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 18. 08:12ㆍ서비스디자인/정책디자인
국가 디자인 역량 고도화
사다리 1·2단계에서 문제해결·혁신전략 수준으로 도약
핵심 문제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많은 디자이너를 배출하고, 디자인 진흥 예산을 꾸준히 늘려왔다.
그런데 왜 디자인은 여전히 '예쁘게 만드는 것'으로 남아 있는가?
* 이 블로그의 내용은 필자의 개인적 관점/제안이며, 한국디자인진흥원을 포함한 어떠한 기관의 입장도 대변하지 않습니다.
1. 현황과 문제점
디자인 사다리로 본 한국의 위치
2001년 덴마크디자인센터(DDC)가 개발한 '디자인 사다리(Design Ladder)'는 조직이 디자인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4단계로 구분하는 모델이다.
- 1단계: 디자인을 사용하지 않는 단계. 의사결정에 디자인이 개입하지 않는다.
- 2단계: 스타일링으로서의 디자인. 제품이나 서비스가 완성된 후 외형을 다듬는 데만 사용한다.
- 3단계: 프로세스로서의 디자인. 개발 초기부터 디자인이 방법론으로 참여한다.
- 4단계: 혁신 전략으로서의 디자인. 조직의 비전과 방향 자체를 디자인이 이끈다. 애플이 대표적 사례다.
한국 기업과 공공기관의 현실은 어디에 있는가. 2010년 조사에서 산업단지 입주기업 80% 이상이 디자인을 전혀 접해보지 않은 1단계였다. 2024년 기준 국내 디자인 활용률은 37.3%로 소폭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선진국 평균 60%와의 격차는 크다. 더 중요한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질이다. 활용하는 기업들조차 대부분 2단계, 즉 완성된 결과물에 디자인을 입히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공공부문은 더 심각하다.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 대부분은 디자인을 '홍보물 제작'이나 '공간 꾸미기'로 인식한다. 정책 기획 단계에서 디자인적 접근이 개입하는 경우는 국민디자인단 등 일부 시범사업을 제외하면 사실상 없다.
인식 문제가 구조 문제를 만든다
왜 이 상황이 지속되는가. 표면적 이유는 인식 부족이지만, 뿌리는 구조적이다.
통합된 전략이 없다. 디자인 정책은 산업부(산업디자인), 문체부(공공디자인), 행안부(정책디자인) 등 4개 부처가 독립적으로 운영한다. 국가 차원에서 '디자인 역량을 어떻게 고도화할 것인가'를 총괄하는 전략과 조직이 없다.
단계적 성장 경로가 없다. 1단계 기업이 2단계로, 2단계 기업이 3단계로 올라갈 수 있는 진단·지원·연계 체계가 없다. 지원 사업은 있지만 사다리 개념에 기반한 맞춤형 성장 경로 설계는 부재하다.
디자이너가 전략 결정에 없다. 기업의 최고경영자 중 디자인 출신이 몇이나 되는가. 정부 부처의 정책기획 담당자 중 디자인적 사고를 훈련받은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4단계로의 이동은 디자이너를 더 많이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결정 구조에 디자인적 사고가 자리 잡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적 손실로 이어진다
디자인 역량 정체는 추상적 문제가 아니다. 디자인에 투자한 기업은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총매출 성장률이 약 22%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국내 기업 대부분이 사다리 1~2단계에 머무는 것은 국가 산업 경쟁력의 구조적 손실이다. 2023년 기준 디자인의 경제적 가치는 159.9조 원으로 전년 대비 10.3% 감소했다. 디자인 산업 규모는 늘어나는데 경제적 가치는 줄어드는 역설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
2. 국내외 사례
🇩🇰 덴마크 — 사다리를 측정하고 정책으로 연결한 나라
덴마크는 디자인 사다리를 단순한 개념 모델로 만들지 않았다. 연속적인 조사를 통해 기업들이 사다리의 어느 단계에 있는지 정기적으로 측정하고, 그 결과를 정책 수립의 근거로 사용했다. 이를 통해 국가 디자인 정책 'Design Denmark 2009'와 '2013 창조산업·디자인 성장 계획'이 만들어졌다.
