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디자인이 궁금해

05. 공급자 중심의 세상

SERVICE DESIGN 2023. 7. 13. 01:58

세상은 공급자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어 불편함 투성이지만, 수요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디자이너들이 있어서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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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공급자 중심의 세상에 갇혀있다

우리는 수요자 중심의 세상에서 살고 있을까? 아니라는 증거가 우리 주변에 너무 많다. 자동판매기는 공급자 중심의 사고방식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증거다. 동전투입식 자동판매기가 1800년대 후반 개발된 후 20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대부분 자동판매기는 허리가 불편한 노약자나 허리를 굽히기 힘든 장애가 있는 사람이 사용하기에 불편하고 나쁜 형태이다. 제품 배출구가 바닥에 있어 허리를 굽히기 고통스러운 고령자들은 자판기를 이용하지 않는다. 자판기 사업자는 원래 고령자들은 자판기 사용을 선호하지 않으니 고령자를 위한 제품은 비치할 필요가 없다고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왜 모든 사람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허리쯤의 높이에서 음료가 배출되는 자동판매기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일까? 자동판매기는 전기로 작동하니 자동판매기가 개발되던 당시처럼 음료가 바닥으로 떨어지게 해야 할 이유가 없다.
대부분 사람들은 적당히 건강하기에 사소한 장애는 쉽게 극복하고 그 상황에서 어떤 위화감이나 문제점이 존재하는지 찾아내기 어렵다. 이 불편함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위화감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예민한(또는 불편한) 사람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공급자 중심의 세상에 갇혀 살고 있지만, 그 불편함이 치명적이지 않아서 감지하지 못할 뿐, 따지고 보면 여러 불편에 적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림 전형적인 자동판매기의 형태
그림 샤워 중에 샴푸와 린스 용기를 구별할 수 있습니까?



샤워할 때 눈을 감고 있어서 샴푸와 린스를 쉽게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패키지 모양이 같고 샴푸와 린스를 구별할 수 있는 표식이 작아서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제조사 입장에서는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해야 하니 패키지 모양은 똑같아야 하고 제품명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니 샴푸나 린스라는 표시보다 브랜드가 더 커야 한다. 그 결과 우리는 샴푸와 린스를 쉽게 분간하기 어렵다. 사소한 불편이니 상관없다고? 건강하지 못하거나 약하고 어린, 나이 든 사용자들에게는 사용을 불가능하게 하는 불편일 수 있다.
규칙, 규제를 통해 이런 불편한 요소를 제거할 수도 있다. 일본은 패키지 표준규격에 유니버설디자인(Universal Design) 규격이 포함되어 있어서 샴푸와 린스를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샴푸에는 패키지 옆이 울퉁불퉁한 돌기가 있고 린스에는 돌기가 없어 같은 형태라고 해도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만져보면 패키지를 구별할 수 있다.

그림 샴푸 린스를 쉽게 구별할 수 있는 표식(일본)

* 사진 출처 및 관련 기사 : 장애인 위한 작은 배려, 이렇게도 할 수 있다. 데일리임팩트, 2018.01.17.


그림 시각장애인도 쉽게 구별할 수 있는 샴푸 용기. 디자인 성정기

* 사진 출처 : https://t1.daumcdn.net/cfile/blog/20056D334F3E338307

이것은 디자이너 성정기가 눈을 감고 샴푸와 린스 용기를 구분하지 못해 실수했던 경험을 토대로 눈감고도 쉽게 구분할 수 있게 세로 홈과 가로 홈을 내 디자인한 샴푸와 린스 용기이다. 이것은 시각장애인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2007년 독일 레드닷 콘셉트 어워드 (Red Dot Design Award :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디자인 공모전의 하나. 제품, 커뮤니케이션, 콘셉트 부문으로 나뉜다. https://www.red-dot.org )의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를 수상했다.

이렇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보면 얼마든지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세상은 여전히 불편한 걸까? 불편이 대다수에게 치명적인 것도 아니고, 오랫동안 고착되다 보니 이것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일상생활 곳곳에 곰팡이처럼 숨은 사소한 불편함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영향을 주며 거대한 비효율과 스트레스를 만들어내고 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보편적인 수요자는 느끼지 못하는 생활 속의 숨어있는 불편을 디자이너가 민감하게 감지해 내고 그것을 해결할 대안을 제시해야 좋은 디자인이 만들어진다. 노약자, 장애인 등 소외된 소수의 불편까지 고려해서 제품과 서비스가 잘 디자인된다면 다수의 수요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쉽고 편하게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을 것이고 결국 모두가 불편을 덜 느끼는 사회가 실현될 것이다. 아직 많은 부분이 공급자 중심으로 설계된 채로 남아있고 우리는 여전히 그 세상에 갇혀있다.


수요자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디자이너

이케아의 디자이너 그레엄 핀들리(Graeme Findlay)가 책상 밑에 있는 아래 사진은 자신의 아이가 체험하고 있는 세계로 들어가 보기 위해 연구 중인 장면이다. 아이들을 위한 수납장은 지금까지 천편일률적으로 네모난 서랍들을 하나로 묶어놓은 모양이었다.

