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수요자 중심의 디자인

2023. 7. 13. 01:55디자인/디자인이 궁금해

사용자의 행동을 관찰하고 경험에 공감하여 사용자 중심의 제품서비스를 개발해야 한다. 사용자의 직접적 의견을 듣는 방법보다 행동 관찰이나 참여형 워크숍 등의 방법을 통해 더 깊은 잠재된 욕구를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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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버튼은 필요한가?

전자제품에 하나의 버튼만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전원 버튼이라 생각하기 쉽다. 아이팟 개발 초기 회의 중에 스티브 잡스는 모든 버튼을 없애자고 했다. 디자이너와 엔지니어들은 충격에 휩싸였고 당황한 연구원이 질문했다.
"아무리 그래도 전원 버튼은 필요하지 않나요?"
"사용자가 기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전원이 꺼지고 다시 사용하기 시작하면 전원이 들어오게 만들면 충분하죠.”
스티브 잡스는 간결하고도 인간 중심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아이팟에는 전원 버튼이 없다.

사진 1세대 아이팟, 2001, 애플


사용자로서는 음악재생이 되면 될 뿐, 제품의 전원을 켜는 단계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전자제품이라면 전원 버튼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야말로 공급자 중심의 세계관이 만든 편견 아닐까?
수요자 중심의 접근방식은 혁신의 기회를 만든다. 디자인은 수요자의 입장에 서서 공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수요자 중심의 접근, 디자인적 접근이 왜 강조되어야 하는지 사례로 살펴본다.


아이를 위한 칫솔, 작으면 된다?

아이들 칫솔의 생김새를 떠올려보라. 고무 재질의 통통한 손잡이와 작은 칫솔머리… 지금 떠오른 이미지는 199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미국의 대표적 디자인기업 IDEO는 오랄 비(Oral-B)를 위해 5~8세용 어린이 칫솔을 디자인하면서 아이들의 이 닦는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고정관념을 깨는 제품을 만들게 된다. 1996년 이 제품 출시 전까지만 해도 어린이용 칫솔은 어른 칫솔보다 작다는 정도 개념의 제품만 있었다.
IDEO 디자이너가 아이들을 관찰해 보니 실제로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칫솔을 손가락으로 잡는 대신 네 손가락과 손바닥을 함께 써서 주먹을 쥐듯 칫솔을 붙잡고 있었고 손아귀에서 자꾸 빠지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들은 손가락 하나하나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더 쉽게 잡을 수 있게 하려면 오히려 어른의 칫솔대보다 더 두꺼워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 결과 더 작은 힘으로도 붙잡을 수 있고 만지작거리기 좋은 느낌의 통통한 고무 손잡이를 가진 어린이 전용 칫솔이 탄생했다.

그림 아이들 칫솔의 전형이 된 오랄 비 어린이용 칫솔

* 사진 출처 : http://www.ideo.com/work/gripper/


이 사례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그전까지 아이들 칫솔을 만들 때 누구도 아이들 행동을 관찰해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었다는 점이다. 누군가 관찰을 했더라도 아이들이 불편해하는 점에 관해 공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공감했더라도 해결책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칫솔을 사용한 오랜 역사 이래, IDEO가 실제로 알아내려 시도하고 사용자와 공감한 디자이너가 통찰을 얻어 디자인하기 전까지는 아이 입장에서 필요한 칫솔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우리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며 사용자의 경험쯤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전제한다. 무언가를 경험했다고 해서 그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이였기 때문에 경험이 선입견이 되어 오히려 겸허하게 아이에게 불편한 것이 무엇이고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 생각을 못하게 된 것인지 모른다.

IDEO의 디자이너들은 아이들이 자기 의사를 분명히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관찰 방법을 사용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원래 사용자 대부분은 자기가 불편한 것,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디자인은 말이나 글 외에도 사용자를 관찰하는 조사 방법을 사용한다.


수요자 관찰을 통해 숨겨진 욕구 발견하기

앞서 소개했던 비키니 전용 해수욕장의 실패는 사람들에게 의견을 묻는 것으로는 진정한 욕구(Needs)를 파악할 수 없고 해결책도 찾을 수 없기에 생긴 결과였다. 사람의 욕구와 의사소통 방식에 대한 이해가 커지면서 수요자에 대한 조사 방법도 고도화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설문이나 인터뷰처럼 수요자에게 물어보고 그 응답을 근거로 여러 개선점을 찾는 조사 방법을 주로 써왔는데, 사람들은 자기 욕구를 잘 알지 못하고, 원하는 것을 알고 있어도 그것을 정확히 말로 표현하기 힘들어하고, 설령 용케 표현했다 해도 전달되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긴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또 공급자가 아무리 수요자 중심으로 하겠다고 작정해도, 공급자와 수요자 간의 처지는 문화와 언어가 다른 이민족 같아서 공급자가 수요자들의 심정을 헤아려 사소하지만 중요한 애로점을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럼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할까?

문화인류학은 서로 언어가 달라 소통이 안 되는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다 보니 오래전부터 말과 글에 의존하지 않고 수요자의 의도를 알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었다. 이런 유형의 연구 방법을 참여 관찰(participant observation) 또는 민족지학(ethnography), 민속지학이라고 한다. 수요자 심리를 알아내고자 하는 분야에서도 비언어적 조사를 하고자 할 때 이러한 연구 방법을 참고할 수 있다.
설문조사, 인터뷰 등을 통해서는 발견할 수 없는, 수면 아래에 잠재된 수요자의 욕구 세계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측면이 있기에 마케팅에서도 일찍이 소비자조사에 관찰 방법을 도입하고 있고 디자인 분야에서도 관찰과 협력적 워크숍 등 민족지학적 방법을 활용하고 있다. 선입견 없이 사람의 행동을 관찰해 표현하지 못하는 욕구를 찾아내고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찾아 해석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한다.

사용자조사 방법의 연구자 Sanders와 Dandavate는 사용자조사 방법의 특징을 다음 표와 같이 표현한다.

* 그림 사용자조사 방법론 간의 특징(Sanders & Dandavate 1999)


말이나 글로 하는 리서치보다는 관찰 리서치가, 그보다는 함께 하는 워크숍 등의 참여적 리서치가 더 깊이 있는 잠재 욕구를 발견할 가능성이 더 큼을 의미한다.

'내게 말해보라. 그러면 잊어버릴 것이다. 내게 보여주라. 그러면 기억할지도 모른다. 나를 참여시켜라. 그러면 이해할 것이다.'
이것은 필립 코틀러가 '마켓 3.0'에서 인용했던 중국 속담이다. 말이나 글로 표현되는 것보다도 행동 관찰이, 행동 관찰보다는 참여를 통해 더 깊이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용자조사에 관한 통찰과도 놀랄 만큼 비슷하다.

이것은 수요자 중심의 제품/서비스 개발에 있어 설문조사보다 관찰조사 방법이 선호되며 디자인싱킹 워크숍과 같은 참여형 워크숍이 점차 늘고 있는 현상을 설명한다.

출처 : 디자인이 궁금해, 2022, 윤성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