 실패에서 배우는 책임성 기제, 전(全)생애·전(全)시스템을 보는 비용편익 틀, 유연한 예산 같은 '실현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고 본다. 한 나라 정부가 스스로 "디자인을 정책에 확대·내재화해야 한다"고 결론지은 사례라는 점에서 무게가 다르다.

🇺🇸 미국 — 최고디자인책임자와 국가디자인스튜디오 (2025) — 그리고 그 한계

미국은 2025년 8월 행정명령으로 'America by Design' 이니셔티브를 발표하며 백악관에 미국 최초의 최고디자인책임자(Chief Design Officer)와 국가디자인스튜디오(National Design Studio)를 신설했다. 디자인을 정부 최고 수준의 의제로 올린 강력한 거버넌스 선례다. 다만 그 임무는 연방 디지털 서비스의 '사용성과 심미성', 브랜드 통일에 무게가 실려 있어, PDER이 말한 '정책 설계로서의 공공디자인'보다는 좁은 쪽에 가깝다. 또한 이 스튜디오는 명령 서명 3년 뒤 폐지되도록 설계된 한시 조직이다. 디자인을 최고위로 끌어올리는 동향은 분명하되, 그 역할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항구화하느냐가 성패를 가른다는 점을 보여준다.

🇪🇺 EU — 디자인을 통합 정책 수단으로 (New European Bauhaus)

EU는 2021년 출범한 New European Bauhaus(NEB)를 통해 디자인을 그린 전환·사회적 포용·지역 민주주의를 잇는 범분야 정책 수단으로 삼았고, 2025년에는 다년(2025~2027) 전용 재정 도구인 NEB Facility를 도입했다. 디자인이 단일 부처의 진흥 대상이 아니라, 정책 전반을 가로지르는 통합 틀로 기능하는 모델이다.

🇸🇬 싱가포르 — 국가 전략과 전담 기구

싱가포르는 디자인싱가포르위원회를 경제개발청(EDB) 산하에 두고, 디자인을 혁신 주도 경제성장의 핵심 동력으로 위치시켰다. 국가 디자인 마스터플랜의 전략축에는 '기업과 정부에서 디자인의 역할 확대'가 명시돼, 디자인을 산업과 공공을 가르지 않는 국가 전략으로 다룬다.

🇰🇷 한국 — 이원화된 구조와 분절된 시도

한국에도 국민디자인단·서비스디자인 시범사업 등 공공부문 디자인의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프로젝트 단위에 머물고, 좁은 법적 정의와 이원화된 체계 위에서 제도화되지 못한 채 소진돼 왔다. 영역과 체계의 재정의 없이는 개별 시도가 누적되어 표준이 되기 어렵다.

사례를 종합하면 두 갈래가 보인다. 디자인을 정책·서비스 설계로 보는 흐름(영국·EU·싱가포르)과 디지털 사용성·심미·브랜드로 보는 흐름(미국)이다. 디자인이 정부 최고 수준으로 올라가는 것은 공통이되, 그 정의가 갈린다. 한국은 좁은 인식과 이원화된 법·부처 구조 때문에 어느 쪽에도 제대로 들어가 있지 못하다. 그래서 영역과 체계를 함께 재정의해야 한다.

 

3. 제안

이 글은 총론이므로, 통합법·조정기구·직제 같은 도구는 각각 05~08·14·15번에서 다룬다. 여기서는 그 도구들이 한 방향을 향하도록 묶는 재정의의 골격, 그리고 그 출발점인 정의·용어를 누가·언제·어떻게 정할 것인가를 제안한다.

제도 — 가장 먼저: 정의와 용어를 공식 합의·표준화한다

모든 재정의의 출발점은 "무엇을 공공부문 디자인이라 부르고, 어디까지를 그 영역으로 볼 것인가"를 공식적으로 합의해 표준으로 정하는 일이다. 지금은 '공공디자인'(공공디자인진흥법: 시설·시각·심미)과 '산업·서비스디자인'(산업디자인진흥법: 넓음)이 충돌하고, '공공서비스디자인·정책디자인' 등 용어가 혼용돼, 후속 법·제도·기구가 제각각 다른 개념 위에 서게 된다. 정의와 용어를 먼저 합의하지 않으면 04~08번도 같은 그림을 공유할 수 없다.
누가 — 단일 부처가 정할 수 없는 부처 교차 사안이므로, 국무조정실이 주관하는 한시 협의체('공공부문 디자인 체계 정립 협의체')를 구성한다. 문화체육관광부·산업통상부·행정안전부와, 두 부처 산하 디자인 진흥기관(한국디자인진흥원(KIDP)·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KCDF)), 그리고 학계·현장 공무원·현장 디자이너·국책연구기관이 자문이 아니라 공동 작업자로 참여한다.
언제 — 단계적으로 추진한다. ①착수~6개월: 국제 기준(영국 PDER의 'public design' 정의 등)과 국내 두 법·조례를 비교 분석해 쟁점을 정리한다. ②~1년: 정의(범위)와 용어·표기 표준(안)을 도출하고 공개 의견수렴·공론화를 거친다. ③~1.5년: 합의된 표준을 04번(분류 체계)·05번(법제 통합)·07번(통합조정기구)의 설립·개정 근거에 반영한다.
어떻게 — 공공디자인의 방법론 자체를 적용한다. 근거 기반(국제·국내 비교), 당사자 참여형 공동설계(현장 공무원·디자이너·시민), 공개 공론을 거쳐 결과물을 '공공부문 디자인 정의·용어 표준'으로 명문화한다. 용어 결정은 결론을 미리 정하지 않되, 최소한 두 선택지를 공론에 올린다 — ① '공공디자인'을 넓게 재정의하는 안, ② 상위 우산 용어를 '공공부문 디자인'으로 두고 그 아래 공공디자인(시설·환경·시각)·공공서비스디자인·정책디자인을 하위 범주로 정리하는 안. 어느 쪽이든 국제 통용어 'public design'과의 정합을 기준으로 삼는다. 이렇게 도출된 표준은 한시 협의체에서 끝내지 않고, 이후 07번 통합조정기구가 상시 관리·갱신하도록 해 미국식 한시조직의 취약성을 피한다.