그림 그레엄 핀들리(Graeme Findlay)
그림 기존 어린이 수납장, IKEA


그레엄 핀들리는 아이들이 어떻게 놀고, 어떻게 물건과 환경과 관계를 맺고, 어떻게 물건을 보관하는지를 관찰했다. 그 결과 아이들은 가구와 독특한 관계를 맺으며 가구 자체도 놀이의 대상이 됨을 알게 되었고 정형화된 박스형 수납장 대신 장난감을 고정하는 고무 행거를 디자인하게 된다. 아이들이 스스로 장난감을 정리하는 행동 자체를 놀이처럼 하게 되는 개념의 모듈형 수납시스템 ‘Makalös’은 세계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수요자의 처지가 되어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지금까지 생각지 못했던 무언가를 만들 수도 있다.

그림 IKEA  Makalös와 제품 모듈



화성에서 온 공급자, 금성에서 온 수요자

(좌)기업이 [고객에게 우수한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고 응답한 기업, (우) 고객이 [기업이 고객에게 우수한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고 동의한 경우

* 출처 : Closing the delivery gap, 2005, Bain & Company, Inc.

컨설팅회사 배인앤컴퍼니(Bain & Company, Inc.)가 2005년 세계 362개 기업의 임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95%는 "우리 회사가 고객지향적인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라고 답했다. 또 80%의 기업들은 자기 회사가 경쟁사보다 차별화되고 우수한 상품, 서비스를 고객에게 제공한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기업들의 믿음과 고객의 인식은 너무나 달랐다. "당신과 거래하는 기업이 경쟁사보다 차별화되고 우수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느냐"는 똑같은 질문에 대해 고객 중 불과 8%만이 "그렇다"라고 응답했다.

공급자인 기업은 수요자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공급자는 제공자로서 자기 입장과 시각을 가지고 있어 고객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하기 어려운 것이다. 공급자에게 ‘수요자 중심으로 생각해야 함’을 지적하면 대부분 ‘우리는 원래부터 수요자 지향의 노력을 해왔다’고 말한다. 공급자가 가진 현실 인식이 고객이 느끼는 체감과 차이가 큰 이유는 무엇일까?


그림처럼 A지점은 100% 공급자 중심의 제품서비스를, B지점은 100% 수요자 중심의 제품서비스를 의미한다고 가정해 보자. 초기에는 전적으로 공급자의 관점인 A지점에서 제품서비스를 제공했겠지만, 점차 수요자 중심의 B의 방향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아주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고 해도 어쨌든 변화는 하고 있기에 공급자들은 ‘우리는 늘 수요자 중심의 혁신을 해오고 있다’는 생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결과가 충분히 수요자 중심의 제품과 서비스라고 말할 수 없다. 어떤 제품과 서비스가 수요자 중심인가 아닌가의 판단은 수요자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8%, 앞서 언급했던 배인앤컴퍼니의 조사 결과로 설명된다. 수요자 중심이 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수요자 중심,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느 여름 모 지자체에 국내 최초로 비키니 족을 위한 선탠 전용 해수욕장이 생겼다. 이 해수욕장은 전적으로 수요자 중심으로 개발된 것이었다. 지자체가 전년도 피서객 대상으로 수요조사를 한 결과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여성들이 남성들의 시선이 싫다고 말했던 의견을 토대로 여성을 위한 비키니 전용 해수욕장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이 해수욕장, 그 해 핫플이 되었을까? 전혀 아니다. 이용자 수가 전년보다 절반 이상 줄었다.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서비스를 개발한 것이지만 정작 원했던 것이 생기고 나니 사람들이 오지 않은 것이다. 수요자에게 원하는 것을 묻고 그것을 제공하는 1차원적 수요자 중심 디자인은 실패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사례이다.
‘여자를 너무 몰라~ 비키니 전용 해수욕장이 폭망한 이유?’ (국민일보 쿠키뉴스, 2014.7.31.)라는 기사에서는 “남자가 없는데 비키니가 뭔 소용?”, “비키니를 차려입고 해변을 찾는 여성들의 마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등 시민들의 의견을 통해 수요자 의견을 그대로 받아서 서비스를 개발하는 것의 허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림 모 지자체의 비키니 전용 해수욕장. 2014.7.

*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자동차를 개발한 헨리 포드는 “내가 고객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면 고객은 ‘더 빠른 말’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직접 보여주기 전까지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모른다.”라고 했고 스티브 잡스도 “많은 경우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다.”라고 했는데 이것도 같은 맥락이다.

수요자 중심이라고, 무조건 정답이 아니다. 무턱대고 해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답을 내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식으로는 실패한다. 더군다나 디자인은 본래 세상에 없던 무언가를 새로 창안해서 구현하는 일이기에, 수요자 중심의 디자인을 한다면서 수요자도 경험해보지 않는 무언가를 수요자에게 물어봐서 개발해서는 안 되고 또 가능하지도 않다.
비키니 전용 해수욕장의 실패는 수요자에게 의견을 묻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니즈(Needs)를 파악할 수 없고, 이에 따라 바른 정책적 해법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다음 글에서는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수요자의 욕구를 어떻게 발견해야 하는지, 수요자 중심의 디자인 관점, 방법을 다룬다.


출처 : 디자인이 궁금해, 2022, 윤성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