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디자인이 궁금해

07. 욕구를 찾고, 혁신을 만드는 디자인

SERVICE DESIGN 2023. 7. 13. 01:54

퇴원 요약지가 제대로 작성되지 않던 문제에 대해 디자인 회사 IDEO가 의사의 심리와 동기를 공감하고 이해함으로써 교육 프로그램과 평가 피드백 시스템의 조합으로 해결했던 사례를 소개한다. 디자이너는 사용자 경험 상의 문제를 감지하고 해결하는 역할을 한다. 사회문제 해결에도 디자이너들의 관여가 늘어나야 하며, 이를 위해 공공 서비스 부문에서도 사용자 중심의 혁신 방법이 정착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

감춰진 욕구를 찾고 그것을 실마리로 디자인한다

존스 홉킨스 병원(Johns Hopkins Medicine.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 있는 병원으로 21년 연속 미국 최고 의료기관으로 선정된 명성 있는 의료기관이다.) 은 의사들이 퇴원 요약지를 잘 작성하지 않는 것이 고민이었다. 경영컨설팅 회사에 문제해결을 요청했었지만, 컨설팅 결과는 실패였다. 병원 측은 보다 창의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끝에 같은 과제를 디자인기업에 다시 의뢰하게 된다. 디자인회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퇴원 요약지에는 퇴원하는 환자의 진료기록과 퇴원 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에 관한 내용이 기록된다. 퇴원 시점에 의사가 작성해야 하지만 한참 지나서야 작성되는 문제가 있었고 그마저 일부만 작성되거나 내용도 부실한 경우가 많았다. 반면 너무 많은 내용을 기재해서 필요 정보를 찾기 어려운 예도 있었다. 의사 대부분은 퇴원 요약지가 중요하지 않다며 인턴들에게 시켜 작성하도록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턴들은 퇴원 요약지 작성법을 배운 적이 없었고 작성할 줄 몰랐다. 퇴원 요약지는 일반 병원에서 참고하는데, 일반 병원에서는 누가 작성한 것인지 알 수 없어 상세한 정보가 필요해도 다시 요구하지 못했다. 작성자 또한 피드백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자기가 잘못 작성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프로젝트를 맡게 된 디자인기업 IDEO는 시작하면서 병원의 대표적인 이해관계자를 의사, 간호사, 환자, 환자 가족의 네 그룹으로 구분하고 이들을 움직이는 심리적 동기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한 조사를 했다.
의사의 의사결정을 이끄는 근본적 욕구, 동인(이끄는 힘)은 무엇일까? IDEO가 찾아낸 것은 ‘공포’라는 단어였다. 의사는 어떤 누구의 조언도 받을 수 없는 고독한 존재다. 때로는 의사의 결정이 환자의 생사도 가른다. 의사는 설령 확신이 없더라도 자신의 결정을 스스로 믿고 실행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는데 그 상황 자체가 두렵다는 것이다. 또 의사들은 자기가 정답을 모르고 있을 때도 이를 환자에게 숨겨야 한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의사들의 행동이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으로 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디자인적 접근은 ‘어떻게 하면 의사에게 공포심이라는 무거운 심리적 짐을 줄여줄 수 있을까? 그 공포심을 극복하고 더 현명한 결정을 하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그것을 위해 디자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IDEO는 의사들이 마음속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문제 인식을 바탕으로, 퇴원 요약지가 잘 작성되지 않는 것은 두려움이 작동하기 때문으로 추측했다.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이 남에게 물어보지 못하는 심리, 세부요소를 빠트리면 환자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뭔가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는 흔적을 남기기 싫다는 무의식과 같은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해석했던 것 같다.
설문이나 인터뷰만으로는 이런 숨은 심리를 알기 어렵다.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나중에 생길 수 있는 문제에 엮이기 싫어요. 퇴원 요약지를 알아보기 쉽게 작성하기 싫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솔직하고 솔직하지 않고의 여부를 떠나서 잠재되고 억압된 욕구이다 보니 말로 표현하기 불가능하다. 공감하는 능력과 민감성이 뛰어난 디자이너가 말이나 글이 아닌 행동 관찰을 통해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을까? 먼저 인턴과 레지던트들에게 퇴원 요약지 작성법을 교육했다. 주치의가 회진할 때 중요 정보를 요약 기록해서 그것을 퇴원 요약지에 적어 넣을 수 있게 하였다. 환자가 퇴원 요약지를 들고 원외 의료기관을 찾았을 때, 그 기관의 의사들이 이를 읽고 평가, 피드백해 주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의사들은 성적이 나쁘게 나오는 것을 두려워했기에 그 효과는 매우 좋았다. 이 조치 후 환자 퇴원 뒤 3일 이내에 90%의 퇴원 요약지가 작성되었고 2주 후에는 99%가 작성되게 바뀌었다.
이것은 디자인의 차별화된 특징이 잘 드러나는 사례이다. 사용자의 사정을 공감하고, 그의 행동을 관찰하고, 마음속 어떤 심리가 그 행동을 만드는지 해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 참고) 존슨 홉킨스 병원의 서비스디자인 사례가 소개된 기사 : [기획]‘사람’에게 다가가는 의료기관 서비스디자인, 청년의사, 2012.11.12. 
* 위 사례가 소개된 다른 글 : 서비스디자이너를 위한 안내서 중 서비스혁신 방법으로서 서비스디자인의 특징

불편에 대한 민감성이 혁신을 만든다

2차 대전 때 잠수함에는 산소가 얼마나 남아있는지 측정하는 기술이 없어서 함 내에 토끼를 두었다가 토끼가 죽으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식으로 산소포화도 감지기 대신 토끼를 활용했다. 디자인은 사용자 경험의 문제를 발견하는 토끼가 될 수 있다.
디자이너는 직업인으로서 훈련되고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미세한 제품/서비스의 차이를 느끼고 불편을 감지하는 훈련을 거듭한다. 지각, 인지, 감성의 예민한 감지자로서 미묘한 위화감(불편함)을 잘 알아차리고 공감력으로 사용자 경험의 문제를 발견해 내서 결과적으로 좋은 경험을 설계하는 전문가로 키워진다.