2024년 덴마크 디자인상은 의료·에너지·지속가능성 등 사회 문제 해결 영역에서의 수상작들을 선정하며, 디자인이 심미적 결과물을 넘어 사회 변화의 도구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줬다. 덴마크 DDC의 수석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덴마크 디자인은 단순히 아름다운 사물에 관한 것이 아니라, 기업 비즈니스 모델이자 사회 설계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 싱가포르 — 디자인을 국가 전략으로 격상한 25년의 여정
싱가포르의 총리 리센룽은 "싱가포르는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나라다. 우리가 오늘 가진 것들 중 자연적으로 생긴 것은 없다"고 말했다. 싱가포르는 1961년 경제개발청 설립 이후 디자인을 국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체계적으로 키워왔다.
2003년 설립된 DesignSingapore Council은 세 가지 전략으로 국가 디자인 역량을 고도화했다. ①글로벌 경쟁력 있는 디자인 클러스터 육성, ②기업이 디자인을 경제·사회적 성장에 활용하도록 지원, ③혁신과 디자인 지식재산 창출 촉진.
2024년에는 싱가포르 최초의 국가 수준 디자인 교육 위원회(DEAC)가 '미래 디자인 학교' 청사진을 발표하며, 디자인 사고를 "국가적 역량(national skillset)"으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공식화했다. 2025년에는 'Nation by Design'을 국가 캠페인 주제로 삼아 디자인을 단순한 미학 도구가 아닌 의도성의 사고방식으로, 싱가포르의 시스템·정체성·미래 준비성을 형성해온 힘으로 재정의했다.
🇬🇧 영국 — Design Council의 50년 축적
영국 디자인카운슬은 정부가 디자인을 국가 혁신 전략으로 활용하는 가장 오래된 사례다. 기업 디자인 역량 진단, 정책디자인 실험, 공공서비스 혁신, 디자인 교육 등 생태계 전반을 아우르는 역할을 50년 이상 수행해왔다. 특히 '더블 다이아몬드(Double Diamond)' 방법론을 개발해 전 세계 디자인 프로세스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했다.
🇯🇵 일본 — 디자인경영 선포로 산업 전환
일본 경제산업성은 2018년 '디자인경영 선언'을 발표하고, 기업이 디자인을 경영 전략의 핵심으로 삼도록 촉구했다. 디자이너를 이사회 수준에 두는 '최고디자인책임자(CDO)' 도입, 기업 디자인 역량 측정 지표 개발, 디자인 중심 스타트업 지원 등이 이어졌다. 정부 차원에서 디자인 사다리의 3~4단계 전환을 정책 목표로 설정한 드문 사례다.
🇦🇺 호주 — 디자인 사다리의 진화를 주도
호주의 연구자들은 덴마크 디자인 사다리를 더 발전시켜 '조직적 전환(Organisational Transformation)'과 '국가 경쟁 전략(National Competitive Strategy)'을 추가 단계로 제안했다. 조직 차원의 변화를 넘어 사회 전체의 설계 역량으로 디자인을 확장하는 방향이다. 국가 디자인 역량 고도화가 더 이상 산업 정책만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3. 제안
법
- 디자인 역량 지수(Design Maturity Index) 법제화: 산업디자인진흥법에 기업과 공공기관의 디자인 활용 수준을 정기적으로 측정·공표하는 근거를 마련한다. 덴마크처럼 측정이 정책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 디자인경영 도입 기업 지원 근거 명시: 디자이너를 전략 의사결정에 포함시키는 기업에 대한 세제 혜택 및 지원 근거를 법령에 명시한다.
제도
- 기업·공공기관 디자인 성숙도 진단 체계 구축: 사다리 1~4단계 기준에 맞는 진단 도구를 개발하고, 기업이 스스로 진단하고 다음 단계로 이동하는 경로를 제시하는 상설 체계를 마련한다.
- 공공기관 디자인 역량 평가 항목 신설: 공공기관 경영평가에 디자인 활용 수준 항목을 포함한다. 평가가 변하면 조직이 변한다.
- 최고디자인책임자(CDO) 공공기관 도입: 일본의 디자인경영 선언을 참조해, 국가 공공기관과 지방 공기업에 디자인을 전략 차원에서 책임지는 직책을 도입한다.
