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디자인/서비스디자이너를 위한 안내서

2.4.4 새로운 디자인에게 주어질 새로운 과제

SERVICE DESIGN 2023. 4. 2. 23:29

'디자이너들은 더 큰 역할을 하게 되는 것만큼 더 큰 사회적 책임을 지게 될 것이며 이에 따라 문제 정의와 해결에 대한 새로운 역량이 필요하다. 좋은 디자이너는 민감성과 공감력을 바탕으로 사용자의 경험을 이해하고, 상상력과 창조력으로 감성, 심리와 행동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서비스를 설계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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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디자인센터에서는 디자인 활용 단계를 네 단계로 구분해 기업들이 디자인을 어떤 정황으로 활용하고 있는지 활용 정도를 조사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하는 모델을 ‘디자인사다리’라고 부른다. 디자인 성숙도를 ‘사다리’로 비유하는 이유는 디자인의 활용 수준이 단계적으로 상승하기 때문으로, 아래 단계를 거치지 않고서는 위 단계로 도약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단 디자인을 활용해 보아야 나중에 그것을 고도화된 수준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한 단계씩 점차 윗 단계로 발전하게 된다. 디자인을 스타일링으로서 활용하는 단계에서는 디자이너에게 새로운 문제를 정의하는 일이 주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다. 윗 단계로 갈수록 초기 기획단계에서 문제를 정의하고 방향을 정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림 : 디자인 사다리

* 출처 : 덴마크디자인센터 https://ddc.dk


디자인은 앞으로 문제해결을 하는 역할보다는 문제설정을 하는 역할이 더욱 강조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까지 시험 문제를 푸는 데에 집중해 왔으나 이제 출제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문제 해결자로서 디자인이 가져야 할 필요 역량과 문제를 설정하는 디자인이 가져야 할 역량은 크게 다르다. 시험 문제를 잘 풀기 위해서는 필요한 공식과 풀이 방법을 잘 알고 충분히 연습하면 되지만, 좋은 문제 출제자가 되려면 문제 해결 방법에 대해 연습이 많이 되어 있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왜,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근본 원리를 알고 있어야 한다. 필요 역량이 서로 다르다. 따라서 문제 설정의 역할자로서의 디자이너가 되자면 그 준비가 시급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를 잘못 설정해서 생기는 결과는 사냥할 때 엉뚱한 목표에 겨누고 활을 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니 총을 쓸지 활을 쓸지 선택에 따른 결과, 즉 문제 해결 방법을 잘못 선택하는 경우와 비교할 때 훨씬 큰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디자이너의 역할이 커지는 만큼 더 큰 사회적 책임을 지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림 : 디자인 활용 단계에 따라 필요 역량은 달라짐

* 출처 : 세상을 다시 디자인하다. 윤성원, 2009

새로운 디자인, 디자이너에게 앞으로 주어지게 될 책임은 어떤 것이 있을까? 이것은 비단 서비스디자인에 국한된 것이 아닌 앞으로 디자인의 과제라고 할 수도 있겠다.
첫째, 디자이너는 철저하게 수요자의 관점에서 문제 정의를 해야 할 책임이 있다. 공급자 중심으로 설계된 세상을 다시 수요자 중심으로 전환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디자이너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디자이너는 사람의 심리와 행동양식을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이제껏 공공정책이 추구하는 목표와도 유사하다. 디자인이 추구하는 목표가 공공정책이 추구하는 목표와 유사해졌다는 점은 흥미 있는 점이라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공공서비스의 혁신 방법으로서 디자인의 활용 가능성과 필요성은 앞으로 더 커질 것이다. 앞으로의 디자인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사례를 소개한다.

아이들도 두려워하지 않는 MRI 경험 디자인하기 - 미국, GE

어린아이가 처음 MRI 장비(자기 공명영상 장비) 앞에 서면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GE에서 24년간 일해 온 선임 디자이너 더그 디츠(Doug Doetz)는 우연한 기회에 자기가 2년간 공들여 개발한 MRI 스캐너가 설치된 병원에서 MRI 검사를 받기 위해 들어오던 소녀가 무서워서 우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날에서야 80%의 어린아이들이 MRI 검사를 받기 위해 진정제를 투약해야 한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아이들은 기계에 겁을 먹고 가만히 누워 있지 못했다. 자기에게는 더없이 훌륭하게 보이는 기계가, 아이에게는 단지 무서운 괴물 같은 존재라는 사실에 좌절감을 느낀 그는 어린 환자들도 겁내지 않을 MRI를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방법을 알아보던 중 상사가 자신이 경험해 봤던 ‘스탠퍼드 D스쿨’*의 임원 연수 프로그램을 추천했고, 더그 디츠는 교육에 참여하게 된다.
* 스탠퍼드 D스쿨 : 스탠퍼드대 부설 디자인스쿨. 창의성, 시각화 등 디자이너처럼 생각하는 방법(디자인싱킹)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2005년 설립. 공식 명칭은 ‘Hasso Plattner Institute of Design at Stanford’이다.

