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공공서비스 기본값 대조정

2026. 5. 18. 23:21서비스디자인/정책디자인

공공서비스 기본값 대조정

제공자 중심 기본 설계를 수요자 중심으로 전면 재편


핵심 문제

신청해야만 받을 수 있는 복지 혜택, 거부 의사를 밝혀야만 빠져나올 수 있는 알림 수신, 신호등과 어긋난 정지선이 만드는 무의식적 법규 위반. 잘못된 기본값은 법과 제도보다 더 강력하게 시민의 행동을 규정한다. 공공서비스를 설계하는 공무원은 이미 선택설계자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다만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 이 블로그의 내용은 필자의 개인적 관점/제안이며, 한국디자인진흥원을 포함한 어떠한 기관의 입장도 대변하지 않습니다.

 

1. 현황과 문제점

기본값(Default)이 삶을 지배한다

행동경제학에서 기본값(Default)은 가장 강력한 정책 도구다. 별도의 행동을 하지 않을 때 자동으로 적용되는 선택지. 사람은 기본값에서 벗어나려면 에너지를 써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 기본값을 그대로 따른다. 
문제는 공공서비스의 기본값 대부분이 시민이 아니라 행정 편의를 위해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복지의 신청주의: 복지서비스 대부분은 '신청주의'다. 스스로 찾아서 신청하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 정보를 알지 못하거나 신청 절차를 이해하지 못하는 취약계층이 지원에서 소외된다. 서비스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이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구조다.
한국 도로의 시스템 오류: 신호등과 정지선의 위치가 어긋나 있어 운전자들이 자연스럽게 정지선을 넘게 설계된 도로가 있다. 법규 위반을 유발하는 것은 운전자의 의도가 아니라 잘못 설계된 시스템이다.
개인정보의 기본값: 많은 디지털 서비스에서 개인정보 수집·마케팅 수신의 기본값이 '동의'로 설정되어 있다. 거부하려면 별도로 체크를 풀어야 한다. 시민이 아닌 서비스 제공자에게 유리한 기본값이다.

공공서비스 설계자는 이미 선택설계자다

공공서비스를 설계하는 공무원은 의식하든 하지 않든 '선택설계자(Choice Architect)'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민원 신청 양식의 구조, 복지 혜택의 신청 방식, 공공 웹사이트의 메뉴 배열 — 이 모든 것이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이 권한을 자각하거나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역량과 체계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민원 개선은 사소한 증상만 해결할 뿐, 구조적 설계 오류는 방치된다.

프로액티브 행정 — 국제적 흐름

OECD는 복지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프로액티브 행정(Proactive Administration)'으로의 전환을 강조한다. 자격이 되는 시민에게 정부가 먼저 혜택을 안내하거나 자동 적용하는 방식이다. 다만 이것이 모든 정책에 일괄 적용될 수는 없으며 개인정보 활용·법적 근거·예산 등 보완이 필요하다. 핵심은 "기본값을 어디에 두는가"이다.

다크 넛지 — 기본값 재설계의 원칙

호주의 로보데트(Robodebt) 사태는 기본값 재설계가 어떻게 남용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반면교사다. 행동과학을 활용해 복지 부채 통보 편지를 설계했는데, 콜센터 문의를 줄이는 행정 편의를 위해 그 부담을 수혜자에게 전가했다. 2023년 왕립위원회 보고서는 이를 행동과학의 남용으로 판단했다. 기본값 재설계는 반드시 시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2. 기본값 대조정 — 무엇을 바꿀 것인가

"행정부처별로 기본값을 발굴하고, 시대에 맞게 재설정하자." 이것이 기본값 대조정(Default Reset)의 핵심이다.

우선 검토 과제 — 분야별 사례

복지·보건

과제 기존 기본값 새 기본값 주관
기초생활수급 자동 전환 직접 신청 요건 충족 시 자동 전환 보건복지부
아동수당 자동 등록 별도 신청 출생신고 시 자동 등록 보건복지부
에너지바우처 자동 지급 신청 후 수령 소득 기준 충족 시 자동 제공 산업통상부
건강검진 자동 예약 직접 예약 대상자 자동 예약·일정 안내 보건복지부
근로장려금 자동 신청 직접 신청 자격 충족 시 자동 연계 기획재정부
고용보험 자동 가입 직접 신청 첫 취업자 자동 가입 고용노동부

디지털·정보 접근

과제 기존 기본값 새 기본값 주관
개인정보 비공개 기본값 공개(동의 체크 필요) 비공개(원할 때 공개) 개인정보보호위원회
고령자 간편모드 자동 설정 일반 UI 간편화 모드 기본 적용 행정안전부
마케팅 수신 거부 기본값 수신 동의 거부가 기본(동의 시 체크) 방송통신위원회
재난문자 자동 수신 설정 필요 위치 기반 자동 수신 행정안전부