일본의 디자인기업 ‘트라이포드디자인’(tripod design)의 대표이자 도쿄대학 교수 ‘나카가와 사토시’ (Nakagawa Satoshi)는 유니버설디자인의 전문가이다. 트라이포드디자인은 제품 개발할 때 만 명이 넘는 ‘리드 유저’(lead user)라는 사용자 풀(Pool)을 활용한다. ‘감각’이 앞서 있다는 뜻의 리드 유저는 다양한 형태의 장애를 가진 장애인들로, 디자인 개발 시 아이디어의 도화선이 될 수 있도록 이들을 참여시키고 있었다. 장애인들과 디자이너들이 한 팀이 되어 제품과 서비스의 불편함을 고도로 세세한 부분까지 감지해 개선한다.
예를 들어 젓가락을 디자인한다면 어깨나 손목 근육, 손가락 등이 불편한 사용자들을 팀에 합류시켜 디자이너들과 함께 디자인한다. 디자이너들이 장애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불편을 느끼는 부분을 찾고 개선하면서 배운다. 장애인은 ‘불편함’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예민도가 높아서 제품의 위화감에 대한 민감성이 최고 수준인 전문가이다. 이들도 편하게 느끼는 제품이라면 비장애인에게는 더욱 편리할 것임이 분명하다.
실제 이들은 완만한 곡면과 각진 면을 가져 힘을 주지 않아도 손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잘 구르지 않는 투명한 젓가락을 디자인했고 이것은 일본항공 JAL의 퍼스트클래스용 제품의 원형이 되었다.

그림  한국 실무디자이너와 트라이포드 디자인과의 디자인워크숍 장면. 사토시 나카가와 (한국디자인진흥원. 2008, 해외선진기관워크숍사업) 디자이너들이 시각, 촉각의 감도를 낮추는 도구를 사용해 고령자의 경험을 시뮬레이션하고 제품을 개선한다.

 

그림 장애인과 협업을 통해 개발된 젓가락 (시제품)
그림 JAL에 최종 납품된 젓가락. 2008년 시카고 아테네움 굿디자인어워드 수상


우리는 모두 노인이 되는 중이고, 장애가 생길 가능성도 있다. 노약자, 장애인, 디자이너들처럼 예민한 사용자는 생활 속의 위험을 미리 감지하는 레이더의 역할을 해줄 수 있다. 디자이너는 문제를 감지하고, 이에 대한 구체적 해결책을 제안하고, 그것을 구현한다.


사회문제해결, 누가 할 것인가?

일상생활에서도 위화감을 민감하게 느끼고 불편해해야 좋은 디자인을 할 수 있다. 높은 공감력을 갖고 민감성이 뛰어난 예민한 디자이너야말로 문제점과 사용자의 잠재 욕구를 발견해 내는 좋은 제품/서비스의 설계자가 될 수 있다. 평균치의 민감성만으로는 사용자가 느끼는 불편을 찾아내기도 어렵고, 문제를 모르니 개선하기는 더 어렵다. 앞서 소개했던 자동판매기가 개선되지 않고 있는 예시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예민한 사용자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리고 예민한 사용자가 우리의 제품/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까다롭고 엄격한 품질관리가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과 같이, 제품/서비스가 까다로운 관점에서 세심하게 설계되어야, 덜 예민한 보편적인 사용자들도 편안하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 공감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사람이 문제를 더 잘 발견하고 해결할 수 있다.


문제는 아래 그림의 1~4단계처럼 다양한 정황으로 존재한다.

표 다양한 구성원들이 문제를 인식하는 4단계 (출처 : Tripod Design)


1. 문제가 명백하고 해결방법도 쉽게 찾을 수 있는 단계
2. 문제가 드러나 보이지만 해결방법은 잘 보이지 않는 단계
3. 문제가 보이지 않지만 불편을 느끼는 단계
4. 문제가 보이지 않고 불편함도 거의 인식 못하는 단계

그림의 세로선들은 민감성이 서로 다른 사회 구성원을 의미한다. 길이가 제각각인 것은 구성원 각자가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수준이 서로 다른 것을 말한다. 불편함에 대해 예민하게 느끼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3, 4단계의 위화감을 알 수 없는 반면, 좋은 디자이너, 예민한 디자이너, 장애인은 이것을 느낀다.
문제를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해야 더 정확히, 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문제해결이라는 주제에 대해 디자이너들의 관심과 참여가 늘고 있는 것도 디자이너들에게 이러한 인식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정부와 한국디자인진흥원은 제품/서비스의 개선과 산업에서 문제해결이라는 과제를 넘어, 공공서비스의 개선과 사회문제해결의 과제에 디자이너들이 더 관여도를 높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가야 한다. 최근 환자경험평가(의료질 향상을 목적으로 의료진과의 의사소통, 치료과정에서 겪었던 경험 등을 환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하여 병원을 평가하는 제도. 국내에는 2017년부터 시행되어 상급종합병원과 300 병상 이상 종합병원에 적용 중이다.)와 같이 수요자 중심으로 서비스 편의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 사회 각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
공공서비스 부문도 수요자 중심의 혁신 방법이 정착될 수 있어야 하겠고, 디자인이 수요자 중심의 개발 방법으로 주목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출처 : 디자인이 궁금해, 2022, 윤성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