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 19. 06:36ㆍ서비스디자인/정책디자인
지속가능디자인 산업 전환
설계 단계에서 환경 영향을 결정하는 시대, 디자인이 전략이다
핵심 문제
제품·건축·서비스의 전체 생애주기에서 발생하는 환경 영향의 최대 80%가 설계 단계에서 결정된다(유럽연합 집행위원회). 탄소중립, ESG, 순환경제는 결국 '어떻게 설계하느냐'의 문제다. 그러나 한국의 정책 체계는 지속가능디자인을 여전히 외관 개선이나 캠페인 수준으로 다루며, R&D·공공조달·산업 표준 등 핵심 구조에 설계 전략이 통합되어 있지 않다. EU가 이미 설계 단계의 지속가능성을 '의무'로 규율하기 시작한 것과 대비된다.
* 이 블로그의 내용은 필자의 개인적 관점/제안이며, 한국디자인진흥원을 포함한 어떠한 기관의 입장도 대변하지 않습니다.
1. 현황과 문제점
설계 단계가 환경을 결정한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제품 생애주기 전체 환경 영향의 최대 80%가 설계 단계에서 결정된다고 본다. 어떤 소재를 쓰는지, 얼마나 오래 쓸 수 있게 만드는지, 수리할 수 있는지, 분리·재활용이 가능한지 — 이 모든 것이 공장 가동이나 소비자 선택 이전에 디자이너의 결정으로 이미 정해진다.
이것이 지속가능디자인이 탄소중립·순환경제 전략의 핵심에 있어야 하는 이유다. 탄소 저감 기술을 개발하는 것과, 그 기술을 활용하는 제품·서비스를 처음부터 지속가능하게 설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EU의 에코디자인 정책은 후자에 정면으로 개입한다.
한국 정책의 한계 — 지원은 있으나 설계 기준은 '노력 의무'
한국의 현재 정책 체계는 지속가능디자인을 외관 개선이나 캠페인 수준의 부속 수단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R&D·공공조달·산업 표준 등 정책 핵심 구조에 설계 전략이 통합되어 있지 않고, 건축·제조·생활환경 등 국민 삶에 직결되는 분야에서 지속가능디자인의 정의와 원칙이 제도화되어 있지 않다. 공공부문 역시 지속가능디자인의 시범 시장이자 선도 수요자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기술적 역량이 있는 기업도 단가·공공조달 기준 등 구조적 장벽 때문에 지속가능 설계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분명한 격차는 규제 수준에서 드러난다. 뒤에서 보듯 EU는 모든 제품의 설계 단계에 내구성·수리 가능성·재활용성 요건을 '의무'로 부과하기 시작했으나, 한국의 관련 규정은 아직 '노력 의무'와 대상 지정 수준에 머물러 있다.
순환경제사회 전환 촉진법 — 규제는 시작됐으나 설계 기준은 아직 '노력 의무'
자원순환기본법을 전부개정한 「순환경제사회 전환 촉진법」이 2024년 1월 1일 시행됐다. 이 가운데 제20조(지속가능한 제품의 사용)는 2025년 1월 1일부터 시행돼, 제조·수입업자가 제품이 조기에 폐기되지 않고 수리되어 사용될 수 있도록 노력하도록 규정한다. 환경부는 2025년 이 조항에 근거해 부품보유기간 3년 이상 공산품을 대상으로 '지속가능한 제품 사용 대상제품 목록' 고시 제정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방향은 분명해졌지만, 여전히 노력 의무와 대상 지정 수준이다. EU ESPR처럼 수리 가능성·내구성·재활용성에 대한 구체적 성능 요건을 설계 기준으로 의무화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KIDP의 지속가능디자인 지원사업 — 출발은 됐지만
산업통상와 한국디자인진흥원은 2024년 '지속가능디자인지원사업'을 시작했고 2025년에도 이어가고 있다. 자원순환·사회적 약자 친화 등 사회문제 해결 분야에 지속가능 디자인을 도입해 제품·서비스·비즈니스모델을 혁신하려는 중소·중견기업을 디자인전문기업과 매칭해 컨설팅과 사업비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2024년 기준 기업당 최대 6,500만 원).
