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7. 13. 00:46ㆍ디자인/디자인이 궁금해
국가 정책의 차원에서 디자인 영역 확장은 시범사업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시범사업은 민간과 공공 모든 영역에서 실행되고 있다. 시범사업이 이렇게 광범위하게 실행되고 있는 이유는 적은 예산으로 소규모 실행해 그 결과를 확인, 평가할 수 있고 문제를 발견하거나 개선 방향을 찾아 본래 해야 할 사업을 더 정교하게 재설계하여 성공률을 높일 수 있는 매우 유용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범사업들이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원래 시범사업은 실패를 감안하고 하는 것이라고, 또 실패를 통해서 실패하지 않으려면 해야 할 점을 찾는 것에 의의를 둔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범사업도 실패보다는 성공이 낫다. 작게라도 성공에 근접하게 도달해야 이른바 ‘탄착점’에 더 가까이에서 의미 있는 개선 방향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국내 서비스디자인 도입에 앞서 공공부문에서 최초로 시도되었던 2011년의 서비스디자인 시범사업이 추진되었던 배경과 과정, 시범사업의 결과 새로운 디자인 영역이 확장되어 현재까지 이어진 경과를 살펴봄으로써 신영역에 디자인 역할과 효과를 입증하는 시범사업을 시도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다음 회에는 시범사업을 어떤 주제와 방법으로 추진해야 하는지 다루어 보겠다.
시범사업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본 사업에서 목표로 하는 정책 대상과 유사한 조건의 적정 수 이상의 대상에게 실행된다. 본 사업에서 제공 가능한 것과 유사한 수준의 제품과 서비스를 일정한 품질로 일정한 기간 제공한다. 시범사업은 적용 후 효과를 확인하고 그 결과를 통해 본 사업을 시행하기 위한 경과로서의 효용 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시범사업 실행 이후 결과에 대한 평가와 문제점의 확인, 분석, 개선방안 도출과 적용 등의 활동이 이어져야 한다. 시범사업은 '디자인이 새로운 영역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정책 대상자들에게 알려 인식을 확대하기 위한 전략'으로써 가치를 갖기 때문에 디자인 정책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영국 디자인카운슬이 보건부와 공조해 추진했던 '디자인 세균퇴치 프로젝트(Design Bugs Out)'의 경우도 사업 첫해 의료기기(제품디자인) 개선으로 의료환경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성과를 낸 후, 다음 차 년에 프로젝트를 확대해 ‘응급실에서의 폭력 사고 저감’ 등 서비스디자인으로 의료서비스와 의료시스템을 개선하는 식으로 점진적으로 디자인의 역할 확대를 실현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리적인 제품, 환경 개선으로 감염을 줄이는 실질적 성과를 낸 후,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영역으로 디자인 역할을 확대해 간 것이다.
아직도 디자인이 문제해결 방법론으로서의 가치로 보다는 '실체화된 무엇'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통념상 정부 정책관계자 및 민간에게 새로운 차원의 디자인 역할, 예를 들면 '서비스디자인'을 디자인의 영역으로 인식되게끔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디자인 세균퇴치 프로그램의 예에서처럼, 의료 등 디자인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지 않은 다양한 전문분야에서 디자인 개발 사업을 우선 추진한 이후, 디자인 결과물이 활용되는 서비스를 개선하는 식으로 보편적 정서상 납득할 수 있는 방향으로 추진하는 것이 좋다. 눈에 보이는 것(물리적, 피상적이고 즉시 해결 가능한 단순한 문제)에서 시작해서 보이지 않는 것(정서, 감성 등 심리적이고 보다 본질적인 것,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복잡한 문제)으로. 특히 개선을 추진해야 할 주체가 개선을 열망하지 않으며(개선 결과가 성과와 연계되지 않음으로) 개선 결과가 국민 다수에게 혜택을 가져올 수 있는 공공영역을 중심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2010년 9월 디자인산업 육성의 주관부처인 지식경제부 디자인브랜드과(현 산업통상자원부 엔지니어링디자인과)의 박종원 과장(현 경상남도 경제부지사)은 디자인산업 육성을 담당하는 공공기관인 한국디자인진흥원으로부터 서비스디자인의 개념을 접하게 된 후, 서비스디자인 시범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서비스디자인의 가능성을 파악하고 이것을 사례로 만들기 위한 시범사업으로 에너지 고지서를 다시 디자인함으로써 사용자의 행동 변화를 유발해 에너지 절약을 하게끔 하는 도전적 주제의 서비스디자인 시범사업을 계획한 것이다. 이것은 국내 공공부문에서 최초로 시도된 서비스디자인 시범사업이었다.
