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 18. 08:14ㆍ서비스디자인/정책디자인
공급자 중심 구조 혁파
200년째 바닥에 있는 자판기 배출구가 말하는 것
핵심 문제
동전투입식 자동판매기가 처음 특허를 받은 것은 1857년이다. 170년이 지난 지금도 음료 배출구는 바닥에 있다. 전기로 작동하니 굳이 바닥일 이유가 없는데도. 고령자와 장애인은 자판기를 이용하지 않는다. 자판기 사업자는 "고령자는 원래 자판기를 선호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고령자가 자판기를 안 쓰는 이유는 자판기가 그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급자 중심 설계의 본질이다. 문제가 치명적이지 않아서 감지하지 못할 뿐, 세상 곳곳에 이 구조가 숨어 있다.
* 이 블로그의 내용은 필자의 개인적 관점/제안이며, 한국디자인진흥원을 포함한 어떠한 기관의 입장도 대변하지 않습니다.
1. 현황과 문제점
공급자 중심 구조는 왜 지속되는가
공급자는 자신이 만든 것을 자신의 관점으로 본다. 제품이나 서비스를 설계할 때 출발점이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이고, 도착점이 "시장에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다. 사용자는 이 과정에서 마지막 검증 단계에서나 등장한다. 이 구조는 왜 바뀌지 않는 걸까?
공급자 입장에서 불편은 '치명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은 적당히 건강하고, 적당한 디지털 리터러시를 갖추고, 어지간한 불편을 감내하며 서비스를 사용한다. 그래서 설계자는 그 불편이 보이지 않는다. 문제가 치명적이지 않아서 감지하지 못할 뿐, 따지고 보면 사람들은 불편에 적응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McKinsey의 2023년 보고서는 이 문제를 정량화한다. 고객 중심 전환(Customer-Centric Transformation)을 시도한 정부 조직 대부분이 실패하는 주된 이유는 기술이나 예산의 부족이 아니라, 공급자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조직 문화와 관리자의 저항이라고 분석한다. 부처 칸막이 행정, 공급자 편의 중심의 성과 지표, 사용자를 마지막에 배치하는 기획 구조 — 이것들은 기술 문제가 아니라 설계 철학의 문제다.
공공서비스의 공급자 중심 — 세 가지 구조적 증거
첫째, 민원 서식은 행정 분류 체계를 따른다. 국민이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담당 부처의 행정 분류 체계를 따라 서식이 구성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황을 먼저 행정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 오프라인 창구에서는 직원이 이 번역을 대신해줬지만, 디지털 서비스로 전환하면서 그 부담이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됐다.
둘째, 성과 지표가 공급자 편의로 설계된다. 대부분의 공공서비스 평가는 '만족도 조사'에 머문다. 그런데 만족도 조사는 "이 서비스를 이용한 사람이 얼마나 만족했는가"를 묻지, "이 서비스에 접근조차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는 묻지 않는다. 복지 사각지대가 반복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서비스를 이용한 사람의 만족도는 높아도, 이용하지 못한 사람의 존재는 데이터에 잡히지 않는다.
셋째, 정책은 확정 후 홍보된다. 정책 과정에서 자원이 집중되는 시점은 의제를 구체화하고 해결 방법을 결정하는 초반부가 아니라, 확정된 정책을 알리는 후반부다. 대규모 홍보를 통해 수요자의 인식을 조정하는 공급자 관점의 방법이 고착화됐다. 이 구조에서는 수요자가 정책을 이해하지 못하면 "홍보가 부족했다"고 진단하고 홍보를 더 늘린다. 문제가 설계에 있다는 진단을 하지 않는다.
수요자가 원하는 것을 묻지 않으면 — 공급자 설계의 실패 패턴
공급자 중심의 기획은 "이 서비스를 누가 쓸 것인가"를 추정하지만, "이 사람들은 실제로 무엇을 원하는가"는 묻지 않는다. 두 질문은 전혀 다른 설계로 이어진다.
비키니 전용 해수욕장, 주민이 이용하지 않는 복지센터, 노인이 사용하지 않는 스마트 기기 — 이 모든 사례의 공통점은 설계자가 수요자의 실제 욕구와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 추정으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수요자가 원하지 않았던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정책과 서비스가 반복 생산된다.
서비스산업의 공급자 중심 — 저생산성의 구조적 원인
한국 서비스산업의 취업자당 노동생산성은 OECD 33개국 중 28위다. 이 낮은 생산성의 구조적 원인에도 공급자 중심 설계가 있다. 서비스는 세 가지 특성 때문에 공급자 중심 설계의 피해가 제조업보다 크다. 무형(無形)이고,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일어나며, 사용자마다 경험이 달라진다. 이 특성 때문에 '제공한 것'과 '경험된 것' 사이의 간극이 크게 벌어진다. 이 간극을 줄이는 것이 서비스디자인의 핵심이고, 이것이 서비스산업 생산성을 높이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다.
