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 19. 06:44ㆍ서비스디자인/정책디자인
농업·1차산업 디자인 혁신
생산 중심에서 경험·브랜드 중심으로, 1차산업의 가치 재설계
핵심 문제
농업은 생산 중심의 산업이었다.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소비자는 이미 달라졌다. 단순히 농산물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자의 이야기, 지역의 문화, 생산 과정의 진정성을 함께 산다. 시장조사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 조사에서 소비자 1,000명 중 81.6%가 로코노미(Loconomy, Local+Economy) 식품을 구매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고, 그 이유로 '지역 특색이 반영된 점이 이색적'(49.6%)을 첫째로 꼽았다. 생산이 아닌 경험을 설계하는 시대, 1차산업에 디자인이 필요한 이유다.
* 이 블로그의 내용은 필자의 개인적 관점/제안이며, 한국디자인진흥원을 포함한 어떠한 기관의 입장도 대변하지 않습니다.
1. 현황과 문제점
농업의 이중 위기 — 생산과 소비 모두에서
한국 농업은 구조적 이중 위기에 처해 있다. 생산 측면에서는 농촌 인구 감소, 고령화, 기후변화로 인한 불안정성이 심화되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의 「농업전망 2026」(2026.1.22.)은 2026년 농가 인구가 약 194만 명으로 사상 처음 100만 명대로 줄고, 65세 이상 농가 인구 비율은 56.6%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세계를 품고 미래를 여는 K-농업·농촌 대전환'을 대주제로 내건 것 자체가, 기존 틀로는 지속이 어렵다는 진단을 담고 있다. 소비 측면에서는 수입 농산물 경쟁, 1인 가구 증가, 소비 패턴 변화로 내수 시장이 재편되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24년 12월 18일 경제장관회의에서 「농업·농촌 혁신 전략」을 발표했다. "농업·농촌 정책이 90년대 이후 개방화 시대에 맞춰진 과거의 틀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어 정책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명확히 인정했다. 시장 기능을 활성화하고 민간·지역의 자율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산업을 개편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혁신 전략에서 '디자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농산업 구조 혁신, 쌀산업 개편, R&D·유통 효율화가 중심이다. 소비자가 경험하는 것, 즉 농산물의 스토리·브랜드·패키지·판매 경험의 질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이 없다.
생산자 중심에서 경험 중심으로의 전환
산업 전반에서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지금까지 산업은 생산품(제품·농산물·에너지 등)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데 집중해 왔다. 이는 본질적으로 생산자 중심의 관점이다. 그런데 소비자는 생산품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주는 경험을 구매하는 쪽으로 이동했다.
농업에서 이 전환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로코노미(Loconomy) 트렌드다.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 조사(농식품정보누리 소개, 2024.11.)에 따르면 소비자 1,000명 중 81.6%가 로코노미 식품을 구매한 경험이 있고, 구매 이유로 '지역 특색이 반영된 점이 이색적'(49.6%), '특별한 경험을 해보고 싶어서'(39.2%)를 꼽았다. 2025년 후속 조사에서도 구매 경험률은 81.0%로 유지됐다. 신선도나 가격이 아니라 이야기와 경험이 구매 동기다. 이것이 디자인이 1차산업에 개입해야 하는 이유다. 생산의 효율화는 기술과 농학의 영역이지만, 경험의 설계는 디자인의 영역이다.
브랜드와 패키지의 격차 — 이미 벌어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농산물 브랜드 설계의 효과가 드러나고 있다. 못난이 농산물 정기배송 서비스 '어글리어스'(주식회사 캐비지, 2021년 출시)는 규격 미달로 버려질 농산물을 '구출'이라는 이야기로 재정의해, 재구독률 높은 충성 고객층을 만들었다. 정부·기업·농가 상생 사례도 있다. 맥도날드의 '한국의 맛' 프로젝트는 창녕 갈릭버거·진도 대파 크로켓버거를 위해 마늘 130t, 대파 150t을 지역에서 사들이고 팝업·전시로 경험을 확장했다(농식품정보누리, 2024.11.). 공통점은 농산물의 물리적 속성이 아니라 이야기와 경험을 설계했다는 점이다.
반면 여전히 대다수 농산물은 비닐봉지에 담겨 가격으로만 경쟁한다. 같은 품질의 사과도 브랜드 설계 여부에 따라 시장 가격이 크게 달라진다. 디자인 격차가 농산물의 소득 격차를 만들고 있다.