2010년은 영국 디자인카운슬 등 해외 선진국의 디자인 진흥기관과 연구소, 학계, 디자인 커뮤니티에서 ‘범죄 유발 심리를 줄이는 디자인’, ‘학교에서의 생활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디자인’, ‘건강관리를 잘할 수 있게 유도하는 디자인’ 등 생각과 행동을 바꾸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디자인 역할을 주장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던 때였다. 사회문제해결 디자인의 무한한 가능성과 효과를 입증하는 다양한 사례들이 등장해 콘퍼런스, 학술대회, 디자인커뮤니티의 논의 주제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사회문제해결 디자인과 같은 주제는 정부는 물론이고 디자인계에서도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고 디자인 정책의 범위와 과제로도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서비스디자인의 잠재력에 기대를 걸고,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디자인’이라는 주제로 당시 정부 관계자, 그중에도 특히 예산을 담당하는 기획재정부의 공무원을 설득할 수 있는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사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실질적 증거를 만들자는 산업부와의 합의에 따라 이 시범사업이 계획되었다.
산업부가 주관하는 산업영역 내에서 에너지 문제는 현안 과제 중 늘 선두에 있는 문제였기에 자연스럽게 ‘디자인을 통한 에너지 절감’을 주제로 결정하였다. 한정된 자원을 고려해 사용자의 행동 변화를 유발하는데 가장 효과를 크게 미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것을 꼽았는데 그것이 '에너지 고지서'였기에, 고지서의 디자인 개선을 세부 목표로 정했다.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의 디자인을 바꿈으로써 그 고지서를 받은 사람들의 에너지 절감 행동을 유도하는 것이 이 시범사업의 도전 과제가 되었다. 민간 서비스디자인 연구 기관인 한국디자인지식산업포럼 (책임연구자 최미경)이 연구, 디자인개발 등 시범사업을 진행했다.
같은 평형대 이웃보다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면 빨간색 고지서를, 보통은 노란색을, 적게 사용한 집은 녹색 고지서를 받게 된다. 정보디자인을 활용하여 사용량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개발했다. 고지서에 담긴 정보는 오래 정확히 기억될 수 있는 정보디자인으로 표현되어 사용자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보기에만 좋은 고지서가 아니라 사용자 리서치와 테스트를 통해 에너지 절감해야겠다는 필요를 느끼고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게 하는 디자인이다.
고지서는 2011년 1월~3월간 방배동 OO아파트 600 가구를 대상으로 배포되었고 월평균 10%의 전기료 절감 성과를 냈다. 당시 한 해 전국 주택용 전기 사용액 7.6조 원의 10%면 연간 약 7천6백억 원의 예산 절감을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례는 2011년 국제디자인공모전 IDEA어워드 파이널리스트에 선정되었고 2011년 11월 행정제도 선진화 우수사례 경진대회에서 국무총리상 금상을 수상했고, 2014년 에너지 절약 촉진대회에서는 이 아이디어를 적용한 에너지 절약형 고지서가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 시범사업의 결과가 매체에 알려지면서 ‘고지서 디자인이 왜 서비스디자인인가, 시각디자인이 아닌가’라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시각디자인, 제품디자인, 환경디자인과 같이 디자인행위의 결과가 어떤 대상물에 구현되는가에 따라 분류되던 기존 디자인 분류 개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에너지 전달 체계 중 사용자의 에너지 절약 행동을 이끌어내기 위한 가장 적합한 매개물을 고지서로 보았기에 고지서를 디자인한 것이었으며 서비스디자인 방법을 활용해 에너지를 절약하는 행동을 유도하기 위한 디자인이었다. 무엇보다 이 시범사업은 전술한 것처럼 서비스디자인을 디자인산업의 새로운 확장된 영토로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추진되었던 것이었기에 과정도 서비스디자인 방법을 활용해 실행했고 결과도 서비스디자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에너지 고지서 서비스디자인 시범사업을 시작으로, 한국디자인진흥원은 매년 2개 이상의 공공서비스디자인 시범사업을 시행하게 되면서 다양한 분야로 시범사업의 범위를 확대하였고 이것은 국내에 서비스디자인을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범사업이 서비스디자인의 서막을 열다
2010년대 이후 디자인은 기존 영역을 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서비스디자인은 그 변화의 선두에 있는 신생 디자인 영역이다. 사용자의 ‘서비스경험’을 디자인하는 활동 및 이를 전문적으로 실행하는 디자인 영역을 의미한다. 이 외에도 서비스디자인은 매우 다양한 개념 정의가 존재한다. ‘디자이너가 디자이너의 자질과 도구를 가지고 경영컨설팅이 다루어 왔던 서비스기획이라는 대상을 다루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서비스디자인은 여러 분야에서 실현된 사례들을 종합해 보면 서비스의 제공자 및 수요자의 향상된 경험을 만드는 것에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제공자의 생산성과 효율성 향상에 초점을 두는 경영컨설팅과 비교할 때 관점, 접근 방법, 결과가 매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용자에게 어떤 차별화된 경험을 주는 가로 제화의 가치가 결정되는, 경험경제(experience economy) 시대가 도래한 것이 경험디자인, 서비스디자인과 같은 무형의 디자인 역할이 주목받게 된 배경이다. 1993년 애플 부사장 도널드 노먼이 사용자경험디자인이라는 개념을 만든 이래 사용자경험(User Experience)을 만드는 영역은 디자인 영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해외 IT기업, 제조업 등에 UX디자이너, 서비스디자이너 직군이 생겨나고 있다. 삼성 SDS UX팀은 200명 이상, 삼성전자도 제품디자이너 대신 UX디자인 채용이 늘어나고 있다.