2. 국내외 사례
🇰🇷 한국 — 의료 환자 경험 평가 도입 (2017~)
한국 의료 분야는 가장 공급자 중심적인 서비스 영역 중 하나였다. 2017년 보건복지부는 '환자 경험 평가'를 도입했다. 의료 서비스의 질을 공급자 관점의 임상 지표가 아닌 환자의 실제 경험으로 측정하겠다는 전환이었다.
평가 지표는 간호사·의사와의 의사소통, 투약 및 검사 설명, 불만 제기 용이성, 병원 환경 등 환자 여정 전반을 포함한다. 2024년 기준 300병상 이상 병원에 의무 적용되며, 결과가 공개된다. 의료 공급자가 환자 경험을 성과 지표로 내재화하도록 구조를 바꾼 사례다.
🇺🇸 미국 — 행정명령 14058, 고객 경험을 연방정부 의무로 (2021)
바이든 행정부는 2021년 12월 행정명령 14058을 통해 연방정부 서비스의 시민 경험 혁신을 공식 국정 과제로 선언했다. 35개 연방기관이 인간 중심 설계 방법론을 적용해 시민 여정을 개선하도록 의무화했다.
핵심은 측정 방식의 전환이다. 공급자가 서비스를 "제공했는지"가 아니라 시민이 그 서비스를 "얼마나 쉽게 경험했는지"를 성과 지표로 삼는다. 미국 정부 디지털 서비스 기관 18F는 이 전환이 단순한 만족도 제고가 아니라 서비스 구조 자체를 바꾸는 작업임을 강조한다.
🇬🇧 영국 — GOV.UK와 GDS의 '사용자 니즈 원칙'
영국 정부디지털서비스(GDS)는 GOV.UK 출범 시 1번 원칙을 "사용자 니즈로 시작하라(Start with user needs)"로 설정했다. 기관이 제공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시민이 필요로 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모든 새로운 정부 디지털 서비스는 GDS의 '서비스 기준(Service Standard)' 심사를 통과해야 공개될 수 있다. 심사에서 탈락하면 서비스가 출시되지 않는다. 구조가 원칙을 강제하는 방식이다. 2025년 영국 정부 보고서는 이 접근이 정착한 결과, 공무원의 88%가 업무에 디자인을 활용하고 시민의 서비스 만족도가 의미 있게 개선됐다고 밝혔다.
🇪🇸 스페인 바르셀로나 — 슈퍼블록 프로젝트
바르셀로나의 슈퍼블록(Superblock)은 100년간 자동차 이동 효율을 최우선으로 설계된 도시 구조를 보행자·거주자 중심으로 전환한 사례다. 9개 블록을 묶어 내부 차량 통행을 제한하고 그 공간을 시민 생활 공간으로 전환했다. 2023~2024년 평가에 따르면, 슈퍼블록 내 대기오염 물질이 평균 25% 감소하고 보행자 교통사고가 60% 이상 줄었다. 공급자(교통당국) 편의에서 수요자(거주 시민) 경험으로 설계 기준을 전환한 결과다.
🇯🇵 일본 — 소니 Reon Pocket, 극단적 사용자에서 시작한 혁신
소니의 웨어러블 냉각·난방 기기 'Reon Pocket'은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제품 혁신 사례다. 무더운 여름 옥외 근무자, 갱년기 열감을 겪는 중장년 여성처럼 기존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극단적 사용자의 불편을 출발점으로 설계됐다. 2019년 출시 이후 2024년 Reon Pocket 5까지 발전하며 이 제품이 개척한 개인용 체온 조절 기기 시장이 글로벌로 확산되고 있다.
3. 제안
법
- 공공서비스 시민 경험 평가 의무화: 의료 분야 환자 경험 평가처럼, 모든 주요 공공서비스에 시민 경험 평가를 의무화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다. "서비스를 이용한 사람의 만족도"뿐 아니라 "서비스에 접근하지 못한 사람의 규모"를 측정·보고하도록 규정한다.
- 공공서비스 설계 시 수요자 참여 법적 의무화: 일정 규모 이상의 공공서비스 신설·개편 시, 실제 수요자가 설계 초기 단계에 참여하는 절차를 행정절차법에 규정한다. 미국 행정명령 14058처럼, 공급자가 아닌 시민 여정을 서비스 설계의 법적 출발점으로 삼는다.
제도
- 한국형 서비스 기준 심사 도입: 영국 GDS의 서비스 기준처럼, 새로운 공공 디지털 서비스가 "사용자 니즈로 시작했는가"를 심사하는 기준을 도입한다.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서비스는 출시되지 않는 구조를 만든다.
