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소유에서 경험으로

2023. 7. 13. 02:00디자인/디자인이 궁금해

경험 중심의 서비스산업으로 산업이 변화하고 있다. 사용자의 경험 가치를 최적화하는 능력이 미래의 핵심 경쟁력이 될 것이다. 이에 따라 디자인이 중요시되며, 기업들도 사용자 경험을 고려한 디자인 개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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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가 원하는 것은 제품이 아니라 경험

 MP3플레이어는 음악을 듣는 휴대기기로 한때 시장을 지배했지만 지금은 볼 수 없다. 더 새로운 디자인과 좋은 기능의 제품이 계속 출시되었다면 지금까지 MP3플레이어는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그림 필립스 MP3 플레이어

* 사진 출처 : http://www.philips.co.kr/c-p/SA1MXX04K_97/gogear-mix-4gb 


제품성능, 가격, 기능, 외관 디자인과 같은 ‘제품성’은 제품이 판매되게 하는 본질적 요소가 아니다. 더 본질적인 요소는 언제나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 사용자의 ‘욕구’다. 본래 사용자는 ‘제품의 소유’가 아니라 제품이 제공하는 어떤 ‘서비스의 경험’이 필요해서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다. 이 경험을 더 잘 충족시키는 무언가가 나타난다면 아무리 시장을 압도하고 있던 제품이나 서비스라도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다. ‘휴대할 수 있는 음악’이 필요했던 사용자의 욕구는 워크맨에서 MP3플레이어로, 지금은 휴대폰으로 충족된다. 그러니 아무리 싼 가격, 뛰어난 기술, 기능, 좋은 디자인의 MP3플레이어가 나왔다해도 휴대폰으로 넘어가는 사용자를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MP3플레이어뿐만 아니다. 사용자의 필요를 충족하는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가 나타나는 순간 기존의 제품, 기존 산업은 사라질 수 있다.
TV는 본래 원거리 영상 콘텐츠를 전해주는 제품으로 사용자는 TV로 원거리의 영상을 보는 서비스를 이용한다. 더 큰 크기, 더 높은 해상도, 곡면 화면 등 TV는 이제 기술적 관점에서 최대치의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사용자 입장에서 그 서비스를 실현하는 제품은 꼭 TV가 아니라도 관계없다. 벽지, 커튼, 빌트인 서랍장의 문, 냉장고 문, 안경, 콘택트렌즈 등 무엇이건 된다. 

그러니 생산자들은 새로운 TV나 휴대폰이 아니라 사용자가 갖는 욕구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떤 대상물 또는 서비스로 실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필요한 건 세탁이지 세탁기가 아니잖아요.”라는 백준상 연세대학교 교수의 말은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이라 생각한다.

산업이 변환기를 맞고 있다. 생산 중심의 제조산업에서 경험 중심의 서비스산업으로, 제조산업에도 이제 수요자에 관한 연구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산업은 생산품(제품, 농산물, 에너지 등)의 생산에 집중해 왔다. 생산성과 효율성 향상을 통해 생산력을 높이는 데 힘을 기울여 온 것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생산자 중심의 관점이다. 사용자는 생산품의 구매에서 만족을 느끼는 단계를 넘어 정서와 심리적 만족을 욕구한다. 사용자는 이미 생산품 자체가 아닌 서비스 경험을 구매한다.

그림 소비자의 인식 변화. 생산품 소유에서 서비스경험 추구로



맛있어서 비싼 걸까, 비싸서 맛있는 걸까?

커피 시장 1위 기업은 스타벅스이다. 소비자들이 꼽은 커피전문점 만족도도 늘 최상위권이다. 그런데 스타벅스의 가격은 가장 비싼 편이다. 그런데 정말로 가격이 비싼 만큼 품질도 좋고 그에 따라 만족도가 좋은 것일까?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만족도가 높게 나타난 것은 아닐까? 그것을 짐작하게 하는 실험이 있다. 

그림  맥카페 - 커피 소비자들의 심리보고서 (개인 편). 2009.

* 동영상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D7sRTGCKfXA 

2009년 맥도널드 커피 브랜드 맥카페가 국내에 첫 선을 보일 때 매체에서 방영되었던 실제 실험이다. ‘2,000원’과 ‘4,000원’이라고 적혀 있는 두 개의 컵에 (사용자는 모르게) 같은 커피를 담아 맛보게 했다. 두 커피는 혀에 느껴진 맛이 당연히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4천 원짜리 커피가 더 맛있다고 답했다. 