출발 자체는 의미 있다. 그러나 일부 기업에 대한 개별 지원에 그치고, 산업 전반의 구조적 전환으로 연결되는 경로가 없다는 한계가 있다. 모든 제품에 지속가능 설계를 의무화하는 규제, 공공조달에서의 지속가능디자인 우선 적용, 인증·세제 혜택 연계가 없으면 시장의 자발적 전환은 일어나기 어렵다.
2. 국내외 사례
🇪🇺 EU — ESPR(지속가능제품 에코디자인 규정), 2024년 발효·2026년 첫 의무 시행
EU는 2024년 6월 '지속가능제품 에코디자인 규정(ESPR, Regulation (EU) 2024/1781)'을 채택하고 2024년 7월 18일 발효했다.
ESPR은 2009년 에코디자인 지침을 전면 대체하는 포괄적 규제다. 기존 지침이 에너지 효율에 집중했다면, ESPR은 내구성, 수리 가능성, 재사용 가능성, 에너지 효율, 재활용성, 탄소·환경 발자국 등 제품 지속가능성 전체로 범위를 확장해 제품별 성능 요건을 설정한다.
핵심 도구는 두 가지다. 첫째, '디지털 제품 여권(Digital Product Passport, DPP)': 제품·부품·소재 정보를 디지털로 접근 가능하게 해 소비자·제조사·당국이 지속가능성을 평가할 수 있게 한다. 둘째, '미판매 상품 파기 금지': 대기업의 미판매 의류·신발 파기가 2026년 7월 19일부터 금지된다(중기업 2030년, 소·영세기업 면제). 미판매 폐기 물량 공시 의무도 적용되며, 표준 공시 서식은 2027년 2월부터 의무화된다.
EU 집행위원회는 2025년 4월 첫 ESPR 워킹플랜(2025–2030)을 채택했다. 철강·알루미늄·섬유·가구·타이어·세제·도료·전자제품 등이 우선 대상이며, 2026년부터 제품군별 위임법(delegated act)으로 구체적 에코디자인 요건이 순차 적용된다.
EU 집행위는 ESPR으로 2030년까지 1차 에너지 약 1억 3,200만 톤(천연가스 약 1,500억 입방미터 상당)을 절약하고, 온실가스 약 2억 6,000만 톤 CO₂를 감축하며, 20만 개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전망한다.
🇬🇧🇪🇺 영국·EU — 수리권(Right to Repair)의 제도화
영국은 2021년 7월 시행된 에코디자인 규정(The Ecodesign for Energy-Related Products and Energy Information Regulations 2021)으로 세탁기 등 대상 가전의 예비부품을, 부품 종류에 따라 마지막 모델 출시 이후 최소 7~10년간 공급하도록 의무화했다. 수리 가능성을 제품 설계의 법적 요건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EU도 2024년 6월 수리권 지침(Directive (EU) 2024/1799)을 채택했다. 보증기간이 지난 뒤에도 합리적 비용·기간 내 수리를 요구할 권리, 수리를 택하면 보증기간 1년 연장, 예비부품·수리 정보 제공 의무 등을 담았으며, 회원국은 2026년 7월 31일부터 이를 적용해야 한다. 즉 올여름부터 EU 시장 전반에서 수리권이 본격 작동한다.
🇸🇪 스웨덴 — 수리 세제로 행동 변화 유도
스웨덴은 2017년부터 자전거·신발·가죽제품·의류·가정용 직물의 수리 서비스 부가가치세를 25%에서 12%로 인하했다. 2022년 7월~2023년 3월에는 한시적으로 6%까지 더 낮췄다가 2023년 4월 다시 12%로 환원했다. 가전 등 수리 노무비 일부를 소득세에서 공제하는 제도도 운영했다. 세제를 통해 '만들고 버리는' 경제에서 '수리하고 쓰는' 경제로의 전환을 유도한 사례다. 다만 세율 변동에서 보듯, 행동 유도형 세제는 정치적 환경에 따라 흔들릴 수 있다는 점도 함께 시사한다.