6차산업의 잠재력과 설계의 부재
정부가 오래 강조해온 6차산업(1차 생산 × 2차 가공 × 3차 서비스)은 이론적으로 디자인의 최적 적용 영역이다. 1차 생산물에 2차 가공과 3차 서비스 경험을 설계해 부가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이 그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장의 6차산업 사업체 대부분은 생산자가 직접 가공·판매까지 하는 구조에서 서비스 경험의 설계가 취약하다. 농가 레스토랑, 체험 프로그램, 팜스테이의 경험 품질이 들쑥날쑥한 이유다. 전문 디자인 역량이 6차산업 현장에 연결되는 구조가 없다.
2. 국내외 사례
🇩🇰 덴마크 — 농식품 브랜드 국가 전략
Food Nation은 덴마크 정부와 민간이 함께 설립한 비영리 식품 브랜딩 컨소시엄으로, 덴마크 농식품 클러스터 전체를 수출 시장에 일관된 브랜드로 알린다. 품질·식품안전·지속가능성·유기농·가스트로노미를 핵심 강점(stronghold)으로 설정하고, 생산 방식의 지속가능성과 동물 복지, 유기농 비율, 미식 문화 자체를 브랜드의 실질적 내용으로 삼는다. Food Nation의 인사이트 조사에 따르면 의사결정자 중 덴마크를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식품 강국'으로 꼽는 비율은 5%에 그치지만, 품질·안전·지속가능성·유기농 등 핵심 연상은 높게 평가돼 브랜드를 더 키울 잠재력이 크다는 분석이다. 단순 마케팅이 아니라, 설계된 브랜드 언어가 수출 프리미엄의 근거가 되는 구조다.
🇯🇵 일본 — 지역 음식 문화와 창의적 기업가의 결합
일본은 1979년 오이타현에서 히라마쓰 지사 주도로 '1촌1품 운동(One Village One Product)'을 시작했다. 각 마을이 자신만의 특산품(가보스 감귤, 시로네기(흰 양파), 세키사바 등)을 개발·브랜드화하는 전략으로, 생산보다 스토리와 정체성 설계를 중심에 놓은 접근이었다. 이 개념은 이후 태국 OTOP 등 여러 나라의 농촌 브랜드 전략에 영향을 줬다. 최근 학술 연구(Food, Culture & Society, Taylor & Francis, 2024)는 일본 농촌 활성화의 핵심 패턴을 분석한다. 지역의 음식 문화와 가스트로노미가 농촌 재활성화의 핵심 자원으로 작동하는 과정에서, 외부에서 이주한 창의적 기업가들이 지역 자원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경험을 설계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 한국 — 로코노미 트렌드와 브랜드 혁신
국내에서도 농산물 브랜드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 조사에서 확인된 로코노미 트렌드는 소비자가 지역성·이야기·경험에 지불 의향이 있다는 것을 데이터로 입증한다. '어글리어스'는 못난이 농산물을 버려지는 것이 아닌 '매력적인 것'으로 재정의했고, 맥도날드 '한국의 맛'은 지역 특산물을 메뉴·팝업·전시 경험으로 확장했다. 농산물의 물리적 속성이 아니라 브랜드 철학과 경험을 설계한 사례들이다.
🇰🇷 한국 — 농업·농촌 혁신 전략의 디자인 공백
농림축산식품부가 2024년 12월 발표한 「농업·농촌 혁신 전략」은 농산업 구조 혁신, 쌀산업 개편, 농촌 활력 증대, 정부 지원체계 혁신을 4대 과제로 설정했다. 2030년까지 전체 인구 중 농촌 인구 비율을 20%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 목표다. 전략 방향은 맞다. 그러나 소비자가 경험하는 농산물·농촌 서비스·6차산업 경험의 품질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디자인 전략이 없다. 생산 인프라를 개선해도 소비자와의 연결 고리인 브랜드·패키지·경험이 설계되지 않으면 부가가치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다.
3. 제안
법
농산물 디자인 지원 법적 근거 마련: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기본법에 농산물·농촌 서비스의 디자인 역량 강화 지원 근거를 명시한다. KIDP의 디자인 지원 사업이 농식품 분야로 확장되는 제도적 경로를 만든다.
6차산업 경험 품질 기준 도입: 6차산업 인증제 기준에 서비스 경험 설계 품질 항목을 포함한다. 인증 사업체가 전문 디자인 역량을 갖추거나 활용하도록 장려하는 구조를 만든다.
제도
농산물·농촌 디자인 지원 전담 사업 신설: KIDP의 디자인 지원 체계(디자인 바우처, 컨설팅)를 농식품 분야에 특화해 운영하고, 농림축산식품부와 KIDP의 협업 체계를 공식화한다.
지역 농산물 브랜드 설계 지원 체계 구축: 지자체와 협력해 지역 특산물의 통합 브랜드 전략을 수립하는 서비스디자인 지원 사업을 운영한다. 단순 로고·패키지가 아닌 스토리·철학·경험 전체를 설계하는 전략적 접근이다.