“2천 원짜리 커피는 신맛이 좀 더 강한 것 같은데, 4천 원짜리는 커피 자체의 원두 향이 좀 더 깊게 나는 것 같아요.” 
“4천 원짜리가 더 좋은 것 같아요. 향이 좀 더 진하고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인 것 같고, 자꾸 더 손이 가게 되는 것 같아요.”
“나는 맛에 민감한 편인데, 4천 원짜리 컵에 담긴 이 커피는 부드럽고 향이 오래가고 쓴맛이 좀 덜해서 시럽이나 설탕을 넣지 않고 먹어도 될 만큼…….” 
등 구체적인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결국, 비싸다고 생각한 심리가 같은 제품을 다르게 느끼게 작용하는 것이다. 제일 비싼 스타벅스 커피가 가장 맛있다고 느끼는 것도 같은 이치 아닐까? 심리적 요인이 경제적 가치를 결정한다. 

제공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서비스는 생산품 + 사람 + 환경 + 전후 관리 등의 생산요인으로 구성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용자 측면에서 서비스는 매우 다양한 요소로 경험된다. 경험은 생산품이 포함된 서비스를 통해 형성되며 사용성, 감각, 인지, 감정, 감성, 심리, 느낌, 기억의 복합체이다. 사용자가 생산품과 서비스를 경험하면서 어떤 가치를 느끼게 되는지 알고 그에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까지 생산요소를 최적화하는 것이 생산자의 핵심 경쟁력이었다고 한다면, 앞으로 사용자의 경험 가치를 최적화할 수 있는 능력이 경쟁력의 핵심이 될 것이다.


이제는 사용자 경험이 문제다

이제 힘은 제공자에서 사용자에게로 넘어왔다. 가치 생산과정 전반에서 영향력의 중심이 제공자로부터 사용자로 이동하면서 심리가 경제적 가치를 결정한다는 큰 인식 전환이 왔는데, 그 전환을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대니얼 카너먼’ (Daniel Kahneman)이다.

대니얼 카너먼은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심리학자이자 행동경제학(심리학에 근거한 경제학)의 창시자이다. 그가 아모스 트버스키와 함께 썼던 ‘휴리스틱과 편향(Heuristics and Biases)’이라는 논문은 행동경제학이라는 학문이 만들어지는 씨앗이 되었다. 
행동경제학이 기본적으로 갖는 전제는 인간은 논리성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늘 주먹구구식으로 편향되게 사고하며 한 번 했던 실수에 대해서도 같은 조건을 주면 실수를 계속 반복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뇌는 원래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기관(무게는 체중의 2%에 불과하나 에너지 총량의 20%를 소모)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뇌의 효율성을 극대화해야 하므로 정보를 처리하면서 패턴화 시키고 단순화시키는 기능을 발달하게 되었다. 휴리스틱(직관적이고 주먹구구식의 의사결정)하게 생각하게끔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셈이다. 이러한 사고 성향은 편향을 가져온다. 뇌의 생리적 특성으로 인해 인간의 사고가 쉽게 고정관념을 가지게 되고 이는 편향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행동경제학은 최근 경제학의 주류가 되었다. 대니얼 카너먼에 이어 로버트 실러(Robert Shiller)는 효율적 시장이론을 비판하고 행동경제학의 확산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3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또한 ‘넛지’의 공동 저자인 리처드 탈러(Richard H. Thaler)는 행동경제학 이론을 실제 정책에 적용해 실증하기 위해 노력하며 행동경제학을 학문적으로 성숙시키고 확산하는데 이바지한 공로로 2017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다. 
* 관련 기사 : ‘노벨경제학상, 리처드 탈러 美 시카고대 교수… 경제학에 심리학 접목 ‘행동경제학’ 창시자‘, 2017.10.11. 조선비즈

최근 행동경제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커지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1. 인간의 심리가 경제적 가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사례가 많아짐으로써 경제이론이 인간의 행동을 통해 실증 가능한 영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 인간의 심리와 행동으로 경제 현상을 해석하고자 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경제학과 심리학이 통합되고 있다. 
3. 과거보다 인간의 심리와 감정을 다루는 학문 분야가 더 주목받게 되었다. 이것은 앞으로 디자인의 역할에 대한 기대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사용성과 매력도를 높이는 역할에서 정책 수요자의 심리를 조정하여 정책 효과를 높이는 역할로까지 변화하고 확장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매사에 이성적으로 구매 의사결정을 한다고 하면 있을 수 없는 경제 현상이 나타나면서 전통적 경제학으로는 이를 해석할 수 없게 되자 심리학에 기반을 둔 경제학인 행동경제학이 주목받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 심리가 경제적 가치를 결정한다.