🇰🇷 한국 — 순환경제사회 전환 촉진법 + 지속가능디자인 지원사업
앞서 본 「순환경제사회 전환 촉진법」(2024년 시행)과 함께, 환경부는 2025년 순환경제 성과관리 대상 사업자 선정을 공고하며 기업 차원의 순환경제 실행을 구체화하고 있다. 산업부·KIDP의 지속가능디자인지원사업은 컨설팅과 비즈니스모델 개발을 돕는다.
두 제도 모두 방향은 맞다. 그러나 EU ESPR처럼 모든 제품의 설계 단계에서 지속가능성을 의무화하는 수준과는 거리가 있다. 규제 없는 지원만으로는 시장 전체의 구조적 전환이 일어나기 어렵다.
🇩🇰 덴마크 — 국가 디자인 기관의 순환경제 전략
덴마크디자인센터(DDC)는 2021년 '거부할 수 없는 순환사회 설계(Design the irresistible circular society)'를 핵심 미션으로 선언하고, 순환경제 기반 제품·비즈니스모델 설계를 중점 과제로 추진해 왔다. 2024년에는 핀란드·스웨덴·노르웨이 기관과 함께 '노르딕 순환디자인 프로그램'을 운영해 자국 기업의 ESPR 대응과 순환 전환을 지원했다. 정부 지원을 받는 국가 디자인 기관이 지속가능성을 핵심 임무로 설정한 것은 한국 공공 디자인 진흥 기관의 방향 설정에 참조점이 된다.
3. 제안
법
지속가능디자인 기준 법제화 — 한국형 에코디자인 요건 준비: EU ESPR을 참조해 국내 제품에도 수리 가능성·내구성·재활용성 기준을 설계 단계에 적용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다. 「순환경제사회 전환 촉진법」 제20조의 노력 의무와 대상제품 목록을, 제품군별 구체적 성능 기준으로 단계적으로 강화한다.
미판매 상품 파기 금지 도입: EU처럼 의류·전자제품 등 분야에서 미판매 상품 파기를 금지하고 폐기 물량을 공시하게 하는 조항을 마련한다. 과잉 생산 구조를 설계·재고 단계에서 억제하는 규제다.
제도
지속가능디자인 국가 프레임워크 정립: 산업정책·국토환경정책·R&D 정책 전반에 지속가능디자인의 정의와 실행 원칙을 수립한다. 탄소중립 전략, ESG 경영 지원, 순환경제 정책에 디자인 전략 항목을 명시한다.
디지털 제품 여권(DPP) 도입 준비: EU ESPR이 도입하는 DPP 체계에 한국 기업이 대응할 수 있도록 산업부·환경부·KIDP가 공동으로 가이드라인과 지원 체계를 마련한다. EU 수출 기업에는 ESPR 준수가 이미 다가온 의무다.
공공조달 지속가능디자인 우선 적용: 21번(공공조달 가치기반 발주)과 연계해, 공공 건축·제품·서비스 조달 시 지속가능디자인 기준 충족을 평가 항목으로 의무화한다. ESPR도 녹색 공공조달을 핵심 이행 수단으로 삼는다. 공공부문이 지속가능디자인의 선도 수요자가 되는 구조를 만든다.
정책
지속가능디자인 인증·세제 혜택 연계: 지속가능디자인 지원사업을 인증제로 발전시키고, 인증 취득 기업에 공공조달 우대, 세액공제, R&D 가점을 연계한다. 스웨덴 수리 세제처럼 지속가능한 설계·소비가 경제적으로 유리한 구조를 만들되, 제도의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함께 확보한다.