2008년 하버드 비즈니스리뷰에 IDEO의 팀브라운(Tim Brown)이 사고방식으로서의 디자인(Design Thinking)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경영자 사이에서도 무형의 디자인 역할과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었다.
서비스디자인은 무형의 영역을 다룬다는 측면에서 유형의 제품을 대상으로 하는 기존(1990년대 이전)의 디자인의 역할과 큰 차이점이 있다. 최근에는 조직문화 혁신, 사회혁신, 사회의 복잡한 문제해결 등 복잡하고 기존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디자인 방법을 활용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은 서비스디자인이 국내에 자리 잡게 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해왔다. 2010년부터 산업부와 한국디자인진흥원의 시범사업 및 R&D 과제로 서비스디자인 과제가 추진되면서 수요시장과 디자인계에도 서비스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나타났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은 2010년 ‘에너지 고지서디자인’ 서비스디자인 시범사업을 첫 시작으로 에너지, 보건의료, 복지, 산업단지, 전통시장, 학교 등 서비스디자인 시범사업으로 다양한 공공분야의 사례를 만들어 갔다.
2011년에는 한국디자인진흥원 주관으로 ‘design dive’라는 서비스디자인 워킹그룹 활동이 시작되어 2013년까지 6차례에 걸쳐 40여 개의 주제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공공서비스디자인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이를 통해 총 5백여 명 이상이 참여했다. 참가자 간 경험이 확산되면서 2011년 이후 공공기관, 지자체, 민간에 이르기까지 유사 형태의 프로그램이 등장하게 되었고 참여자들 간 서비스디자인 기업을 창업하게 되는 등, design dive는 국내에 서비스디자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산업을 발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디자인다이브란 : https://cafe.naver.com/usable/1087
산업의 서비스화 경향이 나타나면서 민간 수요시장에서 사용자 경험의 총체적 가치를 향상할 방법에 대해 주목하게 된 것도 서비스디자인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 금융산업(2011, 현대카드)과 의료산업(2011, 대한병원협회 서비스디자인 국제회의)에서 가장 먼저 서비스디자인에 대한 움직임이 나타났고 제조업에서는 삼성전자가 가장 빨리 인력 채용, 서비스디자인, 사용자경험디자인 인력을 보강하고 서비스디자인 교육과 연구 추진 등 내부 역량 강화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은 서비스디자인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인식하고 2013년 서비스디자인 전담부서를 설치했고 제도, 교육, 디자인기업지원, 문화확산 등 기관 전반의 활동에서 서비스디자인의 기반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노력을 본격화했다.
지금껏 디자인이 시도하지 않았던 분야에서 다양한 사례를 만들기 위한 시범사업, 연구개발, 교육 등 서비스디자인의 기반을 만들기 위한 활동을 추진함과 동시에 ‘산업디자인전문회사’, ‘우수디자인제품선정’ 등 각 주요 사업에 서비스디자인 분야를 추가함으로써 디자인 영역 확장에 대한 정책적 지원체계를 갖추어갔다.
2014년 한국디자인진흥원은 행자부와 산업부와 함께 정책 기획 과정에 서비스디자인을 적용하는 ‘국민디자인단’ 시범운영을 통해 효과를 확인하고 2015년 10배 이상 확대된 규모로 국민디자인단 사업을 본격 시작, 현재(2020년)까지 1천 개 이상 과제에 1만 명 이상이 참가해 정책과 서비스의 문제를 발견하고 개선하는 활동을 지속했다. 국민디자인단은 소통과 참여 중심의 정책 개발을 중시하게 된 최근 정부 기조에 발맞추어 국민참여형 정책개발의 대표적 방법으로서 정착되면서 그간 공급자 중심으로 개발되어 온 공공서비스에 대한 국민 인식을 개선하고 공공영역의 디자인 시장을 확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출처 : 위 글은 '(논문) 에너지고지서 서비스디자인 사례를 통한 시범사업의 효과적 추진방안 연구 - 2021. 윤성원. 디지털예술공학멀티미디어논문지' 를 요약한 글입니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은 아직까지 디자인이 활용되고 있지 않지만 디자인을 통해 혁신을 이룰 수 있는, 새로운 기회 영역을 탐색하여 계속적으로 시범사업을 시도하고 성과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출처 : 디자인이 궁금해, 2022, 윤성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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