최근 경제경영서 베스트셀러에 심리학 서적들이 많이 보이는 현상도 경영자들이 소비자의 숨겨진 니즈를 찾아내는 방법론에 관심을 갖게 된 경향을 보여준다. 심리학과 관계가 적어 보였던 경제학 같이 영역에서 인간의 심리와 감정에 초첨을 맞추게 된 것과 경영자들이 심리학 책에 빠지게 된 것에는 같은 이유가 있다. 서비스산업이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 부상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제조산업의 성장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제조서비스화 경향과 서비스산업의 성장으로 인해 산업구조는 제조산업 중심에서 서비스산업 중심으로 점차 전환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이제까지 공급자 위주였던 것이 모두 수요자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시장(사용자) 중심으로, 비전(미래 통찰력) 중심으로, 감성과 민감성 중심으로 세상이 바뀌고 있다. 이것은 학문에도 영향을 미쳐 기업의 내부자원을 잘 이해하고 효율화함으로써 차별적 경쟁우위를 지속하고자 하는 관점의 경영학, 경제학, 마케팅 등의 학문 대신, 점차 수요자인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수요자의 니즈를 분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분야가 주목받고 있다. 앞으로도 이러한 경향은 더 심해질 것이다.


소비자 통찰, 왜 디자인인가?

세계적인 디자이너 하라 켄야는 최근 몇 년째 주거의 미래를 그리는 ‘하우스 비전’이라는 전시를 개최하고 있다. 재난재해, 노령화 등의 인류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거는 어떤 형태여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디자이너의 관점으로 해답을 제시하는 전시이다. 

그림 하우스비전 전시. 2016. 도쿄.


그는 2007년에는 사양 산업이 되어 가고 있는 섬유산업의 미래를 그리는 ‘센스웨어’ 전시로 섬유산업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림 센스웨어 전시작. 모듈형 의상

 

그림 센스웨어 전시작. 물방울 형태의 가방


사진은 모듈형의 섬유 타일로 조합해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 수 있는 옷과 특이하게 직조되어 물건을 넣으면 물방울처럼 형태가 부푸는 가방이다. 디자이너가 앞으로 산업의 새로운 용처를 제시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2013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세계디자인포럼 발표에서 하라 켄야는 “제품 생산 위주의 산업은 끝났다”면서, “이들(하우스비전, 센스웨어) 프로젝트의 목표는 새로운 산업의 비전, 가능성을 시각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디자이너의 능력으로, 인류가 가진 가능성을 눈으로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일반인들에게 가능성을 일깨워주는 것으로도 의식을 진보시킬 수 있다. 일반인의 의식이 변화되면 사회는 다음 단계로 발전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일반인들은 느끼기 어려운 사회 전반의 불편과 사용자의 드러나지 않는 니즈를 민감하게 감지하여 이를 토대로 미래를 제시하는 디자이너의 능력이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세상이 소비자 중심으로 변화되면서 디자인에 주목하는 경향이 생기고 있다. 뭔가를 새로 만들 때 우리가 가진 기술로부터 생각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니즈(Needs)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들 중에도 최근 ‘사용자경험디자인’ 등의 내부 조직 역량을 강화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변화를 나타내는 증거이다. IBM, GE, 엑손모빌 등 세계 주요 기업들은 인간을 연구하는 학제적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인텔의 경우 ‘상호작용 및 경험연구소’ (IXR)를 통해 ‘기술의 주인은 사람’이라는 명제 하에 디자이너, 심리학자, 소설가 등이 주도가 되어 인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연구함으로써 미래에 필요해질 기술의 비전을 개발 중이다. 
삼성전자 디자인센터도 인문학 전공자가 15%가 넘으며 LG전자, 현대자동차 등 국내 주요 기업도 소비자의 욕망을 포착해 새로운 경험을 주는 신사업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공급자 위주가 아닌 수요자 중심으로 변화되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디자인산업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디자인의 수요시장과 공급자의 역할을 변화시키고 있다.

출처 : 디자인이 궁금해, 2022, 윤성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