수리권 도입 검토: 영국·EU의 수리권 제도를 참조해 주요 소비재(가전·전자기기)의 예비부품 공급 의무, 수리 가능성 표시 의무를 도입한다. 순환경제법 제20조 대상제품 목록을 입법·고시로 구체화하는 방식이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지속가능디자인 R&D 독립 트랙 신설: R&D 과제 분류에 지속가능디자인 전용 트랙을 신설한다. 제품 수명 연장 설계, 생분해 소재 적용, 모듈화 설계, 에너지 소비 최소화 설계를 목표로 하는 과제를 별도 지원한다.
사업
EU ESPR·수리권 대응 중소기업 지원: EU 시장에 수출하는 국내 중소기업이 ESPR·수리권 요건을 충족하도록 DPP 구축, 에코디자인 요건 분석, 제품 재설계를 지원하는 전담 사업을 운영한다. ESPR은 EU에 제품을 판매하는 모든 기업에 적용된다.
지속가능디자인 교육 강화: 국내 디자인 교육과정에 LCA(전과정평가), 순환경제 원칙, 에코디자인 방법론을 필수 과목으로 편입하고, 재직 디자이너 대상 재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지속가능디자인 우수 사례 아카이브: 지속가능디자인 지원사업의 성과를 체계적으로 아카이빙하고 공개한다. 어떤 접근이 효과적이었는지를 공유하는 것이 업계 전반의 전환을 가속한다.
4. 기대효과
단기: 공공조달에 지속가능디자인 기준이 적용되면서 기업들이 설계 방식을 바꾸기 시작한다. EU ESPR·수리권 대응 지원으로 EU 수출 기업이 글로벌 지속가능성 기준에 맞는 역량을 구축한다.
중기: 지속가능디자인 인증제와 세제 혜택이 연계되면서 자발적 전환이 확대된다. 수리권 도입으로 제조사들이 수리 가능한 제품을 설계하기 시작한다. 한국형 에코디자인 요건이 업종별로 구체화된다.
장기: 한국 제품의 기본 설계 기준이 지속가능성을 포함하게 된다. EU ESPR처럼 지속가능한 설계가 시장 진입의 기본 요건이 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설계 단계에서 환경 영향을 제어하는 역량이 한국 산업의 새로운 경쟁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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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디자인 활용률 제고 — 지속가능디자인은 기업 역량의 새 차원
참고 자료 — 국제기구·정부·연구기관: EU Regulation (EU) 2024/1781(ESPR), 2024.6.13. 채택·2024.7.18. 발효; ESPR 2025–2030 워킹플랜(COM(2025) 187, 2025.4.16.); 미판매 의류·신발 파기 금지 2026.7.19.(대기업) / Directive (EU) 2024/1799(수리권 지침), 2024.6.13. 채택·회원국 적용 2026.7.31. / European Commission, ESPR 절감 전망(1차에너지 1.32억 톤·CO₂ 2.6억 톤·일자리 20만 개) 및 '설계 단계 환경영향 최대 80% 결정' / 환경부, 「순환경제사회 전환 촉진법」(2024.1.1. 시행, 제20조 2025.1.1. 시행), 산업통상부·한국디자인진흥원 「지속가능디자인지원사업」(2024·2025) / 영국 The Ecodesign for Energy-Related Products and Energy Information Regulations 2021(SI 2021/745), 예비부품 최소 7~10년 공급 의무 / 스웨덴 수리 서비스 부가세(2017년 12% 인하, 2022.7~2023.3 한시 6%, 2023.4 환원) / 덴마크디자인센터(DDC), 순환사회 미션(2021~) 및 노르딕 순환디자인 프로그램(2024) — 관련 저작(배경): 윤성원, 『모두의 질문Q』(2025); 한국디자인진흥원, 『디자인이 궁금해』(2022)
2026.06.06. 윤성원 + 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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