법 — 합의된 정의를 법령에 반영한다

위 협의체가 도출한 정의를 「공공디자인의 진흥에 관한 법률」과 「산업디자인진흥법」의 정비에 반영한다. 이는 공공부문 디자인의 권한을 새로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시설물의 심미성'에 묶인 좁은 정의를 바로잡아 — 이미 서비스디자인까지 포함하는 산업디자인진흥법과 국제 기준에 정합하도록 — 정책·서비스·시스템 설계까지 제자리로 되돌리는 일이다. 법체계 통합의 구체안은 05번, 부처 분산 해소는 06번에서 다룬다.

제도 — 재정의된 영역에 맞춰 거버넌스를 정렬한다

국가 디자인 분류 체계(04번), 통합조정기구(07번), 공공서비스디자이너 직제(08번), 정책디자인랩(14번), 다부처 협력(15번)을 개별 제도가 아니라 하나의 체계로 연결한다. PDER이 강조한 '실현 조건'(안정적 리더십·표준·책임성·전생애 비용편익·유연한 예산)을 한국 거버넌스 설계의 점검표로 삼는다.

정책

공공부문 디자인의 역할을 공식 재정의하고, 설계 단계 개입의 기준을 만든다. 디자인이 사후 정비가 아니라 정책·서비스 기획 초기에 개입하도록, 일정 규모 이상 사업에 '디자인 개입(영향) 점검'을 도입한다. 미국 사례가 보여주듯, 한시적 행정조직이 아니라 법·제도로 항구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사업

  • 한국판 '공공디자인 효과 실증': 영국 PDER을 벤치마크해, 공공부문 디자인이 정책·서비스 성과에 기여하는 바를 사례·데이터로 축적한다. 재정의 주장을 근거로 뒷받침하는 토대다.
  • 인식 재정의 캠페인: '디자인 = 꾸미는 일'이라는 통념을 '정책을 설계하는 일'로 전환하는 공직·대국민 커뮤니케이션을 운영한다.
  • 통합 로드맵·플랫폼: 1~31번 과제를 '영역·체계 재정의'라는 하나의 지도 위에 배치해, 어떤 과제를 어떤 순서로 추진할지 정렬한다.

4. 기대효과

단기: 국무조정실 주관 협의체가 출범해 공공부문 디자인의 정의와 용어 표준(안)을 도출하기 시작한다. 부처·기관이 같은 개념을 공유하면서, 후속 법·제도·기구가 한 그림 위에서 논의되기 시작한다. 한국판 공공디자인 효과 실증도 착수돼, 재정의 논의가 일화가 아니라 근거 위에서 진행된다.

중기: 재정의된 영역에 맞춰 법 통합(05)·부처 정렬(06)·통합조정기구(07)·직제(08)가 한 방향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분야별 과제(17~31)에서 반복되던 '디자인 공백'이 줄어든다.

장기: 디자인이 공공부문에서 정책·서비스를 설계하는 핵심 역량으로 자리 잡는다. 영역과 체계가 함께 재정의되면서, 한국은 디자인을 정부 최고 수준의 전략 수단으로 다루는 국제 흐름에 합류하되, 미국식 한시조직의 취약성을 피해 법·제도로 항구화된 모델을 갖추게 된다. 흩어져 있던 31개의 과제가 하나의 일관된 그림으로 작동한다. 이는 디자인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다뤄야 할 자리를 되찾는 것이다.

이 포스팅과 연결된 주제

국가 디자인 분류 체계 일원화 — '무엇을 디자인으로 보는가'의 제도화
디자인 법제 통합 — 이원화된 법체계의 통합
디자인 정책 부처 간 분산 해소 — 부처 칸막이 해소
국가 디자인 통합조정기구 신설 — 총괄 거버넌스
공공서비스디자이너 직제 신설 / 14. 정책디자인랩 법제화 — 실행 조직·인력
27~31. 포용·고령·지속가능·약자·농업 — 영역·체계 재정의가 필요한 적용 증거


참고 자료 — 국내 법령·국제기구·정부: 「공공디자인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제2조(정의, 2023.3.21. 개정) / 「산업디자인진흥법」 제2조(정의, 2014.12.30. 개정, 서비스디자인 포함) — 국가법령정보센터 / 영국 정부(내각부·DWP), 「Public Design Evidence Review(PDER)」(2025.7) / 미국 백악관, 행정명령 'Improving Our Nation Through Better Design'(America by Design, 2025.8.21.) 및 국가디자인스튜디오·최고디자인책임자 신설 / European Commission, New European Bauhaus 및 NEB Facility(2025–2027, Horizon Europe) / DesignSingapore Council(EDB 산하) 및 국가 디자인 마스터플랜 — 관련 저작(배경): 윤성원, 『모두의 질문Q』(2025); 윤성원, 『다시 디자인』(2025); 한국디자인진흥원, 『디자인이 궁금해』(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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