행정·생활

과제 기존 기본값 새 기본값 주관
민원 결과 자동 알림 직접 확인 문자+이메일 자동 통보 행정안전부
임대차 계약 갱신 자동 알림 개인이 챙겨야 종료 전 임대·임차인 자동 알림 국토교통부
복지 자동 연계 안내 개인이 찾아 신청 자격 해당 시 정부가 먼저 안내 보건복지부

이 과제들은 복지·보건·세무·노동·행정·디지털·주거·환경 전 분야에 걸쳐 50개 이상으로 확장 가능하다. 각 과제마다 관련 법령 개정 필요 수준이 다르며, 일부는 시행령·고시 수준으로 즉시 가능하다.

3. 국내외 사례

🇰🇷 한국 — 에너지 복지 자동 연계 (공공서비스디자인사업)

공공서비스디자인사업에서 수행한 에너지 복지 사각지대 개선 사업은 기본값 재설계의 국내 대표 사례다. 현장 관찰을 통해 복지 대상자가 신청하지 않는 이유가 '몰라서'가 아니라 '절차가 너무 복잡해서'임을 발견했다. 하나의 혜택을 신청하면 관련 혜택이 자동으로 연결되는 시스템으로 재설계했다. 기본값 하나가 복지 사각지대를 구조적으로 줄인 사례다.

🇬🇧 영국 — BIT의 퇴직연금 자동 가입 (2012~)

영국 행동통찰팀(BIT)이 주도한 퇴직연금 자동 가입(Auto-enrolment)은 기본값 재설계의 세계적 모범 사례다. 2012년 10월부터 퇴직연금의 기본값을 Opt-In(본인이 가입 신청)에서 Opt-Out(자동 가입, 원할 때 탈퇴)으로 전환했다.
결과는 극적이었다. 탈퇴율은 당초 예상했던 28%가 아닌 8~14% 수준에 그쳤다. 가입률은 36%에서 71%로 상승했으며(대형 기업 기준), 2024년 12월 기준 2012년 이후 누적 1,110만 명이 자동 가입했다. 저소득층의 연금 가입률 향상에 특히 효과적이었다. 정책 비용도 당초 추정보다 1억 파운드 절감됐다.
BIT는 또한 세금 납부 독촉 편지에 "같은 지역의 대부분이 기한 내에 납부했습니다"라는 사회 규범 메시지를 추가하는 실험을 통해 납부율이 유의미하게 향상됨을 실증했다.

🇺🇸 미국 — 오바마 행정부의 행동과학 적용 (2015)

오바마 행정부는 2015년 행정명령을 통해 연방정부 전반에 행동과학 기반 기본값 재설계를 추진했다. 사회보장 신청의 기본값을 자동 안내 방식으로 바꾸고, 퇴직연금 기본 가입율을 높이는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했다. 당시 행정부 경제보좌관을 지낸 리처드 탈러(Richard Thaler) 등 행동경제학자들이 정책 설계에 직접 참여했다.

🌐 유럽 — 장기기증 기본값의 극적 차이

프랑스·스페인·오스트리아의 장기기증 동의율은 90% 이상인 반면, 덴마크·독일·영국(개편 이전)의 동의율은 훨씬 낮았다. 차이의 핵심은 기본값이다. 전자는 Opt-Out(기본 동의, 반대 시 의사 표시) 방식이고, 후자는 Opt-In(기본 비동의, 찬성 시 의사 표시) 방식이다. 의료·법·제도·문화가 모두 비슷한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기본값 하나가 이처럼 극단적인 결과 차이를 만든다.

🇦🇺 호주 — 로보데트의 교훈 (2016~2019)

호주의 '로보데트(Robodebt)' 사태는 기본값 재설계가 어떻게 남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정부가 복지 부채를 자동으로 계산·통보하는 시스템을 운영했는데, 계산 오류로 부당한 부채 통보를 받은 수혜자들이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스스로 증빙해야 하는 구조로 설계됐다. 2023년 왕립위원회는 이 시스템이 "위법하고 비윤리적"이라고 판단했다. 기본값 재설계는 반드시 시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행정 편의를 위해 시민에게 부담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재확인했다.

4. 제안

  • 공공서비스 기본값 재설계 법적 근거 마련: 행정절차법에 "공공서비스의 기본값은 시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설계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규정한다. 새로운 공공서비스 출시·개편 시 기본값이 시민 친화적으로 설계됐는지 검토하는 절차를 의무화한다.
  • 프로액티브 행정 법적 근거 신설: 자격이 되는 시민에게 정부가 먼저 복지 혜택을 안내하거나 자동 적용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다. 개인정보 활용 범위와 자동 적용 요건을 법령에 명시한다.