정책
- 단계별 맞춤형 지원 체계 재편: 현재의 디자인 지원 사업은 대부분 2단계(스타일링) 수준의 기업을 대상으로 한다. 3~4단계 전환을 위한 전략 컨설팅, 디자인 리더십 교육, 조직 혁신 지원을 별도 사업으로 구성한다.
- 국가 디자인 비전 선포: 싱가포르의 'Design 2025 마스터플랜', 덴마크의 'Design Denmark' 같은 국가 차원의 중장기 디자인 비전을 수립하고 공식 선포한다. 현재 한국에는 이것이 없다.
- 디자인 역량 고도화를 국가 R&D 전략에 연계: 기술 중심 R&D에서 디자인 주도 혁신을 포함하는 R&D 체계로 전환, 서비스·공공·사회 분야 디자인 R&D 투자 비율을 단계적으로 확대한다.
사업
- 국가 디자인 성숙도 지도(Map) 공표: 산업별·지역별·기관별 디자인 사다리 단계를 측정해 국민과 기업에 공개한다. 덴마크가 측정을 통해 정책을 개선했듯, 공개적 진단이 변화의 동력이 된다.
- 디자인 리더십 프로그램 신설: 기업 경영진과 공공기관 고위직을 대상으로 디자인 사다리 3~4단계 전환을 위한 디자인 리더십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싱가포르 School of X 모델 참조.
- 디자인 혁신 기업 인증제 도입: 3~4단계 수준의 디자인 활용 기업을 국가 인증하고 정부 조달·금융 지원에서 우대하는 인센티브 체계를 마련한다.
4. 기대효과
단기: 기업과 공공기관의 디자인 활용 수준을 정기적으로 측정하는 체계가 갖춰지면서, 정책이 실제 데이터에 근거하게 된다. 디자인을 '스타일링'이 아닌 '혁신 도구'로 인식하는 기업의 비율이 점진적으로 높아진다.
중기: 디자인 활용률이 50%를 넘어서고, 3~4단계 기업 비율이 현재의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난다. 디자인 경제적 가치의 감소 추세가 반전된다. 공공기관에 CDO 직책이 자리를 잡으면서 공공서비스 품질이 개선되기 시작한다.
장기: 싱가포르처럼 디자인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 언어가 된다.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이 제품의 스펙이 아닌 경험의 설계 역량에서 나오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디자인이 사회문제 해결의 공식 방법론으로 정착한다.




이 포스팅과 연결된 주제
- 04. 국가 디자인 분류 체계 일원화 — 성숙도 측정의 전제 조건
- 국가 디자인 통합조정기구 신설 — 사다리 고도화 전략을 총괄할 컨트롤타워
- 기업 디자인 활용률 제고 — 사다리 1·2단계 기업을 위한 현장 정책
- 공무원 디자인 교육 체계 수립 — 공공부문 사다리 상승의 전제
참고 자료: 윤성원, 『모두의 질문Q』(2025) / 한국디자인진흥원, 『디자인이 궁금해』(2022) / 윤성원, 『다시 디자인』(2025) / 산업통상자원부, 「2024 디자인산업통계」(2023년 기준) / Danish Design Centre, Design Ladder(2001) / DesignSingapore Council, Design 2025 Masterplan / 일본 경제산업성, 「디자인경영 선언」(2018)
2026.05.17. 윤성원 + 클로드
'서비스디자인 > 정책디자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04. 국가 디자인 분류 체계 일원화 (0) | 2026.05.18 |
|---|---|
| 03. 공급자 중심 구조 혁파 (0) | 2026.05.18 |
| 02. 경험경제 시대의 디자인 전략 재편 (0) | 2026.05.18 |
| (영상) 차세대 도시 문제 해결: 도시의 제도적 혁신 - 제프 멀건 등. 2026.1.7. (1) | 2026.03.27 |
| (영상) AI 시대의 디자인과 정책 - 제프 멀건(Geoff Mulgan) (0) | 2025.12.25 |
| 유럽 디자인정책 지형 보고서 - BEDA. 2025.10.31. (1) | 2025.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