스탠퍼드의 워크숍은 인간 중심적 접근법으로 소비자의 요구를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신제품과 서비스를 구상하는 방법에 관한, 디자인싱킹 교육이었다. 교육에 참여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특별한 재원 없이도 사용자의 경험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집중한다. 교육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일일 보육 센터에서 아이들을 관찰하는 등 고객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 자원봉사자, 지역 어린이 박물관의 전문가, 다른 병원의 의료진 등의 도움을 받은 끝에 첫 번째의 시제품을 만들어냈고 이것은 나중에 ‘모험 시리즈’로 발전하게 된다. 그것은 MRI 검사실을 어린이를 위한 모험 공간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피츠버그대학 메디컬센터 소아병원에 시범적으로 설치하게 된다.
MRI 촬영 기사들을 아동 전문가와 디즈니랜드의 캐스터들에게 교육을 받도록 조치하여 아동을 위한 박물관이나 테마파크 직원들처럼 만들었다. 기술적 부분에는 전혀 변형을 주지 않고도 환경을 새롭게 디자인하고, MRI 촬영 기사용 시나리오를 만들어 어린 환자들이 모험의 여정을 떠날 수 있도록 했다. 아이들은 MRI 검진실에 들어오면서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다. 촬영기사는 아이들은 해적선 내부로 모험을 떠날 거라고 말해주고 배에 타 있는 동안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있어야 한다고 당부한다.
"좋아, 이제 너는 해적의 배에 오르게 된 거란다. 배에 오르게 되면 해적이 너를 찾지 못하게 가만히 있어야 한단다."
숨죽이고 숨어 있는 동안 나쁜 해적은 사라지고 그 ‘항해’가 다 끝나면 아이들은 검사실 벽에 있는 해적의 가슴에서 작은 보물을 하나 꺼내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림 : GE MRI검사장비 디자이너 더그 디츠(Doug Dietz)



MRI 기계가 원통형 우주선이 되는 시제품도 있었다. 이 이야기 안에서 MRI 기계가 내는 쿵쿵거리는 소음은 ‘초공간 항속 모드’로 바뀌는 중에 우주선이 내는 소리가 된다. 이렇게 지금은 아홉 가지의 모험 시리즈가 개발되어 있다. 새로운 어린이용 MRI 기계 덕분에 소아 환자에 대한 마취제 투여를 80%에서 10% 정도로 크게 줄일 수 있었고 환자들의 만족도도 90% 상승했다. 병원에서는 진정제 투입을 위해 마취 의사를 쓸 필요가 줄었고 하루에 더 많은 수의 아이들을 검사할 수 있게 되었다. 더그 디츠가 큰 성취감을 느꼈던 것은 그러한 물질적 성과가 아니라 다음의 장면에서였다. 여섯 살 꼬마가 변화된 MRI 검사실을 나오며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엄마, 나 내일 여기 또 오면 안 돼요?”

이 사례는 의미심장한 시사점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사용자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사용자를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더그 디츠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업(GE)에서 평생 경험을 쌓은 전문가였음에도 고객의 경험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와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현장에서 어린이 고객이 제품과 만나는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다면 그는 자기가 만드는 제품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제공자는 사용자를 모른다고 가정하고 ‘실제적인 사용자’의 ‘구체적인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실제적인 사용자’라는 것은 막연한 사용자가 아니라 ‘이제 막 여덟 살이 된 이선영’과 같이 구체적인 누군가를 말한다. 콕 집어 그의 욕구를 이해해야 한다. 그 사용자의 ‘구체적인 경험’ - 느낌, 감정, 위화감, 불편함 등 - 을 세부적으로 공감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객에 대한 애정, 관심, 배려심, 공감력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이들을 만나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두 번째로, 사용자에게 적합한 디자인이 ‘굿디자인’이라는 점이다. GE의 MRI 장비는 좋은 디자인으로 평가받아 이미 많은 디자인 대회에서 ‘좋은 디자인’ 상을 받았던 제품들이다. 하지만 어린이 사용자들에게 권위 있는 디자인상은 의미가 없다. 일반적으로는 제품디자인이 사용자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믿음을 줄 수 있다면 좋은 것이지만 아동이 이용하는 MRI 장비라면 매끈하고 신뢰감을 주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목적에 부합하는 적절한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다.

세 번째로, 좋은 제품이 아니라 좋은 사용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더그 디츠가 병원에서 고객을 만나기 전까지 그의 목표는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어린이 고객을 만난 후 그의 목표는 무섭지 않은 검진 경험을 만드는 것이 되었다. 결과물로만 보자면 단지 환경디자인이 개선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은 새로운 서비스 경험을 디자인한 것이다. 아이들이 느끼는 공포심을 흥미진진한 경험으로 바꾸기 위해서 단지 환경뿐 아니라 MRI 촬영기사를 디즈니랜드에 보내서 캐스트(cast) 디즈니랜드 내에서 아이들을 신나게 하는 역할을 하는 직원 교육을 받게 하는 식으로 조직과 시스템을 바꾸고 제공자의 역량을 변경해야 했다. 제품과 환경디자인은 그 목적 실현을 위해 변화가 필요했던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 MRI 검진실은 디자인의 새로운 역할을 상징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례에 관한 더그디츠의 발표 영상( TEDxSanJoseCA 2012) : https://youtu.be/jajduxPD6H4



디자인이 추구하는 혁신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을 중심에 둔다는 점, 공급자가 아닌 사용자 중심의 관점을 갖는다는 것이 일관된 특징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성, 효율성보다는 인간의 감성적, 심리적, 행동의 변화를 목표로 해야 한다.
초기 단계부터 개입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문제를 정의하고 통합적 해결방안을 구상한다는 점도 특징이다. 특히 거대한 변화 대신, 사소한 변화라도 즉시 시작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좋은 디자이너는 민감성과 공감력을 바탕으로 사용자의 관점으로 경험의 세계를 다시 살필 수 있다는 점, 상상력과 창조력, 시각화 능력으로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역량이 있다. 앞으로 디자이너에게는 새로운 우리의 미래를 구상하고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의 변화를 유발할 수 있게 하는 기회가 더 주어지게 될 것이다. 그 정점에 새로운 서비스를 디자인하는 역할이 있다.

그림 : 디자이너의 본원적 역량과 요구되는 역할

* 출처 : 지식경제부 전략기획단, 2011, 김광순



* 출처 : 보이지 않는 서비스, 보이는 디자인, 윤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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