제도

  • 기본값 감사(Default Audit) 제도 도입: 모든 중앙부처와 주요 공공기관이 자신이 운영하는 서비스의 기본값을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기본값 감사' 절차를 도입한다. "이 기본값은 시민에게 유리한가, 행정에 유리한가"를 스스로 진단한다.
  • 한국형 행동통찰팀(BIT) 설치: 영국 BIT처럼, 행동과학·서비스디자인·데이터과학 전문가로 구성된 팀을 국무조정실 또는 행안부 산하에 설치한다. 기본값 재설계를 전담하는 상설 기관이다.
  • 복지 자격 자동 연계 시스템 구축: 사회보장정보시스템(행복e음)에서 파악된 복지 자격 정보를 바탕으로, 수혜자가 신청하지 않아도 자격이 되는 혜택을 먼저 안내·연계하는 시스템을 구축한다.

정책

  • 영국 BIT 모델 참조 — 기본값 변경 실험 의무화: 새로운 공공서비스 기본값을 도입하기 전에, 소규모 A/B 테스트를 통해 효과를 먼저 검증하는 것을 원칙화한다.
  • OECD 프로액티브 행정 권고 이행: OECD가 권고하는 자격자 자동 발굴·자동 안내 방식을 복지 분야부터 단계적으로 도입한다. 개인정보 활용 범위를 명확히 하는 법령 정비와 병행한다.
  • 기본값 재설계 가이드라인 개발: 공공서비스 담당 공무원이 기본값의 개념과 재설계 원칙을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는 실무 가이드라인을 개발한다. 09번(공무원 디자인 교육 체계)과 연계한다.

사업

  • 부처별 기본값 재설계 시범 사업: 복지·행정·디지털 3개 분야에서 각 10개씩 기본값 재설계 과제를 선정해 파일럿 운영한다. 효과가 검증된 과제를 전국 확산한다.
  • 공공서비스 기본값 공개 데이터베이스: 각 공공서비스의 현재 기본값이 무엇인지, 그 기본값이 왜 그렇게 설정됐는지를 공개하는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다. 시민과 연구자가 개선을 제안할 수 있는 경로를 만든다.

5. 기대효과

단기: 기본값 감사 제도 도입으로 각 부처가 자신의 서비스에 어떤 기본값이 있는지를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파악한다. 즉시 변경 가능한 기본값(시행령·고시 수준)부터 순차 개선이 시작된다.

중기: 복지 자격 자동 연계 시스템이 구축되면서 복지 사각지대가 구조적으로 줄어든다. 한국형 BIT가 자리를 잡으면서 기본값 실험과 검증이 정책 과정의 정규 절차로 편입된다.

장기: 영국처럼, 기본값 재설계가 공공서비스 혁신의 핵심 방법론으로 정착한다. "신청해야만 받는" 구조에서 "자격이 되면 자동으로 받는" 구조로 전환된다. 시민이 공공서비스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되는 공공행정이 만들어진다.

이 포스팅과 연결된 주제

공급자 중심 구조 혁파 — 기본값도 공급자 편의로 설정된다
근거기반 정책 설계 정상화 — 기본값 재설계도 근거 기반으로
사회적 약자 중심의 정책 설계 — 취약계층이 가장 큰 기본값의 피해자
공공정보 전달 체계 혁신 — 기본값과 정보 전달은 함께 설계되어야 한다

참고 자료: UK Behavioural Insights Team(BIT), "Automatic Enrolment and Pensions: a Behavioural Success Story" — opt-out율 8~14%(예상 28% 대비), 가입률 36%→71%, 2024.12. 누적 1,110만 명 자동 가입 / BIT, "Pensions Policy Shows the Power of Defaults" / UK Government, "Review of the Automatic Enrolment Earnings Trigger and Qualifying Earnings Band for 2025/26"(2025.1.) / 호주 왕립위원회, 로보데트(Robodebt) 조사 보고서(2023) / OECD, Proactive Public Administration 권고 보고서 / Thaler & Sunstein, "Nudge: Improving Decisions about Health, Wealth, and Happiness"(2008, 2021 개정판) / Johnson & Goldstein, "Do Defaults Save Lives?"(Science, 2003) — 장기기증 Opt-Out 효과 실증 / 행정안전부·KIDP, 「2024 공공서비스디자인 성과사례집」(2025.9.) — 에너지 복지 연계 사례 / 윤성원, 『다시 디자인』(2025) / 한국디자인진흥원, 『디자인이 궁금해』(2022) / 윤성원, 『보이지 않는 서비스 보이는 디자인』(2025) / 윤성원, 『모두의 질문Q』(2025)

2026.05.17. 윤성원 + 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