농업 현장 디자이너 파견 프로그램: 서비스디자이너·브랜드 전문가·UX 디자이너가 농가·6차산업 사업체에 일정 기간 파견되어 현장을 분석하고 경험을 설계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정책
「농업·농촌 혁신 전략」 디자인 챕터 추가: 현재 전략에 없는 '소비자 경험 설계' 챕터를 추가한다. 농산물 브랜드·패키지·직거래 경험·농촌 관광 경험의 품질을 높이는 전략을 수립한다.
로코노미 트렌드 연계 디자인 전략: 소비자 81.6%가 이미 로코노미 식품을 구매하는 시장 트렌드를 정책이 따라가야 한다. 지역 특색과 이야기를 담은 농산물 경험 설계를 공식 지원 항목으로 포함한다.
수출 농산물 패키지·브랜드 경쟁력 강화: K-Food+ 수출이 2024년 약 130억 달러에서 2025년 136억 3,000만 달러로 역대 최대를 경신한 성공 공식을, 가공식품을 넘어 1차 농산물에 적용한다. 딸기·배·포도 등 전략 품목의 수출 패키지·브랜드를 전략적으로 설계하는 지원 사업을 신설한다.
사업
농산물 브랜드 디자인 공모전 및 지원 사업: 전국 농산물 브랜드 디자인 공모전을 정례화하고, 수상 작품을 실제 농가에 적용하는 지원을 연계한다. 디자인 전공자와 농업인이 협업하는 구조를 만든다.
농촌 경험 설계 시범 사업: 6차산업 인증 사업체 중 일부를 선정해, 서비스디자인 방법론으로 전체 방문 경험(예약-이동-체험-식사-구매-귀가)을 재설계하는 시범 사업을 운영한다. 성공 사례를 전국 확산 키트로 만든다.
농업 데이터 기반 스토리텔링 플랫폼: 생산자의 이야기, 생산 과정, 지역 문화를 소비자와 연결하는 디지털 플랫폼을 구축한다. QR 코드로 농산물의 생산지·생산자·재배 과정을 확인하는, EU의 디지털 제품 여권(DPP)에 준하는 개념을 농식품에 도입한다.
4. 기대효과
단기: 농산물 브랜드·패키지 디자인 지원 사업이 시작되면서 가격 경쟁에서 가치 경쟁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로코노미 트렌드를 타는 지역 특산물의 부가가치가 높아진다.
중기: 6차산업 경험의 품질이 향상되면서 농촌 관광과 직거래 소비가 늘어난다. 수출 농산물의 브랜드·패키지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K-Food+ 수출에서 1차 농산물의 비중이 확대된다.
장기: 농업이 생산 중심에서 경험·브랜드 중심으로 전환된다. 덴마크처럼 국가 농식품 브랜드가 프리미엄 이미지를 갖게 된다. 지역 특산물이 지역의 정체성과 경제를 함께 살리는 핵심 자원이 되고, 농업인의 수입 구조에 생산 소득 외에 브랜드·경험 프리미엄이 자리를 잡는다.
이 포스팅과 연결된 주제
패키지 디자인 혁신으로 제조업 경쟁력 강화 — 농산물 패키지도 같은 원리
경험경제 시대의 디자인 전략 재편 — 농업도 경험 산업으로 전환
서비스R&D 투자 확대 — 농촌 서비스 경험도 R&D 대상
공급자 중심 구조 혁파 — 생산 중심에서 소비자 경험 중심으로
참고 자료 — 국제기구·정부·국책연구기관·학술: 농림축산식품부, 「농업·농촌 혁신 전략」(2024.12.18. 경제장관회의) 및 K-Food+ 수출 실적(2024년 약 130억 달러, 2025년 136억 3,000만 달러, 역대 최대) /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 「농업전망 2026: K-농업·농촌 대전환, 세계를 품고 미래를 열다」(2026.1.22.) /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 로코노미 활용 식품 조사(농식품정보누리 소개, 2024.11. 81.6% / 2025년 후속 81.0%) 및 맥도날드 '한국의 맛' 사례(창녕 갈릭버거·진도 대파, 마늘 130t·대파 150t) / Food Nation Denmark, 농식품 브랜드 인사이트(의사결정자 5% top-of-mind) / One Village One Product(오이타현, 1979) / Food, Culture & Society(Taylor & Francis, 2024), "Creative newcomers and local food culture" / 어글리어스(주식회사 캐비지, 못난이 농산물 정기배송, 2021) — 관련 저작(배경): 윤성원, 『디자인이 궁금해』(한국디자인진흥원, 2022); 윤성원, 『다시 디자인』(2025)
2026.06.06. 윤성원 + 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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