- 수요자 경험 지표 도입: 공공서비스 평가의 KPI를 전면 재검토한다. 처리 건수, 예산 집행률 같은 공급자 중심 지표에 시민 완료율, 서비스 포기율, 접근 장벽 발생 빈도, 재문의율 등 수요자 경험 지표를 균형 있게 반영한다.
- 극단적 사용자 참여 설계 의무화: 공공서비스 기획 단계에서 해당 서비스를 가장 어렵게 이용하는 집단을 리드유저로 포함하는 구조를 의무화한다. 이들이 편하게 쓸 수 있어야 나머지 사람도 편하다.
정책
- 공공서비스 설계 프로세스 역전: 정책 과정에서 자원이 집중되는 후반부(홍보·전달)에서 초반부(문제 정의·사용자 이해)로 투자 비중을 이동시킨다. 정책 확정 전에 수요자 리서치·파일럿·효과 검증이 먼저 이루어지는 구조를 표준화한다.
- 공공서비스 포기율 공개 제도 도입: 복지·민원·의료 등 주요 공공서비스에서 신청을 시작했다가 포기한 비율을 정기적으로 측정하고 공표한다. 이 수치가 공개되면 공급자는 자신의 서비스가 어디서 실패하는지를 데이터로 직면하게 된다.
- 민간 서비스 영역의 수요자 중심 전환 촉진: 의료·금융·교육·교통 등 주요 민간 서비스 영역에 서비스디자인 바우처를 연계해, 공급자 중심 설계를 수요자 중심으로 전환하는 컨설팅 지원을 확대한다.
사업
- 공공서비스 수요자 여정 진단 사업: 주요 공공서비스에 대해 실제 수요자가 필요를 인식하는 순간부터 완료하거나 포기하는 순간까지의 전 여정을 추적하는 진단 사업을 운영한다.
- 공급자 중심 구조 혁파 시범사업: 공급자 중심 구조가 가장 심한 것으로 진단된 민원 서식·복지 신청 절차·공공 안내 체계 5개를 선정해, 수요자 관점에서 처음부터 다시 설계하는 시범사업을 운영하고 전 과정을 공개한다.
- 서비스디자인 기반 공공서비스 혁신 플랫폼: 수요자 중심으로 재설계한 우수 사례를 체계적으로 아카이빙하고 공유하는 플랫폼을 운영한다. 성공 방법론이 다른 기관으로 빠르게 전파되는 생태계를 만든다.
4. 기대효과
단기: 공공서비스 시민 경험 평가가 의무화되면서 공급자들이 처음으로 "서비스에 접근하지 못한 사람"의 규모를 측정·보고하기 시작한다. 포기율 공개로 실패 지점이 가시화되면 개선 압력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중기: 서비스 설계 프로세스가 역전되면서 새로 만들어지는 공공서비스가 처음부터 수요자의 여정으로 시작된다. 민간 서비스 영역의 수요자 중심 전환이 확대되면서 서비스 산업 전반의 품질이 높아진다. 복지 사각지대가 구조적으로 줄어든다.
장기: 170년째 바닥에 있던 자판기 배출구가 허리 높이로 올라오는 것처럼, 공급자 편의로 고착된 공공·민간 서비스 설계들이 하나씩 수요자 중심으로 전환된다. 한국의 공공서비스 신뢰도가 OECD 상위권으로 올라가고, 서비스 산업의 생산성 격차가 해소되기 시작한다.
이 포스팅과 연결된 주제
- 02. 경험경제 시대의 디자인 전략 재편 — 공급자에서 수요자로의 전환이 전제
- 근거기반 정책 설계 정상화 — 공급자 논리를 깨는 수요자 리서치 방법론
- 공공서비스 기본값 대조정 — 기본값도 공급자 편의로 설정되어 있다
- 포용디자인 기준 의무화 — 공급자 중심 설계의 가장 큰 희생자는 소수자
참고 자료: McKinsey & Company, "Customer-Centric Digital Transformation in Government"(2023.6.) / McKinsey & Company, "Governments Can Deliver Exceptional Customer Experiences"(2022.11.) / McKinsey & Company, "A New Approach to Improving Government Productivity"(2025.1.) / UK Government Digital Service, GOV.UK Service Standard / UK Government, "Public Design in the UK Government: Evidence Review"(2025) / US Executive Order 14058, "Transforming Federal Customer Experience"(2021.12.) / 보건복지부, 환자경험평가 현황(2017~2024) / Barcelona City Council, Superblock Impact Assessment(2023~2024) / Sony Corporation, Reon Pocket 시리즈(2019~2024) / 윤성원, 『다시 디자인』(2025) / 한국디자인진흥원, 『디자인이 궁금해』(2022) / 윤성원, 『보이지 않는 서비스 보이는 디자인』(2025) / 윤성원, 『모두의 질문Q』(2025)
2026.05.17. 윤성원 + 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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